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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운 사람 (삼상 17:38-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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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이제 12월이 가까웠습니다. 달력이 한 장만 남는 그런 시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마음도 거의 마무리가 되는 그런 시기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새해를 준비하느라고 남은 시간을 소홀히 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은 한 달이 열 한달보다 소중할 수 있는 그런 성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다윗과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전쟁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개념을 많이 바꾸는 계기가 되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싸움인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부터 오늘 우리는 말씀으로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싸우는 싸움에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싸움의 주체도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별력이 분명했다는 이야기이고, 요즘으로 말하면 자기의 삶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사울왕의 극진한 분에 넘치는 호위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왕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왕이 쓰던 놋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우고, 왕이 입던 갑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입히는 그리고 왕이 사용하는 칼을 다윗에게 주는 광영을 입었습니다.

아마도 이 정도의 배려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은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영광이요, 그리고 후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이 사용하던 것을 다윗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안부를 묻기 위해서 다윗에게 이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블레셋이나 모압이나 암몬 같은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하나님께서 모압이나 암몬이나 블레셋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전쟁은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의 분위기는 언제나 사기가 충천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결론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들어왔던 다윗이 전쟁터에 처음 방문했을 때, 아주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는 땅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고, 엘라 골짜기 건너편 블레셋 진영의 한 장수가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사울의 군대를 능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블레셋과 하나님의 군대에 하나님의 대한 모욕과 이스라엘의 능멸의 이스라엘 진영이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분노가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었는가를 그는 지난 시간에 다윗의 분노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소문이 왕에게 들렸고, 왕은 다윗을 불렀습니다. 출전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들을 다윗에게 주는 엄청난 배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니까 모든 것들이 다윗에게는 익숙치 않았습니다. 왕의 갑옷도, 왕의 칼도 모두가 다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어버렸습니다.
신앙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익숙한 삶에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수능 시험을 앞둔 부모님들은 아마 짧은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난 다음에 그 기도가 계속 되어져 있나요? 여러분의 남편의 기업이 부도를 맞기 직전이라면 그것을 위해서 나와 기도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이 나고 나서 기도가 계속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서툴기만 합니다. 익숙치 못해요.

오늘도 새가족들을 예배편을 나누었는데, 예배는 곧 우리의 생활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배는 교회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드려져야 되고, 직장에서도 드려져야 되고, 어디서든지 드려질 수 있는 것이 예배여야 한다. 곧 우리의 삶이 예배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결론을 첨부했습니다. 우리의 인생 삶이 유치원에서 배운 것만 가지고도 사회생활의 엘리트 생활을 할 수 있듯이 지금 배운 신앙의 기초적인 것만 가지고도 여러분들 이 말씀, 이 가르침만 지켜도 훌륭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 꼭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어야만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서 살다온 여러분들은 굉장히 한국 생활이 힘이 듭니다. 우선 사회적인 질서에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혼란을 겪지요? 거리에 나가면 온통 어수선한 교통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하루종일 서 있어도, 하루종일 교통질서를 지키는 그 사회 속에서 살다가 와서 하루종일 봐도 거의 하루종일 교통질서를 안 지키는 사회 속에서 살려면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한 1년은 마음 고생이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결국은 포기하게 되지요. 사회 속에서 이 사회 방식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묻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신앙생활도 그럴 거예요. 의롭고 정의롭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고 애를 쓰지만, 결국 다수의 분위기가 세속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런 분위기 속에 그저 나만 유별나게 그럴 것 있냐? 그런 열정과 순결들이 그냥 묻혀져 버립니다.
하지만 다윗은 조금 달랐습니다. 평소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훈련되어져 있었는지, 오히려 왕의 갑옷과 왕의 칼을 가지는 것보다 평소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 훨씬더 유익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평소의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손에 주머니를 가지고, 손에 물매를 가졌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한 손에는 막대기, 한 손에는 물매, 두 줄로 되고, 끝에는 돌을 얹혀 놓을 만한 그런 넙적한 헝겊이 있는 거지요. 거기에 돌을 돌려놓고, 한 줄은 고정시키고, 한 줄을 놓고서 돌리다가 놓으면 돌아 날아가면서 적어도 100m정도는 날아가겠지요? 우리도 어렸을 때 그와 비슷한 놀이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춤에는 제구, 곧 주머니가 있는데, 다윗은 거기에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집어 넣었다고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대표로 선택된 누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다윗 스스로 거룩한 분노에 의해서 그것이 왕에게까지 전달되고, 왕의 인정을 받고, 출전한 다윗과 그리고 블레셋 진영의 골리앗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던 이스라엘 진영에서 누군가 하나가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주목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누구일까? 점점 가까이 오면서 보니까 골리앗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너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느냐? 자기가 섬기는 다곤신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였노라.

장수가 나와도 자기는 상대하기가 떡 먹을 듯 같을 텐데, 이것은 젊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업신여긴 이유가 4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았을 때 아직 군입대에도 어울리지 않는 젊은 동안이 그것도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나온 것이 아니라 물매와 막대기를 들고 나온 것을 보면서 그는 너무나도 어이없어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그를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젊다고 업신여길 수 있어요. 이 젊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마음 속에도 이 젊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편견들이 있습니다. 이 사회는 엄청나게 젊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이 사회 대부분의 이사, 대부분의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삼십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강남의 은행 지점장들도 30대 여성들이 지점장을 하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파격적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아요. 보편적인 것입니다.

웬만한 회사가 이제는 팀으로 돌아가는데, 그 팀장들이 다 30대들입니다. 이 사회의 주도권을 30대들이 가지고 있어요. 그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갑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도 한 때는 꽤 젊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정말 잠깐 사이에 죄송한 표현이지만, 굉장히 늙어버린 교회가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 교회를 둘러보십시오. 여섯분의 장로님들이 계신데, 제일 젊은 장로님이 50대입니다. 우리 감리교 법에는 삼십세부터 장로가 될 수 있어요. 무려 15년이라는 엄청난 간격을 우리는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저의 부족함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의 무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새해에는 몇 분의 장로님들을 추천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분 어떻습니까? 아휴, 그 양반 너무 젊지 않아요? 사십대 초반, 중반의 사람들을 이야기 해도 너무 젊다는 거예요.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각이 많이 늙어있어요. 이 몸은 늙으면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생각까지 늙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사회는 삼십대가 주도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자꾸 늙어간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권사는 삼십세 이상이면 가능합니다. 사십대 초에 권사를 세워도 아이고, 목사님 새파란 사람을 세워요? 사십대가 새파라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 사회는 삼십대가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이 사회의 이 세상의 상징적인 블레셋의 골리앗의 입술을 통해서 선포되는 이 업신여김, 다윗이 젊다고 하는 것 때문에 지금 업신여김을 받고 있지만, 그가 정말 업신여김을 받아야 할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인 경력과 배경을 가진 그 멋진 갑옷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골리앗 앞에 아무도 나서고 있지 않은 경력과 경륜만 가지고 폼 잡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 지금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고 있는 다윗은 왜 젊기 때문에 지적을 받아야 되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의 생각이 젊어지기를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생각도 젊어지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제가 좀 생각이 젊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젊을 때는 그 젊음이 그대로 표현이 되었는데, 내가 조금 늙으니까 제 생각도 좀 노쇠하지 않았나 그런 반성을 이번에 많이 해보았습니다.
두 번째 그를 업신여긴 이유는 붉고 용모가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왔고, 양 치는 목동, 여덟째 아들 막내로써 얼굴에 요즘 같으면 스킨, 로션이나 발랐겠습니까? 자기 얼굴 관리, 몸매 관리 했겠습니까? 그럴 입장도 아니고, 그럴 환경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보는 사무엘도 놀랬고, 그를 보는 골리앗도 놀랐습니다. 그의 용모가 붉고 그 용모가 아름다우니라. 어디에서 나온 아름다움일까요? 사무엘 하나님이 종도 다윗을 보면서 깜짝 놀랬습니다. 한 눈에 마음에 사로잡혔어요.
요즘은 시대가 여성화 되는 것 같습니다. 남성들도 여성처럼 예쁘고, 손가락을 봐도 길죽길죽하고 매끄럽고, 매니큐어만 칠하면 여자손 같은 그런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걱정이 되기는 되요. 모든 것이 여성화 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나와서 활동하는 젊은이들 보면 다 얼굴도 여자 같아요. 그런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다윗의 용모의 이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사무엘 주의 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다윗의 용모, 비록 적장이지만 골리앗의 눈에 비췄던 이 다윗의 아름다움, 우리가 세상 속에 나아가도, 우리가 때때로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고, 우리가 환경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서 우리의 육체적인 몸을 관리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우리에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지금 다윗은 골리앗에 대해서 새로운 선포를 하면서 골리앗의 개념에 대한 정정까지 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서 뭐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 ‘사울의 군대들아, 나와서 한 번 싸워보자.’ 이스라엘 군대를 사울의 군대라고 폄하했습니다. 한 인간에게 속해 있는 군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잘못된 골리앗의 생각을 바꾸어주었습니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군대다. 나는 하나님의 군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가노라.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너와 너의 군사들을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밥이 되게 하리라. 골리앗도 그랬는데, 다윗도 그래요.
그 때 당시 아마 전쟁의 유행어 같아요. 일본사람들의 최고의 유행어가 욘사마가 1위라고 그러지요? 그 당시의 최고 유행어가 아마 그것인가 봐요. 하늘의 새, 땅의 짐승에 밥이 되게 하리라. 아마 이게 장수들이 나와서 말싸움하는, 기싸움하는 유행어인가 봐요. 다윗도 그랬고, 골리앗도 그랬어요.

중요한 것은 지금 다윗의 고백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내 손에 너를 붙이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그리고 47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나님께서 이 싸움의 실질적인 주관자요, 하나님께서 이 싸움의 당사자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을 위해서 길을 비켜 주어야 했고, 골리앗도 길을 비켜주어야 했습니다. 사실상 사울왕도 자기 이름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승리했을 때, 백성들은 말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영광을 다윗에게 돌렸을 때, 사울은 거기서 시기와 미움이 생겼습니다. 자기에게 영광과 존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그는 다윗을 미워하는 이유로 삼았습니다. 골리앗, 그 역시 그의 칼과 단창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자기의 힘을 근거로 살아가는 인생의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골리앗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입에서도 돌아서서 ‘그래도 돈이 최고지. 그래도 빽이 있어야지. 그래도 연줄이 있어야지.’ 이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실망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칼이지. 그래도 단창이지. 그래도 갑옷이지.’ 그러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설교를 듣는 여러분 속에서도 ‘그래도 칼이야. 그래도 갑옷이 있어야지.’ 그러시지는 않겠습니까?
48-9절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 대하면서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취하고, 물매를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생각을 해 보세요. 그렇게 2m가 넘는 키에 온통 그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얼마나 큰지 그 창이 베틀채 같다고 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방패를 든 군사가 따로 하나 있을 정도로 완전 무장을 한 사람입니다.

그의 몸에서 얼굴 잠깐 그 눈 주위의 얼굴과 손 끝 외에는 아마 피부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돌 하나 던져서 그 눈가에만 보이는 그 이마에 맞춘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50절에 있습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이 사무엘상 기자가 우리의 이 말씀을 여기에 쓴 줄 아십니까? 이 저자의 의도가 골리앗을 쓰러뜨렸으나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더라. 세상 사람은 칼만 있으면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이 전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업도 전쟁이고, 공부도 전쟁이예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전쟁입니다.

기업하는 분들, 그 분들에게 있어서 칼은 무엇입니까? 돈이지요? 돈줄, 돈만 있으면 내가 일어서는 건데... 사회생활 하시는 분들의 칼은 무엇입니까? 연줄이지요? 이번에 내가 국회의원 누군줄 알았으면, 이번에 국세청 누군줄 알았으면, 세무조사를 피할 수 있었을텐데....저한테 연락이 와요. 혹시 목사님 교회에 세무서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경찰서 다니는 사람 없습니까? 왜요? 이렇게 저렇게 세상 연줄로 한 번 해 보려고요.

사람들은 아직도 손에 칼, 이 칼만 있으면 되는데, 그리고 그 칼을 찾아서 헤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의 최고의 권세의 상징인 왕이 자기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 주는 칼도 사양했습니다. 여러분,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왕이 주는 칼도, 왕이 주는 연줄과 배경도 사양해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연줄 연줄을 찾아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국회의원, 무슨 장군, 뭐, 이런 분이 다니는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인대요. 왜? 어떻게 사귀어서 좀 도움을 받아 보려고, 우리는 자존심을 회복해야 될 것 같아요. 왕이 주는 칼도, 나 이거 익숙하지 않습니다. 난 기도와 말씀이 익숙하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오히려 사양할 수 있어야 되지 않아요?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노라.

자기 손에 칼이 없었다는 고백을 통해서 골리앗을 죽인 것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 자기 힘을 근거로 살아가는 인생의 유형이라고 그랬습니다. 사울 역시 자기의 이름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왔어요? 사울,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골리앗,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죽인 것 아닙니다. 다윗이 물매질 잘 해서 골리앗 죽인 것 아닙니다. 이 싸움은 처음에 전제한 것처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죽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운 사람인 줄 믿습니다. 다윗의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싸움에 하나님의 전쟁에 다윗을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세계에 하나님의 역사에 제가 쓰임받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분노하고, 그 현실을 믿음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고백을 가지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전쟁에 쓰임 받기를 사모했고,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자신의 손에 칼을 가지는 것보다,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칼을 쥐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인생의 칼을 놓지 못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많은 시간과 정욕을 소비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 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왕이 주신 칼까지도 익숙치 아니함으로 사양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며 하나님의 전쟁에 귀하게 쓰임 받은 승리의 도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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