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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위하여 (롬 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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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본문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인간에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면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고 죽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들 보다 주님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 주님을 위해서 죽었다는 그 가치가 훨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돈, 자식

  요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철학이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도 돈, 죽어도 돈이라는 철학입니다. 모든 현대인들이 여기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청년이 도박을 해서 80억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박범으로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생 시절에 신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대학생 신화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는데 기발한 아이디어로 폭발적인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전국에 많은 체인점도 두고, 100억대의 돈을 벌었다고 해서 대학생 신화라 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이 도박범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호화주택에서 살고, 미모의 여성과 결혼도 했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면서 부를 만끽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탕진하고 감옥에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감옥에 있을까요? ‘아, 돈이 최고가 아니구나! 내가 살아도 돈, 죽어도 돈을 위해 살았는데 이 돈이 나를 이렇게 망치는구나!’ 하고 후회하며 감옥에 있을지 모릅니다.

  또 하나는 살아도 자식, 죽어도 자식이라는 철학입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절에는 밤을 새워 불공드리는 사람으로 꽉 차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원에도 금식하며 자녀의 수능시험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자식 수능시험을 위해서 금식하고, 자식 수능시험을 위해서 철야하고, 기도하는 것은 생각을 좀 해보아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부모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자식의 수능시험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 하고, 철야를 할 만큼 그렇게 그것이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저는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주무시면서 기도하십시오. 잡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살아도 자식, 죽어도 자식이라는 철학이기 때문에 마치 승부를 걸듯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자살률이 늘어 가는데 그중에 노인 자살률이 다른 계층보다도 훨씬 높아갑니다. 왜 노인들이 자살을 많이 할까요? 자살하는 노인 가운데 대부분이 자식들에게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한이 되어 비관하여 우울증에 빠지고, 자식에게 버림받은 한을 풀지 못하여 자살로 간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자식, 살아도 자식은 우리 사회 또 하나의 철학입니다.

  여러분, 돈은 좋은 것입니다. 자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최고는 아닙니다. 최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최고가치, 절대가치는 그리스도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산다면 거기에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면 그 속에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무서운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늦은 후회

  병중에 계시는 장로님은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한 평생 산 것을 돌아보니 나를 위해 살았지 주님을 위해 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후회를 하시는데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은 어느 성도는 재물을 잃고 하나님 앞에 밤을 새워 울면서 회개기도를 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런 때는 늦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 날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 재물을 잃고 후회하는 것은 늦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는 다니고, 교회는 섬긴다고 했는데 가진 걸 잃고 보니 주를 위해서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잃은 것이 후회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큰 죄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결과에 이르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건강할 때 주를 위해 사십시오. 여유 있을 때 주님을 위해 사십시오. 시간 있을 때 주님을 위해 사십시오. 끝에 가서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살고 싶어도 시간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8절에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본래부터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하나님은 만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숨 쉬는 공기도, 햇빛도, 마시는 물도,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의 모든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성경구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만물은 너희 것이지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를 위해 살아야 행복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가치가 있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복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만, 시기, 무지를 극복하자

  우리가 주를 위해 살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교만이 일어납니다. 주님과 관계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이 일어납니다. 주를 위해 살지 않으면 우리 안에 시기가 일어납니다. 시기는 우리의 본능적인 죄성입니다. 형제가 성공하면 누가 제일 시기합니까? 피를 같이 나눈 형제가 제일 시기합니다. 본능입니다. 내가 성공하면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시기합니다. 교만은 주를 위해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죄입니다. 시기는 단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지 아니하면 무지에 빠집니다.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행복한 것인 줄 알지만 무지에 빠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두 재벌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한 분은 300억을 장학금으로 기탁하여 천명에게 천만원씩 기증했다는 공로를 치하하여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상 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뜻이 너무 모범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베풀었습니다. 또 한 재벌은 회사 돈 300억을 횡령해서 구속을 대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300억인데, 똑같은 재벌인데 그들이 겪고 있는 300억에 대한 가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속이고 삽니다. 주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도 주님 앞에 완전한 기도를 하는데 그 실상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해 사는지 주를 위해 죽는지를 정확하게 평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입니다.

  33대 미국의 대통령 부시가 어떤 정치가인가 하는 측면에서는 제가 논평할 전문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에게 한 가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철저한 보수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그는 ‘테러는 하나님이 응징하라는 공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테러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40세까지 술과 마약과 방탕에 빠져 헤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 다녔던 교회이지만 그 사이에 교회를 등진 부시가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라. 회개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가치이다.” 예수를 위해서 살라는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들어와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무거운 짐을 다 벗고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부시는 백악관 안에서 성경공부 클럽을 운영할 만큼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그의 정치이념과 가치가 믿음 안에서 주어졌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가치는 이렇게도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라

  여러분, 하나님을 속이지 마시고 하나님을 거지 대하듯이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여러분들이 정직한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6절에 보면 “나를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니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의 감사 초점이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감사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그 중심이 위선이 되고, 거짓이 되면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이 받는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먹는 것도 감사하고, 안 먹는 것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는 원칙 안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새 성전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의 형식과 내용도 전부다 새롭게 변화하고 한 단계 성숙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친한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한 끼 먹어도 둘이 먹으면 만원을 들이지 않고는 안 됩니다. 손님 대접을 할 때 만원짜리 이하로 대접을 해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조금 격식 있게 대접하려면 이만원을 안 들이고는 손님대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십일조는 수입에 따라 드리기 때문에 그것은 논외이고, 감사헌금도 믿음의 분량대로 하므로 논외이지만 주일예배에 드리는 공예배 헌금은 다릅니다.

오늘 우리교회 공예배 헌금을 보면 만원짜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몇 장 골라내고 보면 만원짜리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천원헌금이 헌금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 당회원과 안수집사님의 숫자가 오십여명에 이릅니다. 최소한 그 숫자는 넘어가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안수집사이고, 누구를 위한 당회원입니까? 적어도 집사라면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의식주를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예배헌금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거지 취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버릇을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한 평생 가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도약해야 합니다. 이대로 안 됩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이 이 모습 이대로가 전부가 아닙니다. 정말 주를 위해 사는 삶을 보여야 합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예배 헌금은 십일조와 특별헌금과 다릅니다. 오늘 예배하는 나의 진심을 거기 담아서 드리는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사람 눈높이를 위해서는 오만원, 십만원을 예사로 사용하면서 예배드리면서 헌금하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뜻을 여러분들이 절대가치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놓치면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은 허점투성이가 됩니다.

  맺는 말

  주를 위해 산다, 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바보가 아닙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가치를 붙잡고 우리에게 말합니까?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거지 대우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심을 담아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을 놓친 사람들은 모두가 후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못된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과에 가서 후회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후회할 것 후회하고, 버릴 것 버리고,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종말에 가서 회개하면 늦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인생들은 끝에 가서 깨닫습니다. 미련한 일입니다. 믿음은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념이 아닙니다. 명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최고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자, 주를 위해 죽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신앙생활의 열매와 축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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