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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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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어떤 미국 잡지에 실린 유머 중에, 어느 교회의 집사가 혼자 기도하면서 “주여, 돈 10불이 제 지갑 속에서는 그렇게 작게 보이는데 어찌하여 헌금접시 속에서는 그렇게 크게 보이나이까?”라고 탄식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불 즉 1만원 돈은 미국 교인들에게도 자기가 쓰려면 정말 별 것 아닌 액수인데 막상 헌금으로 바치려 하면 그렇게 하기 어려운 많은 액수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농담인지는 몰라도 그저 농담으로 듣고 흘려버리기에는 조금 아깝다고 여겨질 정도로, 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상당히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고 있는 말입니다. 헌금생활이라는 것이 일부 교인에게는 그렇게 부담스럽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처럼 세속 잡지에 실리는 농담의 재료가 될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여러 가지 신앙생활 중에서 다른 것들은 다 은혜로운 것인데 유독 헌금만 부담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생활이나 기도생활이나 성도의 교제나 봉사 등과 꼭 마찬가지로, 헌금생활 역시 신자에게는 은혜 받는 수단 중의 하나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성경책에다 다른 교훈들과 마찬가지로 헌금에 관한 말씀들을 많이 기록해 두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의 본문으로 삼고자 하는 말라기서의 말씀은, 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강하게 명령하시고 간절하게 권고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11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이제 2004회계년도를 마감하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우리로 하여금 물질로 이 교회를 섬기며 우리의 헌금이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사업에 귀히 사용되게 된 것을 함께 감사드리면서, 이 시간에 주신 말씀을 따라 우리의 헌금생활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재정비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더욱 풍성하고 더욱 온전한 헌금생활을 하는 한 해로 삼고자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기독신자들에게 어떻게 헌금생활하라고 명하셨습니까?

1. 우리는 십일조와 헌물이 원래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당연한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헌금생활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오판은 원래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헌물을 마치 자기의 것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생각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야말로 따끔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바로 본문 8절과 9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기록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십일조」가 무엇인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헌물」이란 그 십일조 외에 또 따로 드렸던 서원제, 낙헌제, 거제물 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들은 주로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한 식물(食物)로, 또한 성전 관리를 위한 상비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리켜 바로 「하나님의 것, 나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만 듣고 있지만, 사실은 그밖에 다른 헌금 역시 원래는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못 박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헌금을 두고 ‘자기 자신의 것’ 중에서 일부를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세상의 무슨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경우 따위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신자가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은 ‘내 것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나누어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을 바치는 행위, 즉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돌려드리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헌금생활이란 ‘전부 내 것인데 그 중 얼마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십분지 구는 내 것이고 십분지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그것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전부가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그 중에 특별히 정하신 십일조와 헌물을 당연히 바치는 행위가 곧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이 될 뿐인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 것처럼 여기고 제멋대로 쓰는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겠습니까? 자기 것 아닌 공금을 개인 용도로 쓰고 자기 것 아닌 물건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도 꼭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8절과 9절 이 단 두 절 속에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자기 것처럼 여기는 행위를 가리켜 「도적질」이라고,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도둑질 잘해서 소위 ‘대도(大盜)’라고 불리고 유명해진 사람도 있지만, 감히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간 큰 도둑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간이 큰지 그런 도둑질을 해 놓고도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시치미 뚝 떼는 모습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만 일단 알고 나면 헌금생활이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봉급을 받을 때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먼저 공제 당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공제당할 세금까지 포함된 전체 봉급 액수를 가지고 한 달 가계부 예산을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금은 안 떼는 줄로 알고 그렇게 생활비를 잡아 놓았는데 어떻게 날 보고 세금을 내라고 합니까?”하고 세무서에 항의하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 전역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고, 끝까지 세금 내지 않으면 나라의 돈을 훔쳐 먹은 죄로 쇠고랑을 차게 될 것입니다. 세금은 이미 본인의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마치 내 돈인 것처럼 계산했다가는 당연히 생활비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그런 것을 마치 내 돈처럼 마음대로 썼다가는 누가 보아도 저주를 받아 당연한 도둑이 될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헌금생활, 특별히 십일조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까지 다 포함해서 생활비를 미리 짜 두었으니, 나중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의 돈, 아니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내 것인 양 미리 잡아 두고 있으니 정말 바보의 계산이 되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철면피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 줄로 알고, 어렵게 기부하는 자세가 아니라 당연히 바쳐야 할 것을 바치는 자세로 신실한 헌금생활의 의무를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헌금 중에 가장 작은 것인 줄을 알고 기본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두 번째 착각은, ‘십일조는 실천하기 제일 어려운 큰 헌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십일조야말로 헌금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할 만큼 기본적인 헌금에 불과합니다. 본문 10절 상반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선 「온전한」이란 수식어를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헌금들과는 달리 유독 십일조에만 이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이 「온전한 십일조」란, ‘속임이 없는 정확한 십분지 일의 헌금’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기 수입의 십분지 일의 액수가 얼마가 되는지를 수판이나 계산기가 없다고 계산 못해낼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십분지 일을 다 내는지 아닌지는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악한 본성은 여기에서도 또 한 번 발휘되어서, 그 액수를 적당히 속이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중 그래도 십일조 생활한다는 사람 가운데서 번번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이야 쉽게 속일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야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지극히 얕은 수를 환히 내려다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지라,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또 한 번 우리 양심의 정곡을 찌르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십일조 봉투에 담아 바쳐도 그것이 온전하지 않을 때에는 이미 십일조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십일조를 바치는 유일한 방법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방법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뒤에 이어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히는 말씀입니다. 그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창고」란 개인 집의 창고가 아니라 바로 성전의 창고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심령을 뭉클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까? “너희들이 십일조만 바치면 나의 집에 필요한 물질이 풍성하게 넘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바쳐야 나의 집에 꼭 있어야 할 양식이 채워지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양식’이란 사람에게 필요한 것 중에 정말 가장 기본이며 가장 최소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치 품목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재산 목록이나 투자의 자본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세상없어도 꼭 있어야 할 제일 작은 것이 바로 양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최소한 십일조 생활은 해야 당신의 성전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유지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 밥 차려서 먹여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삼 세끼 봉양하는 것이 무슨 특별히 칭찬받을 만한 수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로 무슨 ‘장한 어머니 상’이나 ‘효자상’ 따위를 받게 될 리는 만무합니다. 하지만 자식에게나 부모에게 양식조차 제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온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더 좋은 옷은 못해 입히고 더 좋은 집에 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양식만큼은 세상없어도 제공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요 상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집에 그와 같은 기본 양식이 있게 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는 교회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정말이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헌금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교인들이 십일조 생활만 하면 비록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경상비 유지는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례 교인 15명이 모이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할 수 있게 한 것도, 그 15명이 십일조 생활만 하면 그것만 가지고도 교회는 자립 운영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헌금은 혹 못할지라도 십일조만큼은 정말 해야만 하는 것은, 이처럼 그 십일조를 드려야 만이 하나님의 집이 최소한 삼 세끼를 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자의 헌금생활이 성숙하여 최고 수준에 올랐을 때 할 수 있게 되는 ‘큰 헌금’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큰 헌금, 즉 절기헌금이나 건축헌금, 혹은 특별선교헌금 등을 하기에 앞서서,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고 실천해야 할 지극히 ‘작은 헌금’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십일조를 어려운 헌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 꼭 있어야 할 양식을 채우는 이 기본적인 헌금생활을 꼭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헌금생활을 통하여 참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쁘게 바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큰 오산은 ‘헌금하면 그만큼 가난해진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깨끗하게 없애버려야 할 착각의 선입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헌금생활을 하는 자에게 정말 큰 축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 하반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 헛되다. 하나님 명령을 지키고 그 앞에서 슬퍼하며 회개해 보았자 아무 유익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잘 믿는다 해 봤자 말짱 헛일이고 아무 득 될 것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한술 더 떠서, ‘오히려 하나님 안 믿고 교만한 사람, 제 멋대로 악을 행하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있나 없나 하고 의심하는 사람, 이런 불신자들이 얼마든지 복 받고 오히려 운수대통하더라.’고 덧붙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와 헌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안 지키고 사는 불신자들이 우리보다 더 잘만 살고 있는데…’라는 불평인 것입니다.

입 있다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어떻게 들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리를 가리켜 실로 ‘완악하기 짝이 없는 말’이며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건방진 말이라고 진노하셨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잘 섬기는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시는 분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사람이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도 물질 문제에 가서는 그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처럼 하나님을 치사한 존재처럼 함부로 격하시키는 말을 겁도 없이 함부로 내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헌금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짜로 축복하시기 위하여 헌금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축복은 「황충」을 막아 주시는 축복, 즉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생활에 닥칠 수 있는 큰 재난으로부터 미리 보호해 주시는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그 축복은 「땅이 아름다와지는」 축복, 즉 우리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일이 더욱 번성하게 되는 축복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축복은 「열방이 너를 복되다 하는」 축복, 즉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부러워할만한 풍성한 물질생활로 이어지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어떤 과정으로든지, 당신께 온전히 바치는 자는 그에 따른 축복들을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확고하게 단언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감히 ‘시험’하려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서 어디 한번 나를 테스트해 보아라.’고까지 표현하시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재삼 보장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십일조 내면 나는 못 산다.’라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습니까? ‘세금 내는 바람에 내가 가난하게 되었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세금을 내게 된다면 그만큼 번 돈이 있다는 것은 뻔한 사실인데, 어찌 그처럼 돈 벌 수 있는 사회를 보장해 준 국가의 공로는 완전히 망각하고 그런 낯 두꺼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십일조 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면, 그만큼 벌써 받아 놓은 물질의 축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직장을 잃지 않게 해 주시고 사업을 유지하게 해 주신 축복이 없었더라면, 아예 십일조를 드릴 수입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헌금생활은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우리의 물질생활에서 축복이 계속 이어지고 더욱 풍성해지도록 약속이 보장된 일인 줄 기억하고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서두에 해당되는 7절 말씀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라고 기록된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라는 이스라엘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바로 8절 이하에 이어진 십일조와 헌물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생활과 마찬가지로 헌금생활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돌아오시는’ 이 은혜로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방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는 이 고귀한 일에 왜 헌금이 문제가 되나?’라고, 헌금생활을 무슨 말하기 부끄러운 일처럼 여기는 못난 꼴을 제발 벗어버려야 합니다. 자기 연인에게 주려고 비싼 선물을 사는 일이 저질적인 일입니까? 부모와 자식을 위해 여러분이 어렵게 번 돈을 사용하는 일이 낯 부끄러운, 언급하기 어색한 일입니까? 오히려 그처럼 기쁜 마음으로 돈을 쓰는 일을 통해서 그런 관계가 더욱 뜨거워지고 긴밀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 역시 우리의 헌금생활이 올바로 정립될 때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것 중에서 아깝게 떼어 주는 일이 결코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하나님께 도로 바치는 것이 헌금입니다. 무슨 대단히 큰 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집에 양식 정도를 채우는, 가장 작고도 기본적인 헌금이 곧 십일조입니다. 헌금하면 못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지독한 착각에 불과하며, 오히려 헌금생활이야말로 우리의 막힌 물질 축복의 문을 여는 길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신자의 물질생활에 대한 모든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며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바르고 온전하고도 기쁜 헌금생활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며 교회의 창고를 채우고 또한 개인적으로 더욱 풍성한 물질의 축복까지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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