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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낙하산을 펴듯 (빌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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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3 년 전에 SBS 뉴스 시간에 일어난 방송사고입니다. 그런데 요 근래 KBS에서 이를 뉴스로 보도하다가 또 다시 방송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동영상) - KBS 방송사고
http://news.kbs.co.kr/news.php?id=658171&kind=c

웃음은 이렇게 전염성이 있습니다. 한번 웃음보가 터지면 진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다보면 더 심해집니다.

이런 웃음은 어떻게 터질까요?

웃음에 관한 비밀은 오래된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 다윈, 프로이트 등도 웃음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웃음은 인체의 생리기능에 영향을 끼칩니다. 웃음이 한번 터지면 에어로빅을 5분 동안 하는 효과를 보인다고 합니다. 폭소가 터지면 인체의 근육 650개 가운데 231개나 움직입니다. 폭소는 긴장을 이완해주고 혈압을 낮춰줍니다. 또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합니다. 질병 저항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그래서 웃음이 많은 사람은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웃음은 무엇보다도 행복을 가져오는 명약입니다.

그리고 웃음은 놀라운 전파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 웃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최근에 ‘얼굴’이란 책이 베스트셀러입니다. 저자 대니얼 맥닐은 주로 과학 잡지에 칼럼을 쓰는 작가입니다. 그는 피고의 얼굴이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습니다. 판사는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피고보다, 미소를 짓는 피고에게 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변호사는 바로 미소 짓는 얼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 만날 때 첫인상이 중요합니다. 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알버트 메라비안이 이 첫인상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대화에서 말하는 내용은 7%, 외모와 표정과 태도는 55%, 목소리는 35%를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내용보다도 그 내용을 전하는 사람에게 풍기는 인상이 93%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첫인상을 좋게 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웃는 것입니다. 활짝 웃는 표정과 웃음 소리는 상대방의 신경체계를 움직입니다. 웃음이 첫인상에서 상대의 호감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중국 속담에도 ‘얼굴에 미소가 없으면 가게 문을 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님에게 환한 미소로 대해야 합니다. 주인이 찡그린 얼굴로 있으면 손님이 들어왔다가도 나갑니다. 그러니까 장사의 비결도 바로 미소 짓는 주인의 얼굴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뻐하란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1 절에도 빌립보교인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서 썼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빌립보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기쁨을 같이 누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로마에 바울이 순교한 그 자리에 조그만 예배당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적을 모아놓았습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생선 토막 자르듯이 뉘여 놓고 도끼로 찍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시간은 그런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기뻐할 일이 있어야 웃습니다. 기뻐할 일도 없는데 괜히 히죽 희죽 웃어 보세요. 맛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괜히 웃은 게 아닙니다. 기뻐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 기쁨은 사형 판결도 막지 못했습니다. 죽음도 바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바울의 기쁨은 강력한 기쁨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바울의 기쁨은 바로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이란 기쁨의 당사자가 바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쁨의 당사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바울은 단지 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 옆에 있기만 해도 그 기쁨은 강력합니다.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기쁨은 기준이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기준인 기쁨은 그 때 뿐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얻은 기쁨은 이내 사라집니다. 금방 다른 근심거리가 생깁니다. 이내 말라 버립니다.

우리의 기쁨은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항상 있습니다. 샘처럼 솟아납니다.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것보다 영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순교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기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 교회 일을 하다가 기쁨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기쁨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기쁨은 주인공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웃으시면 그 기쁨이 바로 내게로 이어집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웃으시다니요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반드시 기뻐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바울의 기쁨의 비결은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려면 우선 굳게 서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1 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여기서 선다는 동사는 ‘스테케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각오를 다지며 서 있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즉 굳게 서는 것입니다. 적이 공격해 들어오는데 대오를 이탈하면 어찌됩니까? 100 전 100 패합니다. 이기려면 굳게 서서 공격을 막아야 합니다.
기쁨은 저절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지키는 자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승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피땀 어린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그래도 그 힘든 과정을 참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승리의 영광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든지 기쁨이 보장되지 않으면 끝까지 할 수 없습니다. 피아도 레슨도 할 수 없습니다. 테니스 교습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기쁨이 없이는 끝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왜요?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영성의 클라이맥스는 기쁨입니다.

누가 ‘왜 교회를 다니느냐?’고 묻거든 분명하게 대답해 주세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우리가 천국을 가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의 기쁨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근심을 몰아냅니다. 세상은 근심이 사라져야 기뻐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기뻐하면서 근심을 몰아냅니다.

전에 ‘웃으면 복이 와요’ 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복이 와야 웃는 것이 아닙니다. 웃으면 절로 복이 온다는 겁니다. 이런 진리는 세상 사람들도 다 압니다.

식욕이 없습니까? 밥도 맛이 없고, 김치도 맛이 없습니까? 맛이 없어도 일부러 맛있다고 외치면서 먹어 보십시오. 옆에서 보는 사람이 같이 먹고 싶어 하도록 맛있게 먹는 연기를 해보세요. 적극적으로 밥상에 달라붙어 맛있게 먹는 연기를 해보세요. 맛없는 밥과 반찬이 맛있어집니다. 그저 밥하고 김치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습니다.
맛있게 먹어야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은 해피나가 쓴 ‘지코의 일기’에 있는 글입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가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에 앉은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굳게 서서 기쁨을 사수해야 합니다. 굳게 서지 못하면 기쁨은 사라집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굳게 서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빌립보교회에 말썽이 있었나 봅니다. 다름 아닌 두 여자의 갈등입니다. 2 절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3 절을 보면 복음에 나와 같이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들의 공로가 큰 교회입니다. 루디아란 여인의 집에서부터 빌립보교회가 생겼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 파워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다보면 의견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서로 고집을 부리다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이 소식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 일에 힘쓰다가 생긴 일입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때 그 생각과 마음을 합쳐야 합니다. 한 쪽이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갈라진 마음을 합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생각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하실까? 기도하고 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떠나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 시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과 힘들게 살다가 또 떠납니다.

이 관계 회복의 능력은 혼자 힘으로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바로 세 번째 바울의 기쁨의 비결입니다.
세 번째는 불편한 관계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3 절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인간관계가 원만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다툼이 있으면 화해의 중보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거꾸로 양쪽에 다니면서 불을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을 이해시키면서 감정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신혼부부 때는 많이 싸웁니다. 서로 다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상대에게 없는 것을 짝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는 법을 터득하면 싸움일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고 싸우지 맙시다. 나는 저런 꼴 못 본다고 돌아서지 맙시다. 내가 못하는 걸 저가 한다고 봐줍시다. 그래서 서로 다른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4 절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을 반복하는 것도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슬픈 상황에서도 기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멋진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 기쁨을 잃지 않는 공동체가 됩시다. 누군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옆에서 거들어 줍시다. 이내 화해하고 웃을 수 있도록 간질어 줍시다.

비행기를 타면 출발 전에 승무원이 안전 교육을 해줍니다. 구명조끼 입는 방법을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위기 때 위에서 떨어지는 산소마스크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만약 사랑스러운 자녀가 옆자리에 있다면 내 산소마스크를 누가 먼저 써야 할까요? 자녀에게 먼저 씌워줘야 할까요? 정답은 나 먼저 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써야 자녀를 구할 수 있습니다.

웃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부터 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습니다.

웃음은 낙하산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낙하산을 믿고 하늘에서 뛰어 내립니다. 만약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이 굳어있고 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 될 일도 막힙니다. 얼굴이 펴지는 것은 곧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것입니다. 내 얼굴이 낙하산 펴지듯 당연히 펴져야 합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얼굴 펴는 연습을 합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들 때까지 얼굴 표정을 지어봅시다. 얼굴을 비틀어보고 입을 찢어봅시다. 앞으로 얼굴 근육을 풀고 하루를 시작하십시다. 언제나 웃는 내 얼굴을 상상하면서 사십시다.

기쁘게 사는 사람들은 증거가 있습니다. 기쁘게 사는 사람들은 노래를 즐깁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찬양을 좋아합니다. 찬양이 우리 입가를 떠나지 않고 하루를 즐겁게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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