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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제자입니까?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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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어느 목사님 한 분이 교회를 개척하라는 소명을 받고, 그 명령에 따라 자신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평택에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평택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던 터라 함께 개척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만난 중년 부인 네 사람과 함께 가장 먼저 제자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네 사람의 부인 가운데 한 사람은 아주 싸움을 잘 하는 현직 교사요 한 사람은 이전에 술집을 운영하던 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일주일에 한번씩 제자 훈련을 하시는데, 일단 모였다 하면 기본이 두 시간 반이요, 길면 세 네 시간 동안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두가 비웃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하여도 세상에 저 유명한 싸움쟁이 교사하고, 전직 술집 사장님 하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교회다운 교회가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뜻이 계셔서 보내주신 곳, 이 곳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하며 제자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곳에 소망이 있습니까?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비전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힘으로 제자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계속 되는 제자 훈련을 통하여 목사님의 마음도 깨어지고 참여하는 훈련생들 마음도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을 받으면서, 가장 먼저 사람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싸움쟁이 선생님이 어느 날 갑자기 천사 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전 같으면 버럭 화를 낼 터인데 주 안에서 거듭난 이후에는 그저 싱긋 싱긋 웃으니 도무지 싸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 학교 모든 선생님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 선생님을 저토록 완전하게 변화시켜 놓았을까? 누가 저 욕쟁이 싸움쟁이 교사를 저토록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궁금해 하는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을 향해 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세요. 주님을 영접하세요. 주님을 만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 평생에 이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겠습니까? 이 행복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바로 그 선생님 때문에 하나 둘 전도가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 한 분, 술집을 운영하던 분이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술집을 운영해 오던 터라 발이 무척 넓었습니다. 그동안 술집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믿으라고 전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주의 제자들이 무섭게 전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출석 교인 1천명이 넘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한 사람의 영혼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나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온전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이 나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지난 한 해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 왔습니까? 일년 사이에 어떤 변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이전과 그 이후에 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로 돌아온 영혼이 몇이나 있습니까? 진정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제자입니까?

# 2

  예수님,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 열둘을 부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난 모든 무리가 다 넓은 의미의 제자였지만, 그 제자 무리 가운데 특별하게 열둘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제자로 훈련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란 선택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19).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열둘을 택하신 주님, 3년 동안 저들과 함께 지내며 저들을 주님의 제자로 훈련시키셨습니다. 아주 철저한 제자 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제자 열둘에게 주님은 전 세계 온 인류의 구원 사역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저들은 모든 것을 다 내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 한 마디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 나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고백하며,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위탁, 곧 total commitment입니다.

  나 자신을 전적으로 위탁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내 삶을 전적으로 다 맡긴다는 뜻입니다. 옛 어르신들은 좀 더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옛날 옛적 우리네 어르신들, 특별히 어머니들은 남편 될 사람을 충분히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정해 주시는 대로 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인생을 통 채로 맡긴 것입니다. 전적인 위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적인 위탁이란 잘 알지 못하지만, 하늘이 정해 주신 그 남자에게 나의 전부를 맡기는 여심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신랑 되신 나의 주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순결한 신부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주님이 나의 신랑이라고 하면서 정작 나의 마음은 곁눈질 할 때가 많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지 못하고, 딴 청을 피웁니다. 그리고는 손해 보지 않을 정도만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얄팍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심으로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위탁하며 살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까? 2002년도의 삶을 돌아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진정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님 아닌 그 무엇에 내 인생이 끌려오진 않았습니까?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제자입니까?

# 3

  옛날 유대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나오미란 여인이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갑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과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압 지방에 가서 사는 동안 남편과 아들 둘이 모두 죽었습니다. 몽땅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나오미가 이제 고향을 향해 돌아옵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섭니다. 따라오는 며느리를 향해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말을 합니다. "너희 백성과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큰 며느리가 먼저 시어머니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돌아가라 해도 자기는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장면으로 우리 함께 심방을 가 봅시다. / 룻기 1:16-17(403쪽) / (성가대 읽고) / 다시 한 번 읽을 때에, 이번에는 어머니라는 단어 대신 예수님을 넣어 읽어 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예수님을 떠나며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도, 예수님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예수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예수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예수님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 4

  오늘 주신 말씀, 누가복음 14장으로 돌아옵니다. 14장 25절을 보니,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따라 옵니다. 무슨 생각으로 따라 오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주님, 따라오는 무리를 향해 돌아서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26절과 27절과 33절의 마지막 대목을 주목합니다.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니, 지금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데, 제자가 될 수 없다니요,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단호하게 하시는 말씀, 제자가 될 수 없다니요. 해도 너무 하십니다. 너무 야박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나를 따른다면 잘못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서 돌아가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왜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걸까?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로 사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곧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제자의 길, 셋으로 나누어 하나씩 살펴보며 나의 삶과 신앙을 한번 돌아보고자 합니다.

# 5 / 제자도 하나 : 미워하라! 그리고 따라오라!

  14:26 / (읽기) / 우리 주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미워하라는 말씀입니까?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를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통념을 완전히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로 사는 길, 상식과 통념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면 왜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 하셨을까?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 무슨 뜻일까? 이 말씀을 뒤집으면, 미워하면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요, 자기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의 속뜻은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대로 사랑할 때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제자로 서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첫 번째 통념은 내 가족을 위해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가족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 곧 나의 주님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내 가족보다도 못한 위치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서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봅시다. 내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지는 않았습니까? 만유의 주, 만왕의 왕, 나의 구주 예수님을 내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가두고 살아오진 않았습니까? 내 가족을 위해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아오진 않았습니까? 정녕 나는 한 해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제자로 살아 왔습니까?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제자입니까?

# 6 / 제자도 둘 :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14:27 / (읽기) /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6절에서 우리 주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야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날마다 순교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순교요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주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란 말은 부활 사건 이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 하면 부활의 영광을 함께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을 하시던 때, 그 때 십자가란 무시무시한 사형 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주님,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겐 십자가가 하나씩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 이미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형, 곧 사형 선고를 받은 인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랍고 감사한 일은 그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이 제자의 인생이요, 신실한 종, 제자의 인생이 곧 영생으로 인도하는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도의 두 번째, 그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모두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의 삶을 안내해 주십니다. 교회사를 돌아볼 때 십자가를 붙들고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을 또한 많이 봅니다. 저들은 자기 몫의 십자가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기를 한하고 자기 십자가를 감당했던 것이요, 마침내 저들은 십자가로 승리했던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감당해 왔습니까? 혹시 힘들다고 십자가 내려놓고 나만 오지 않았습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향해 내 몫의 십자가마저 져 달라고 억지를 부리진 않았습니까? 나의 십자가마저 주님이 지고 가시진 않습니까? 나는 진정 주님의 제자입니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저의 가슴에 울려 퍼지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일찍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 방황하던 크로스비 여사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 찬송인데요, 141장입니다. 우리 함께 찬송하며 십자가 신앙을 점검할 때에, 2, 4, 5절을 함께 찬양합시다. / (다함께 찬송하며 은혜 나누기)

# 7 / 제자도 셋 : 다 버리고 따라오라!

  14:33 / (읽기) /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 나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라는 말씀과 통합니다.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내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리 내 손에 움켜쥐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우겨도 100년도 채 나지지 않아 세상 것 다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오늘도 내 것 네 것 따지며 각박하게 살아갑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목숨까지 몽땅 다 주님의 것이라는 이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주님의 주인 됨, 곧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는 우기는 사람, 당연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주님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제자도’를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삶이란 신앙의 망대를 높이 세우는 일이요, 이 세상에서 사탄과 마귀의 세력에 맞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일입니다. 이 소중한 책무를 맡은 존재가 바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주시는 말씀은 하나입니다. 기왕에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으면,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망대를 세우기로 했으면, 큰 소리만 치다가 겨우 기초 공사 끝낸 후에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잘 계산하고 잘 준비하고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가다 못 가면 아니 감만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완성된 제자를 가리켜 소금이라 하십니다. 소금 같은 제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소금은 짠 맛을 내야 합니다. 문제는 소금이면서 짠 맛을 잃어버린 경우입니다. 소금을 꺼내어 간을 맞추려 하는데 그 소금이 아무런 맛도 내지 못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재활용하십니까? 아니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재활용이 불가능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일단 짠 맛을 잃게 되면 그 맛을 회복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립니다. 그렇게 버려진 맛 잃은 소금, 사람들의 발에 밟히다가, 그냥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가 있는 자는 잘 들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더 적절한 단어가 없어 그냥 사용합니다. 용서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 보다 똥이 더 좋습니다. 똥은 썩히면 좋은 비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어디에도 쓸 데가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 똥 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맛을 잃은 제자, 똥 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어 버림받은 존재,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은 존재, 이리 저리 밟히며 살아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존재,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주님께서 나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아직도 제자로서 미흡한 일이 있으면, 이 해가 다가기 전에, 완전히 맛을 잃기 전에 다시 한번 힘을 내십시다. 당신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린 앞으로 두 주간 동안, 특별한 기도를 할 것입니다. 동광 공동체에 신실한 제자, 곧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시는 권사님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일 새벽부터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1. 당회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법에 따라 권사 후보를 선정했습니다. 이 후보 되시는 분들이 진정 주님의 제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담대한 신앙을 허락하시어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공동의회, 선거 과정을 주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우리의 손으로 투표하지만, 결론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옵소서!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비뽑기는 우리가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후보가 되신 분들, 진정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나를 제자로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신령한 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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