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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찾아서 (신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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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세종 목사

샬롬! 샬롬! 오늘은 신 33:29절의 말씀으로 "행복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왜 사십니까?
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살 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종교나 철학은 모두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찾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철학의 목표도 역시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철학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이다"라고 말하였고 심지어 골 2:8에서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다"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왜 사람이 행복을 찾는 것이 헛된 속임수가 되는 것일까요?
철학자들은 사람 속에는 이성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선택하게 하므로 인간 스스로 힘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 더욱이 사람에게는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이 법정이 있으니 염려 말라. 사람은 위대하다. 만능인이다.

그 동안 사람의 노력으로 얼마나 과학이 발달하였습니까?
전에는 그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잇는 일들이 이젠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젠 DNA를 조작만 해도 사람을 복제할 수 있으며 이미 1960년대 사람의 힘으로 우주를 정복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발전되고 있는 줄기세포를 통해서 라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얼마든지 척추마비환자를 깨끗하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성령의 치료의 광선이 없어도 예수의 십자가 피 뭍은 손이 없이도 다 된다.
전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가물 때면 갈멜산에 올라가서 목이 찢어져라 하나님을 찾았지만 봐라 지금은 비행기에 구름 씨만 싣고 올라가서 뿌리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아닌가?
사람의 이성으로서 과학을 잘 발전시키기만 하면 인간 미래의 세계는 얼마든지 잘 될 수 있다.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할 정도로 과학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없이도 그래서 과학만 있으면 이 땅이 천국이 될 줄을 알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발달시킨 과학에는 엄청난 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낙관적 기대는 1929년 세계1차대전과 뒤이은 1930년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고 1차 대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그 기대는 깡그리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후에 "이것이 인류의 문명을 100년이나 앞당길 수 있다"호언장담하였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바닷물을 피 빛으로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까?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보세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휴전국이며 둘로 나뉘어져있는 우리 조국도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죠.
100년이나 앞당길 수 있다 호언장담하였지만 그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때죽음을 당할지는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사람의 이성을 통해서 과학은 개발이 되도 인간세계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이론이지 실제가 아닌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철학을 "헛된 속임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이 땅에 utopia가 건설될 수 없다"하면서 그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생산하고 꼭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면 다시 말해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만 잘되면 이 땅에 천국이 건설될 수 있다.
하나님은 천국 건설의 방해자이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레닌이! 볼세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기독교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utopia 사상은 채 100년을 넘기질 못하고 70년만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가리켜서 빨갛다 못해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없이는 안되기 때문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도 잃어버린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이런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는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행 4:12에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갈자가 아무도 없다"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요 3:16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 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다 헛된 짓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이 기쁨을! 빼앗을 자 없고 절대로 빼앗기지 아니하는 이 기쁨을 찾고 누릴 수 있다고 하셨을까요?

여러분!
왜 기쁨이 없으십니까?
왜? 행복하지 못하십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손이 짧아서 너를 구원하지 못함이 아니요 내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오직 너와 나 사이에 죄가 가라 막혔기 때문이다" 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시므로 나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이 대속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여기 '다'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①간음하다 잡혀와서 이제 사람들에 의해서 돌로 맞아죽어야만 하는 여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②우물가의 여인처럼 6명의 남자와 살았던 여인도 불러 주셨습니다.
③그 당시 개 취급을 받던 이방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고
④더러운 새리와 죄인들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대화를 하셨던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가지각색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
그 횟수를 보면 3번 7번이 아니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누구나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기쁨과 행복을 다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난 술 때문에 안돼
      난 담배 못 끊었는데
      난 아직도 도박을 하는데
      난 아직도 돈놀이를 하는데!
      난 아직도 성질이 못됐어
아니에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 것까지도 이 십자가 위에다 못 박으시고 대속의 죽음을 가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아멘.

어떤 종교에서는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은 무소유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속을 떠납니다. 떠날 때 이 세상 것은 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해서 머리털부터 온 몸의 털은 다 밀어 불태워 버리는 일을 합니다.
무엇을 가지려는 마음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다 버려야 진자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17년 동안 고 한자리에서만 앉아서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습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를 하는데 미숫가루로 대신하고 용변을 볼 때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데 일주일에 한번만 보고 소변은 앉은자리 그 자리에서 해결을 합니다.
17년간 한 번도 목욕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려야 할 때만 가린 천 조각뿐입니다.
그러니 그 냄새가 어떠하겠어요. 2m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뼈에다 가죽만 입힐 것 같은데 많이 나가봐야 20㎏정도이고 요렇게 밀면 그냥 온몸이 다 부서질 것 같습니다.

왜 그래요?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이 저희를 보면 카메라를 메고, 신발을 신고 모자를 쓰고 옷을 입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쯧쯧쯧쯧 저런 것까지 다 버려야 하는데 멍청한 사람들 같으니 미련한 중생이여!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정말 행복과 기쁨을 소유하는 것일까요?

분명하게 들으세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행복과 기쁨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가라막고 있는 그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 16:24에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또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항상 기뻐하라! 어디에서도 감옥소 안에서 손과 발이 다 착고에 묶여 있었지만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안에 있으니 그 누가 그 무엇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으리요. 이것이 진짜 진짜 행복을 찾은 사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개그 콘서트 아시죠?
"분위기 up되면 다시 돌아온다" 던 그분! 지금 어디에!
"정부는" 하면서 손을 들던 분 "가슴이 가슴이"하던 분은 가슴을 끌어안던 여인
지금 아무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그분이 있죠
"내 밑으로 다 조용해! 이 센스"하면서 이 센스하는 분의 인기와 기쁨도 언제까지 갈까요?
미국에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9시 언저리 뉴스는 왜 사라진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은 세계의 그 어떤 역사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진짜! 행복하려면 "버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는 부자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팔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였고
사도바울은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렸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후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럼 이건 또 무슨 뜻일까요?
왜 어느 때는 다 주라 하시고 또 이번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지 말라 내가 더 하여 주신다고 하였을까요?
기독교의 무소유 개념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린 그냥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진 것까지도 버리는 무소유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소유는 바로 나눔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어라!"
바로 나우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 건강의 복을 주십니까?
걷고, 뛰면서 복음을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왜 물질의 복을 주십니까?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는 입혀주기 이해서입니다
가지려고만 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동안 무엇을 나누면서 사셨습니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이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내 너를 위하여 피흘려 죽었다"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나누며 살아왔습니까?

오늘은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여기까지입니다.
무엇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지를 다음 시간에 계속 됩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To be continue
나누어주다가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더 큰 축복을 받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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