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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들 (시 1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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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성홍모  목사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감사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저 자신과 저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성목사에게는 감사할 조건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생애를 보람있고, 아름답게 사용하시는 것으로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부족한 사람을 목사로 삼으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였습니다.  저의 환경에 감사하면서 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사는 아내, 시집간 딸들, 형님이 모시고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시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형제들 모두가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였습니다. 

  저의 주변에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데,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좋은 인품과 열심과 열정을 가진 부목사님들, 그리고 배움에 열심을 내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부서 전도사님들, 그리고 비전과 열심을 가지고 저를 도와주는 여러 장로님, 권사님들 감사한 조건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함께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일년을 되돌아봅니다.  작년 말에서부터 준비한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캠페인에 우리 교인 절반 정도가 소그룹에 참여하면서 아주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새롭게 봉사할 자리를 찾으신 분들이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일년을 지나오면서 감사한 것은 제가 목회하는 중에 장례식이 제일 적었습니다.  금년에 돌아가신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몇 분의 집사님의 시댁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시골 형님 댁에 사시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어도 우리 교회를 출석하시는 어르신들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는 전도도 안 되는데, 20여명이 하늘나라에 가셔서 교인이 줄어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올해 같이 여러 사역들이 바쁘게 돌아가는데, 돌아가신 분이라도 많았다고 하면 목회하는데 퍽 힘들었을 것입니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적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제자훈련과 전도 훈련으로 아주 달라졌습니다.  체질이 바뀌고 직분자들이 봉사와 섬김으로 이어지고, 자기의 할 일을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전보다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신앙서적을 읽고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접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사역자 훈련을 마치면서 소그룹으로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전도하고 한 생명을 양육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그룹이라는 적은 공동체 운동이 자리잡을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힘들게 사역훈련까지 따라오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가을에 가진 새생명 축제도 하나님의 은혜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새신자들이 등록한 해로 기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년을 지나오면서 교회가 성장되고, 예산에 부족이 없고, 우리 교우들이 최선을 다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여러 교우님들에게 감사 드리고, 우리 동역자들에게 감사 드리고, 여러 장로님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내년 목회정책을 수립하는 연말 정책당회를 가장 은혜스럽게 개최하고 많은 비전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목회자인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저에게 건강을 주시고, 한번도 아파서 누워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진심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혹 아픔을 주셨어도 감사한 일이지만, 건강을 주신 것은 더욱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만의 감사한 제목을 찾아야 진정 감사한 날로 보낼 수 있습니
다.  오늘 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의 제목을 찾는 시간인데도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감사의 조건보다는 원망의 조건이 많다고 느껴지는 분들이 있습니까?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야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에 있어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은 감사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기독교처럼 감사를 본질로 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이 힘과 노력으로 구원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였는데 감사는 무슨 감사입니까?  그들은 아직도 구원 얻지 못하였으니 감사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그냥 감사입니다.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감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 중에 아주 활기차게 부를 수 있는 2/4박자의 찬송이 있다면 489장입니다.  우리가 회중 찬송으로 부른 489장은 이런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이 찬송은 1897 존슨 오토맨 목사님의 시에 곡을 붙어 찬송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찬송은 영국과 미국에서 한 때 널리 불려진 찬송입니다.  "런던에서 남자들이 이 찬송을 불렀고, 소년들은 휘파람으로 불렀으며, 여인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아기를 흔들어주면서 재우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만났습니까?  그 시련이 너무 커서 낙심되어 절망에 빠진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받은 복을 세어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시련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감사는 불만을 잠재우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해집니다.  반대로 불평한 만큼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오토맨 목사님의 찬송시가 우리 찬송가에 3곡이 실려있습니다.  97장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리고 543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이 543장은 정말 우리들이 은혜스럽게 부르는 찬송입니다.  오토맨 목사님은 언제나 감사하였고, 주님만을 진정한 친구로 알았고,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489장의 찬송의 원 제목은 "Blessings"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신의 가호를 빌고, 은총을 비는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복과 감사는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받은 복과 감사의 행위가 별개로 떨어져 있으면 진정한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축복과 감사는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떨어지면 진정한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축복과 감사는 떨어지지 말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로 마감할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부요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어느 날 예배당에 들어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시무하시는 목사님이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그 소년을 보면서 어떤 소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소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기도를 마치는 것을 보면서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야, 너 기도하러 자주 왔니?"  "예, 저는 지난 5일 동안 매일같이 기도하러 왔습니다.", "너의 가족 중에 누가 전쟁에 나간 분이 있느냐?" "예, 저의 아빠가 전쟁에 나가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빠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도하러온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소년은 간구와 감사를 연결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로 연결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받은 축복에 감사의 고리를 걸어야 그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축복과 감사의 고리를 든든하게 걸어야 합니다.  느슨하게 연결하고 있다가 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이 혼자 따로 있고, 감사는 감사대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받은 축복과 감사가 함께 있어야 진정한 축복이요,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똑같은 시대에, 거의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도 어떤 사람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성취욕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이요, 자기 성취욕구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불만인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힘쓰고, 내가 땀흘려서 벌어먹고 사는데, 무엇을 감사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똑같이 노력하고, 힘쓰고, 땀흘렸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신8:17-18절에 보면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것이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꼭 같은 여건과 환경인데도 은혜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지만,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그의 욕망이 그를 지배하고 눈이 가려서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잠30:15에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머리는 달라, 달라, 다고다고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고 했습니다.  배부르면서도 배부른 줄 모르고, 만족하면서도 만족을 모르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제는 만족하게 지내고 감사하여야 할 터인데, 거머리 같이 지금도 달라, 달라고 조르고 보채기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직도 어린 아이의 신앙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에 받을 자격 없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은사,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에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 결정적인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독생자를 이 세상에 허락하여 주신 은혜입니다.  신약에서 은혜를 강조하고 은혜를 말씀하고 있는 이는 사도바울입니다.  신약에서 은혜라는 말이 152회가 사용되었는데, 바울 서신에서만 101회가 사용되었고, 나머지 다른 성경에서 51회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도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요, 은혜를 은혜로 알고 있었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개혁교회 신학을 물려받은 교회입니다.  칼빈은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그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강조하신 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구제불능의 타락한 죄인이어서 자력으로는 도무지 구원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예정하신 주권에 있었습니다.  내 공로가 없는데, 하나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그가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이런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 가운데 죄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의로움이란 하나도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무지와 죄악을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은총론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15:10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이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이요, 무슨 자격이 있어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보니, 이것은 보답한다고 하였지만, 저 것이 빠졌고, 물질로 보답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빠졌고, 마음을 다 드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 보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모두다 보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보답하면서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여기 시편의 저자는 몇 가지 방법으로 감사하려고 합니다. 

1.  구원의 잔을 들어 감사해야 합니다. 

  13절의 말씀에 "구원의 잔을 들고"라고 했습니다.  "잔을 든다"는 말은 성경에 여러 용도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구원의 잔이란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곳 본문의 구원의 잔이란 바로 구원의 은총을 감격하여 드는 축복의 잔을 말합니다.  구원의 잔이란 우리 영혼에 부어주는 축복의 잔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잔을 들 수 있도록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죄의 결박을 풀어주셨습니다. 감사의 제사, 화목제를 드릴 때에 제물을 태워드리는 화제와 함께 드렸던 전제의 잔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제를 드리고 함께 나누는 식사 때에 드는 포도주 잔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죄악을 보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라는 말은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7절 말씀에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감사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3.  서원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 시인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려고 했습니다.  서원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서원이란 아주 중요한 덕목이기에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되며, 한번 서원하였으면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 귀한 신앙입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서 이것을 해주시면 저는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말합니다.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 것은 완수한다.  보답한다, 끝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서약하기 전과 서양한 후가 달라지기 쉽습니다.  서원하기 전에는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루어주시면 반드시 약속하고 헌신한다고 서원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이번 서원은 일시적인 흥분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서원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약속을 지키려는 것으로 인하여 풍성한 은혜에 거하는 법입니다.  결혼서약이란 것이 있었기에 그래도 우리 가정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약속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는 서원으로 즉 헌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임하여 부임 심방을 하는데 어느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벽에 보니까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상장을 가득 걸어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네요"  "예, 우리 아이는 머리가 비상합니다"  목사님이 또 집사님 얼굴을 쳐다 보면서 "집사님은 참 미인이십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예, 저의 친정어머니가 예뻐서 저도 예뻐요"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또 "가구가 참 좋네요. 텔레비젼도 오디오도 아주 좋은 것 갖고 계시네요" 하니까 그 집사님이 "예, 저의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괜찮은 가구를 들였어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건드려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지요"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좋은 머리가 무슨 소용 있으며, 예쁜 얼굴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그 날로 무너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한번 고백해보아야 합니다.  따라 해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하는 자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평할 일만 생깁니다.  여러분들의 신앙과 생활을 한번 점검하여 보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현하면 자꾸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면 자꾸 불평할 일들만 생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우리들의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항상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오늘로 그치지 말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감사로 받은 은총을 계속하여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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