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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④ -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약 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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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서론>

아름다운 가을이지요? 올 가을에는 하나님께서 유달리 아름다운 가을날들을 많이 펼쳐 주시는 듯 합니다. 아름다운 가을하늘에서 하나님의 위로해 주시는 사랑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느끼십니까?

사람은 사랑받는 기억이 많을 때 아름답게 성숙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가을이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 저희가 야고보서의 멧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시련을 잘 견디십시오,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성질을 다스릴 줄 아십시오 이런 주제들을 보았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1장 마지막 단락의 제목은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모순(矛盾)을 극복해 가는 과정입니다.자기 안의 모순, 이런 것입니다. 청렴을 강조하던 분이 뒤로는 뇌물을 받아 치부하는 모습, 순결을 노래하는 사람이 뒤에서 바람피우는 모습, 정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술수를 일삼는 경우, 다른 사람보고 지 맘대로 행한다고 비난하면서 자기는 더욱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고집피운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많은 경우 자기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수양회 이야기 - 50명.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은 복을 받을 것이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배우자는 이쁜 여자를 찾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멍에를 매지 말라 가르치면서 자신의 믿지 않는 가족에게는 예수님 잘 믿어서 착한 배우자를 주십시오 기도하는 모습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다, 어떻다 비판하는 사람이 예배시간도 못 지키는 경우, 교회가 헌금을 강요한다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은 바른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를 하면서 돈을 밝히는 경우,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부자되려고 애쓰는 모습, 자신은 큐티 안하면서 큐티는 꼭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모습, 예배 시간에 늦지 말라고 강조하는 목사가 다른 약속 시간은 천연덕스럽게 늦는 모습, 이런 모습들입니다.

자기 안의 모순을 보이는 뿌리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자기 이익의 유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다는 것, 성화를 이룬다는 것은 이 마음과 삶에서 배어 있는 자기중심성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고침을 받아가는 과정이 진정한 사람됨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 안의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모순, 스스로 속이는 죄악을 벗고 아름답게 성숙하도록 사도 야고보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깨우칩니다.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 1장 마지막 단락의 본문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세 가지 자기기만, 자신을 속이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 사도 야고보는 당신에게 이렇게 자기를 속이는 모습을 벗으라고 권고합니다.

첫째로, 진리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십시오<22-25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가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까? 도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절>

여러분, 오늘 아침에 예배당에 나오면서 거울을 보았더니 턱 밑에 밥풀떼기가 하나 떡 붙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그냥 붙여 놓고 집을 나서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을 뭐라고 그럽니까? 꼴불견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같다고 비유합니다. 거울은 자신의 모양, 꼴을 알게 하는 기능을 하는 도구입니다. 내 마음의 꼴, 내 영혼의 꼴을 알게 하는 도구가 말씀의 거울인데, 꼴이 사나운 것을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꼴불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고 외모에는 그렇게 즉시 적용을 하면서, 내면의 마음에는 적용을 안하는 모습을 야고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지적합니다.

제가 요새 몸무게가 자꾸 늘어나고 몸은 허약해지는 것이 제 삶의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어떤 교인이 ‘이소라의 다이어트 3개월 완성’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이 책이 목사님 삶을 바꿔 줄 것입니다. 그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을 바꿔 주었습니다. 목사님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꼭 읽으십시오.”

그리고 3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저는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이 커지고 배는 조금 더 볼록렌즈가 되고. 그래서 그 교인이 묻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 책 안 읽어보셨습니까?”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책 잘 읽어 보았습니다. 참 좋던데요, 재미도 읽고 유익하기도 하고 아주 마음에 쏙쏙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12가지 색연필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어떤 구절들은 외우기도 하고 책상 앞에 붙어 놓기도 하고 중요한 단어는 사전을 찾아서 어근도 조사해 보고 그래서 성경공부 때 인용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상담도 하고 했지요? 그 책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그 책 정말 좋던데요. 그런데 그렇게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런 식으로 대합니까? 암송도 하고 성경을 쓰기도 하고, 다독반, 정독반도 하고, 골든벨도 하고 별별 것 다 하지만, 만약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보고 “빛좋은 개살구”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영혼을 빛좋은 개살구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지식을 아는 것이 영적인 성숙으로 잘못 생각합니까? 학위가 인격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전9:1> 말씀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요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똑똑한 것이,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아름다운 인격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학벌의식이 아직도 강해서 똑똑한 것 = 선한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아직도 팽배합니다. 똑똑한 것, 지식이 많은 것은 많은 편리함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숙한 것, 선한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영적인 성숙, 인격적인 성숙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잘 순종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맞아요 목사님. 그래서 저는 아예 성경을 안읽습니다. 성경 공부만 많이 하면 뭐합니까? 머리만 커지면 뭐합니까? 실천을 안하는데. 그래서 저는 아예 큐티도 안하고 성경읽기도 안하고 아예 안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이중으로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일 뿐만이 아니라 오만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무대뽀에다가 똥고집까지 갖추면, 이 사람은 성령님도 못말립니다. 이런 사람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초라한 실상을 비춰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발견된 나의 초라한 실상 앞에서 도피하지 말고 도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애통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때에, 초라한 내 실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한결같이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이런 꼬라지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가 더 가슴 져미게 새겨집니다.

영적은 성숙은, 내 안의 갈등과 예수님의 은혜의 치유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내 안의 모순은, 자아발견의 창조적 갈등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감동을 거쳐서 교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울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배우십시오. 읽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발견되는 내 꼬라지에 뒤돌아서지 말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그 은혜 안에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능력을 입어 적용하기를, 말씀을 행하기를 다시 도전해 보십시오.

이전에 나의 의를 위하여, 나의 체면을 위하여는 다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았던 내 삶의 거짓과 모순을,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쁘게, 쉽게 고쳐갑니다. 

자기를 속이는 모순의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성숙을 이루기 위하여 둘째로는, 당신의 혀에 재갈을 먹이십시오. 혀를 다스릴 줄 아십시오<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공동번역>”

이번에는 누가 자기를 속이는 사람입니까? 나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 나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혀를 재갈 먹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열심있는 사람하면 어떤 특징이 떠 오릅니까? 말 잘하는 사람, 말 많이 하는 사람 아닙니까? 성경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특징을 입술에 재갈을 물리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예수님께 열심있는 사람의 특징는 도리어 말이 많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의사나 한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가면, 이 사람의 건강상태가 어떠한 지 알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아~” 해 보라고 하지요? 아니면 혀를 내밀어 보라고 하든지. 한의사들이 환자의 혀의 상태를 보면 이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듯이, 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면, 이 사람의 영적인 건강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예) 옛날에 어떤 왕이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에 의하면, 어떤 약도 소용이 없고 오직 암사자의 젖만이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큰 현상금을 걸었어도 아무도 감히 나설 엄두를 못냈는데, 지략이 뛰어난 젊은이가 자기가 구해 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젊은이, 새끼 사자를 한 마리 구해서 사자굴에 있는 암사자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열흘쯤 지나서 암사자하고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마침내 암사자의 젖을 조금 짜낼 수 있었습니다.

사자 젖을 구하여 왕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이 사나이 길에서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 속에서 자기 신체의 각 부위들이 사자 젖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공로라며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발이 말합니다. “나 없으면 사자굴에 갈 수나 있었겠냐?”
손이 말합니다. “네 발로 사자젖 짤 수 있어? 사자젖을 짠 것은 나야!”
눈이 말합니다. “그게 사자젖인지 곰젖인지 나말고 누가 분간할 수 있는데?”

서로 나서서 시끄럽게 다투는 데, 이번에는 혀가 끼어 들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소용없어. 만약 내가 없어서 말을 할 수 없다면, 너희들은 아무 쓸모가 없을 테니까.”
혀의 말에 그러자 다른 신체 부위들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자젖을 구하는데 지는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했으면서 큰소리만 친다고 비웃고 구박하고 왕따를 시켰습니다.

이윽고 사나이가 잠이 깨어 왕궁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가 임금님 앞에 사자 적을 내려 놓는 순간 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의 젖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 노발대발한 임금님이 그 사자젖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이 사나이의 눈탱이가 붓고 손은 비틀어지고 발은 부러지고 한 후에, 신체 부위들은 혀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혀의 중요성에 대하여, 탈무드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사람도 역시 입으로 걸려든다.”

왜 사람들이 혀를 재갈 먹이지 못합니까? 대게 이런 경우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기를 알아주기를 바래서. 자랑을 하고 싶어서. 오해를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억울한 일을 못 참아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자기 생각을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등등입니다.

예) 지난 번 여름수련회 예배당 뒤에 붙어 있었던 우화, 기억하십니까? 개구리가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좋은 꾀를 하나 냈습니다. 이 개구리, 참새 두 마리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참새야, 너희 둘이 나뭇가지 양끝을 물고 날아가주렴. 내가 나뭇가지의 가운데를 물로 있으면 그러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겠니? 너희가 조금만 도와주렴.” 그러자 참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를 하나 물고 와서 드디어 개구리를 가운데 물리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습니다.

이야 신나게 날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땅에서 이를 보고 소리를 쳤습니다. “야 누구 아이디어야! 기발한데...” “누구긴 누구야... 바로 내 아이디어지..” 한 마디 했다가 입벌린 개구리 그만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마음이 만족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통치, 사랑의 하나님이 결국은 다스림을 믿고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릴 줄 압니다. 반면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바랍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요.

여러분, 다른 사람의 말에 속지 마시고 당신 자신의 말많은 모습에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자고로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였듯이, 말이 많은 사람치고 성숙한 사람은 적습니다. 경건, 영적인 성숙의 정도는 말이 많은 것과 반비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혀에 재갈을 먹일 수 있습니까? 잠시도 쉬기 싫어하는, 물에 빠지면 그샐 못참아서 붕어랑 이야기해야 하는, 내 혀에 재갈을 먹일 수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혀만 재갈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혀에 재갈을 먹이기 위해서는 마음에 멍에를 매야 합니다. 내 마음이 선하신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면 할수록 입에 재갈을 먹일 수 있습니다. <26절> 공동번역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26절>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공동번역>”

이런 뉘앙스 받습니까? 신앙생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허약하니까, 마음이 안정이 안되어서 불안하니까, 혀를 억제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탓하고, 나 알아주라고 떠벌리고 난리를 치는 것이지요.

가만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신뢰해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결국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 잠잠할 수 있습니다. 억울해도 참고, 분해도 기다리고, 오해를 받아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불평하지 않아도, 남의 탓 하지 않아도, 떠벌리지 않아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 지켜보시고 잠잠히 당신을 의뢰하는 자를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잠잠하기를 배우십시오.

자기를 속이는 모순의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성숙을 이루기 위하여 셋째로는, 신앙의 좋은 모습에 대하여 똑바로 이해하십시오. 참된 경건, 참된 종교, 참된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지 똑바로 이해하십시오<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을 대하면 꼭 이런 뉘앙스 여러분도 느끼지 않습니까? 무엇이 참된 종교, 참된 신앙입니까? 신앙이 좋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뉘앙스를 여러분도 느끼지요?

신앙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의 개념에 대하여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참된 경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가르쳐 주는 야고보서의 말씀,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약자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세속을 거부하십시오. 야고보가 꼭 고아와 과부만 돌보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세상에 소외된 자, 세상에 약자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고아와 과부를 든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외국인노동자, 난치병 환우들, 극빈자들, 독거노인들, 탈북자들, 소년소녀 가장들.. 따뜻한 이웃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낮은 데로 향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놓은 데를 향한 열망은 욕망 내지는 야망입니다.

만약 당신의 기도, 비전, 소원이, <약1:27>과 반대로, 세상의 힘있는 사람 축에 들고자 하고 세상의 영광을 좋아하는 것이 신앙의 추구, 이유라면, 당신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신앙이 좋은 모습,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신앙이 좋은 모습이 어떤 모습이라고 여기는가? 당신이 닮고 싶은 신앙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용조, 옥한흠, 박성수, 황성주, 정근모 이런 사람들입니까?

김진홍, 가가와 도요히꼬, 테레사, 스데반 이런 분들을 닮고 싶은 마음은 혹시 없습니까?

The Upside-Down Kingdom,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된 “돈, 교회, 권력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저자, 도널드 크레이빌은 하나님의 나라는 상하도치된 나라, 상향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향지향적인 사람을 위한 나라임을 깨우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나 서구사회의 교회가 벗어야 할 제일의 과제는, 교회를 미국제 복음주의인 번영의 복음(prosperous gospel)의 오염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믿고 번영하자!”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정신이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신앙이 좋은 것, 훌륭한 신앙인, 참된 경건은 성공과 업적의 환상을 좇는 상향지향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세상의 영광일 뿐입니다.

신앙이 좋은 것, 참된 경건은 약한 자, 소외된 자,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자신의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입니다. 

또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세속, 세상적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가 이생의 자랑이니..” 더 육신의 쾌감을 맛보고자 하고, 더 많이 가지고 새로운 것을 보는 낙에 살고자 하고 그리고 더 많은 존경과 인기,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세속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경건에,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영적 성숙에 방해가 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세속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것은 사랑이 성숙해 가는 것이며, 또 하나 순결과 공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선각자, 서재필이 미국으로 도망가서 바닥의 인생을 살 때에, 도움 받기를 거부하는 서재필을, 홀렌백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설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표를 모으고 어떤 사람은 골동품을 모으지만 나는 사람을 모은다.” 홀렌벡은 소비와 축적을 거부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기꺼이 돕습니다. 이 모습이 참된 신앙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서재필, 개인의 입신양명인 영의정 자리를 거부하고 백성을 일깨우는 독립신문을 만드는 일에 헌신합니다. 이 모습이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이름으로 세속에 타협하지 마십시오.
약자를 향한 무관심을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핑계대지 마십시오. .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참된 신앙, 경건의 모습은 약한 자와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사랑과 세속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는 삶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오늘의 신앙생활은 과연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기초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피상적 거품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 보십시오.

말을 많이 해야만되는 불안과 불신의 자리를 떨치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잠잠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성공과 업적, 상류와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상향지향적인 마음이 신앙이 좋은 것인양 착각하지 마시고 낮은 데를 향할 수 있고 세속을 거부하는 바른 신앙의 초점을 가지십시오.

그리스도는 실재(reality)입니다. <골2:17>에 의하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에서 그림자는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몸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실재(reality)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허상을 깨고 실상에 직면하는 경험입니다. 남편 많은 사마리아 여인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베데스다 연못가에 40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도, 여리고 길가의 소경도, 백부장도, 장관 니고데모도, 세리 삭개오도 그리고 제자들도 더 나아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당대의 종교인들도 예수님 앞에 서면 사람들은 마치 벌거벗듯이 자신의 실상에 직면하는 체험을 합니다.

겉으로는 사회적 지위와 반반한 외모, 혹은 환경적 핸디캡으로 가려놓았던, 초라한 나의 실상, 죄많은 실상이 예수님 앞에 서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 앞에 선 실상의 체험 앞에서, 사람들의 운명은 두 갈래로 갈리워집니다. 초라하고 죄많은 자신의 실상을 시인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꿇는 자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의 새생명과 사랑의 새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제는 모순된 자아를 안고 살아가는 고통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참된 삶, 행복과 의미의 삶을 기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죄인의 실상을 부인하고, 자기를 속이는 모순을 끝까지 감추고자 했던 사람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이들에게는 새생명의 기쁨이 없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만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도 초라한, 죄인된, 이기적인 실상, 자기중심성이 가져온 모순된 실상을 깨우침받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껍데기 종교, 삶은 없고 말만 많은 종교, 세상적 성공을 신앙이 좋은 것인양 착각하는 세속 종교...깨우침받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처럼, 여전히 세상의 영광을 향하는 길, 스스로의 모순을 감추는 길, 그래서 예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길을 고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제자들처럼,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 즐거워하는 새생명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는 새생활, 낮은 자의 평강을 누리는 새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스스로 속이는 껍데기, 허영을 벗고서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오도록 당신을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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