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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황의 영광 (골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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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창인 목사
 
골로새서 1장 1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화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들에게는 영광인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구원을 구원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구원을 영광이라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죽는 한이 있어도 구원은 받아야 하며, 구원이 귀함을 압니다. 구원 못지 않게 우리들이 영광으로 여겨야 될 부분을 성화라고 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구원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다음부터는 성화, 즉 날로 날로 새로워져야 되고 거룩해져야 되며 경건해져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우리가 점점 자라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똑같은 생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그 사람에게는 성화의 영광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성화의 생활이 이루어질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은 영광 위에 성화의 영광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I. 믿음의 성화(1-2절)

성화라고 하는 것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성장이 되며, 날로 날로 변화되고 거룩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성화되어 진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온 전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잡탕처럼 섞인 것이 많습니다. 세상 것을 바라게 되고 하나님을 귀신처럼 믿게 됩니다. 여러분 귀신에게 어떻게 합니까? 말라빠진 북어 하나 갖다 놓고 빌어대며 이 말라빠진 북어 하나 대신에 천하에 있는 복이라는 복은 몽땅 다 갖다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귀신 섬기는 사람이 귀신에게 나를 통해 당신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죽도록 목숨 받쳐 충성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금을 만원 했으면 복은 백만원어치 달라는 식입니다. 꼭 귀신 믿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미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신앙에서 믿음이 점점 새로워지고 변화되어서 영적인 신앙으로 성장이 되고 성숙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도 성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 . 초점 맞는 믿음( 1절)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그 사진 잘 찍었다. " 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진을 볼 줄 알고, 또 잘 찍은 사진은 사진 속의 인물이 살아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초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초점이 잘 맞은 사진이 잘 찍은 사진입니다.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초점이 잘 맞아야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의 사도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믿음과 생활의 초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경험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1장 14절을 보면 "내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만 믿었는데 하나님만 믿는 교회를 유대교라고 합니다. 유대교를 믿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유대교 아닌 기독교 운동이 일어날 때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즉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었던 바울이 잘못된 것은 초점을 유대교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장로교인 입니다만 우리가 비록 장로교인일지라도 장로교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교가 구원하지 못합니다. 내가 장로교를 믿어버리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는 것처럼 감리교나 성결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큰일납니다. 장로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장로교인도 하나님. 감리교인도 하나님, 성결교인도 하나님, 오직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추어야 비로소 그 믿음이 점점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2. 예수 안의 믿음(2절)

2절 상반절에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깊은 신앙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고 유대교에서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때는 예수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 밖에서 믿음 생활을 할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온갖 핍박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핍박에 앞장섰고 예수 믿는 신도들을 붙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고, 못된 짓과 몹쓸 짓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바울은 흩어진 신도들을 향하여 갈 때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도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께 무릎을 꿇고 항복할 뿐 아니라 비로소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놓고 보니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예수 밖에서 믿을 때와 예수 안에 들어와서 믿을 때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위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 헤매고 교회를 비난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는 다니지만 충성은 안하고 이 교회. 저 교회로 전전하는 교인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깊이 들어와서 봉사하자니 힘이 들고 경제적인 부담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믿고 편하게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는 나오지만 실상은 예수의 몸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회를 향하여 비판만 일삼으면서 정작 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쉽게 살았습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다 겪으셨는데 그 예수를 따라가고 믿겠다면서 어떻게 쉽고 편하게만 믿으려고 합니까?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 또는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야 합니다. 바을 사도가 예수 밖에서 헤맬 적에 자기는 잘한 것만 같았고 아주 지혜있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들어와 보니 너무 잘못했더라는 것 아닙니까. 들어오십시오. 예수 안의 믿음으로만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3. 은혜 받은 믿음(2절 하반절)

2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표현할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로 표현하여 자기의 뜻을 전달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찬양과 시로 나타내기도 하셨고 본문에는 편지를 통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편지라는 방법으로 우리의 뜻을 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편지라고 하는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전해주기 때문에 "문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문안의 말이 나온 것인데 이 것이 문안하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빌린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라고 하는 말은 헬라 사람들이 인사할 때 쓰는 말이요. 평강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 사람들이 인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편지 쓸 때는 평강과 은혜가 있을지어다 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편지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순서를 뒤집어 놓으면 안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축복을 받으면 은혜가 따라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믿음이 되어야 됩니다. 은혜를 먼저 받으면 평강도 오고 믿음이 잘되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 자체가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돈주고 받았습니까? 우리는 모두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자체가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도. 구원도 공짜로 받은 선물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도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받고 나면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이 기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오늘 1시간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충만해지지 않습니까? 예배하는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배당에 들어올 때에는 짜증도 나고, 괴롭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불평스럽기도 하였으나 예배를 통해서 은혜로 받으면 근심도, 불평도, 괴로움도 전부 사라져 버리고 기쁨이 충만해지므로 변화가 되고. 나갈 때의 사람과 들어올 때의 사람과는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의 믿음이 자꾸 성화되어 잡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따라 온다는 뜻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되고, 은혜를 받으면 온갖 축복이 따라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은 믿음은 복된 것입니다. 즉 은혜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날로 새로워지고 믿음이 성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 생활의 성화(3-5절)

1. 기도로 성화(3절 상반절)

3절 상반절을 봅시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본문에 있는 대로 기도 할 때마다를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 생활이 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만 생활이 성화가 됩니까? 우리 신자들 중에는 1년 동안 예수 믿으면서 기도를 한 시간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작년이나 금년이나 변화 없이 그저 그대로이고 10년 지나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기도 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 그런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이 다윗 임금에 대해서 한 절로 그의 생애를 요약해 놓은 말씀이 있는데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15: 5)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실수했다면 우리아의 사건 하나만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실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임금이었을 때 유대 나라와 암몬 자손과의 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지역은 더운 지방인지라 낮잠을 자고 오후 서늘할 때 일어나 왕궁 누각에서 내려다보니 옆집 담 너머에서 아주 젊은 여자가 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려다가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 후에 소식이 오는데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임신했으니 그 여인은 매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여자를 살리려고 잔꾀를 부립니다. 남편인 장군을 불러다가 그 동안에 수고했으니 "네 집에 가서 몇 일 동안 쉬라"고하며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사실상 남편에게 뒤집어 씌워서 자기는 빠지려고 하는 계략이 아닙니까? 그때 그 장군이 즉 우리아가 내 부하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고 싸우는데 내가 어떻게 아내와 함께 쉴 수 있습니까? 하면서 그 날 밤 왕궁 처마 밑에서 떨고 지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원은 안 되겠다 싶어서 야전군 사령관인 요압에게 명령을 내려 우리아가 돌아가거든 특공대로 보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아는 죽었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데려다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아의 사건입니다. 다윗이 이런 끔찍한 일을 어떻게 저지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매사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 받고 처신할 때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만은 기도를 안했습니다. 그 젊은 여자가 목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원이 기도했으면 왜 그랬겠습니까? 가령 하나님. 저 여자를 불러다가 내가 재미를 보아도 됩니까? 하고 기도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 남편을 불러다 놓고 하나님. 우리아를 죽일까요 말까요 하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할 때와 안 할 때가 전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기도 생활로 이어지면 실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생활이 성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할 때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감사로 성화(3절 하반절)

3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골로새 교인들이 스스로 감사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과 디모데 즉 주의 종들 요즘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성도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즉 그 가정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 가정이 점점 성화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웃들은 시기하고 질투한다 할는지 모르나 목사는 자가용을 산 교인들 보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홉 평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잠자기도 불편하던 교인이 30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면 목사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자가용을 사고부터는 그 다음 주일 날에 자기 가족을 데리고 설악산에 가고 주일을 범한다면 목사가 그 때에도 감사하겠습니까? 그런 경우에 자가용은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한 번 혼을 내주면 정신을 차리곤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일 잘 지키고 열심히 봉사하고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비로소 목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주의 종이 감사할 때와 걱정할 때는 달라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놀란이라고 하는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 이야기인데, 가난한 집사 내외가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주일학교와 성가대 봉사를 아주 열심히 잘 했습니다. 또 십일조를 꼭꼭 드리니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점점 돈을 벌어 가지고 공장이 하나 생기고, 회사가 하나 생기고. 세 개, 다섯 개. 열 개가 생겨서 이제는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여러 회사를 거느리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이 목사님께 사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나 바쁜지 죽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못 죽겠습니다.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없고, 성가대 봉사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가지고 왔으니 사표를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전에는 제가 한 달에 천불을 벌어서 백 불을 십일조 할 때에는 아낌없이 했는데 이제는 제가 한달에 번 것을 십일조 하려면 몇 만불을 해야 되는데 참으로 아깝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서 제가 한 달에 몇 천 불만 십일조해도 제일 많이 하는 것이니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것만 헌금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십일조를 안할 수도 얼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알아서 눈감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놀란 목사는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하더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십일조를 하고 열심히 봉사하더니 하나님께서 너무 많이 복을 주신 후에는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고 돈버는 일에만 열심입니다. 하나님! 공장이 귀합니까, 믿음이 귀합니까? 이 공장이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 공장들을 거두어 가시고 옛날의 신앙 생활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더 큰복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냈습니다 이 사람이 아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목사님 잘못 했습니다. 그 기도를 취소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제는 죽으나 사나 기도하고, 죽으나 사나 십일조를 드리고, 죽으나 사나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의 종은 믿음이 잘될 때 감사합니다. 또 그 믿음이 잘될 때 생활에 성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사하는 것보다도 주의 종이보고 감사할 때에 그 가정의 생활에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말씀으로 성화(4-5절)

4절과 5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라고 하였는데 예수 안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또한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모든 성도, 너와 나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 혹은 패거리 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 즉. 땅 위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소망이 이렇게 복된 것은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좋다는 것은 다 가졌습니다. 예수 안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리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여러분 몇 사람하고만 사랑하게 되면 패거리가 되기 쉬운데 그것은 교회 안에 암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땅 위에 소망이 아니라 하늘 나라 소망이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면 이렇게 훌륭하게 된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줬느냐 하면 전에 너희가 복음 진리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성경을 요즘처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성경 말씀을 들어야만 했기 때문에 들어서 예수를 믿어야 했던 때입니다. 그러니 시간 시간에 나와 열심히 들은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을 항상 펴 놓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덮어놓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 낮 시간에 골로새서를 찾으시오. 하니 성경을 한번 펴 보았을 뿐 그 다음에는 저녁에 나오나 수요일에 나오나. 성경은 언제나 덮어놓고서 그 다음 주일에야 찾으라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을 덮어놓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예수를 믿으니 무엇을 어떻게 믿자는 것입니까? 그러니 항상 성경을 펴놓고, 항상 읽으며, 묵상하고, 들으면서 또는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뜻을 분명히 깨달을 때 바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생활에 성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부딪치면서 항상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활에 성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III. 인격의 성화(6-8절)

1. 의지적인 인격(6절)

6절을 보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이르매 지금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막 자라가는데 그 결과가 골로새 성도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러니 골로새 교인들에게 복음이 들어간 결과 열매를 많이 맺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록 마찬가지로 세계에서도 골로새 교회를 본 받아 열매 맺어 자라 갔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 맺은 열매는 곧 신앙적인 인격을 말합니다. 믿음도 생활도 성화되어야 하지만 사람의 인격 자체가 먼저 성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행동. 즉 열매 맺는 의지의 결단적 행동이 인격의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밤새도록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결단을 못 내리고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고 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입니다. 사태를 살핀 후에 결단을 내고 행동을 해야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럴 적에 훌륭한 인격의 요소 중의 하나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우리의 인격은 성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이지적인 인격(7절)

7절을 보면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인격의 요소는 이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의 요소 중에는 이지적인 면이 있는데 이 이지적인 인격의 소유자는 계속 배우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파고 들어가고 질문을 하며 따집니다. 이것은 이지인 인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단을 내릴 때 배우지 않고 모르는 주제에 결단을 내리면 잘못되기 쉽고 알지 못하면서 행동을 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여 좋은 열매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지적인 인격입니다. 그런데 이지적인 인격, 즉 배우고 따지는 것으로 끝나면 행동이 없는 공허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은 믿고 이해가 안되면 벼락이 떨어져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웃기는 소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인격에는 이지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한 사람의 인격은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에게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반에 등록하라. 등록을 하고 성경 공부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모르고 누구를 믿으며. 어떻게 믿을 것입니까? 성경반에 등록해서 성경을 깊이 배우고 배울 만큼 다 배울 때에 신앙적인 훌륭한 인격의 한면을 갖추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인격의 변화는 한 단계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감정적인 인격(8절)

8절을 보면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성령 안에서 너희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배울 것을 배우고 따질 것은 따져서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한다고 하여도 아직 모자라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감정이 빠지면 결국 부족한 인격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따지고 따져서. 이웃이 지금 어려운 일 당했으니 도와 주어야겠다고 결단을 하고 구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 뜨거운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없다면 구제의 의미가 없습니다. 돈에는 피가 없습니다. 눈물도 없기 때문에 그런 구제는 별로 의미 없는 구제입니다. 구제에는 반드시 내 마음이 실려져야 하고 사랑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뜨거운 감정이 있어야 됩니다. 이 감정적인 것이 인격의 한 면이요, 한 요소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뜨겁기 때문에 아주 슬픈 일을 보면 눈물이 평펑 쏟아집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가정에 가면 같이 기뻐해 주게 됩니다. 그렇다고 감정에만 치우쳐 버리면 변덕이 일어나는데 감정은 변하기 쉽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감정적인 요소가 갖추어져야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배울 것은 다 배우고. 그 다음에는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믿을 것은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믿는 것은 감정이 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행동에 옮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의지적인 면, 이지적인 면. 감정적인 면. 즉 결단 할 것은 결단하고. 배울 것은 배우고. 사랑할 것은 사랑하는 것, 즉 믿을 것은 믿는 것이 인격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감정은 성령 안에서 너희의 사랑,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감정을 감동시켜야 변덕이 없는 참사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렇게 할 때에 훌륭한 믿음의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그리스도의 분량의 인격에까지 점점 더 가까워져서,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 가는 성화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믿음이 성화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생활이 성화되어야 하고, 우리를 인간 자체의 됨됨이가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분량에 가까워지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이 없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요. 이것을 야고보의 말을 빌리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반드시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화도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중생이 구원의 문제라면 성령 충만은 상태 변화와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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