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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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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고신복 목사

학교 안이나 주변에서 학생들 간에 싸움을 하거나 학교주변의 불량배들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며, 매우 오래된 현상입니다. 세계화의 추세로 볼 때 어린이들의 폭력도 청소년들의 폭력 이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FBI의 연구 조사에 의해 보면 어린이들이 어린이들을 죽이는 사건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데 모두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교회에 거의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폭력적인 TV프로그램이나 비디오나 컴퓨터 게임을 한다는 것입니다. FBI 댈러스 지국은 12년 동안 은행 강도 사건을 연구한 끝에 세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가진데다가 은행 강도는 폭력적인 포르노에 심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 10계명이나 사랑에 대한 교훈을 들어 보지 못했고, 폭력적 게임과 폭력적 포르노를 대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함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다가 마침내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의 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결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은 자녀들이 서로 치고 받고 죽이는 폭력적인 게임을 일절 금하는 것입니다. 음란과 폭력, 신성모독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폭력적 TV프로그램이나 포르노를 보지 않는 이유를 자녀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주 앞에서 흠도 없이 점도 없게 해야 합니다.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 다 같이 복음 찬송(찬미예수 439장)을 부르시겠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데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와 해석이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셨습니다. 그 소경을 본 제자들은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을 난 것이 뉘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이오니까? 그 부모의 죄 때문이오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소경을 보고도 그 견해가 달랐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사건을 놓고 정반대의 이야기를 함으로 어떤 것이 옳은지 분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볼 때 바로 보고,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사람의 눈은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눈과 긍정적인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하고,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1백 년 전에 에펠탑이 처음으로 섰을 때 “깡마른 키다리 피라미드”니 “거대하고 추악한 해골”이라고 흉본 예술가가 많았습니다. 시인 베르네느는 절대로 에펠탑 근처로 지나가지 않았고, 모파상도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으면서 에펠탑 안의 식당에서는 곧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파리에서 흉측스런 탑을 안볼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1백년이 지난 에펠탑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에펠탑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후대에는 가치가 있고, 자랑하는 탑이 된 것처럼 잘못 판단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눈을 가졌던 제자의 눈을 가지지 말고, 긍정적인 면으로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과 같이 믿음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볼 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고, 장래에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올바른 것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눈을 가진 성도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바라보는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을 제자들은 죄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때문만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에서 보면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죄때문에 기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고난의 시련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가 슬픔과 절망에 얽매인 자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중에서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실패하고, 고난당하고, 병들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자에게, 특별히 가난하고 약하고 절망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책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련의 기간 중에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인하여 ①단련하신 이후에 정금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②복이 내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③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2. 믿음의 눈을 지닌 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봅니다.

제자들은 불행한 소경을 볼 때 “누구의 죄때문입니까?”라고 하면서 죄를 보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인간을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남의 허물과 죄만을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지 않고, 그의 죄와 허물만을 본다면 그보다 더 큰 잘못은 없습니다. 비록 그 사람에게 죄가 크다 하더라도 그 죄보다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길 때 그 사람을 죄에서 건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용서 못할 일이 없고, 관용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불행한 소경을 볼 때 그의 현재와 과거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의 오늘의 불행이 앞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것을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과거만을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과거를 정죄하거나 과거에 얽매어 있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현재만을 바라보며 안주하거나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에 충실한 것은 필요하지만 오늘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만 집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인간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불안전한 모습을 보지 마시고, 미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딸이 되도록 앞날을 열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그의 육신을 고쳐주어 새로운 삶으로 길을 전환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외를 당하던 삭게오를 정죄하지 않고, 새사람으로 앞날을 열어 주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지닌 자는 앞을 바라봅니다.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앞을 바라봅니다. 사도바울도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눈을 가지고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역사를 창조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

3.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소명의식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 눈먼 사람을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사람이 실로암 못으로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보내심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서 씻으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실로암”이란 뜻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명의 부여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비록 소경과 같이 앞을 바라볼 수 없는 무지한 사람일지라도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명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 하고, 물질을 아껴야 하고, 힘을 아껴애 합니다. 썩어지는 세상 것에 투자하는 것에는 아낌이 없으면서 정작 우리는 사명을 위해서는 올졸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취미나, 우리의 삶의 행복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사업과 나의 신앙을 위한 시간에는 시간을 올졸하게 쓸데가 많이 있습니다.

4절에서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우리성도들은 사명을 위하여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에 투자하지 마시고, 쓸데 있는 데 투자를 하기를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선한 삶을 사는데 시간을 보내시고, 주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데 시간을 투자하시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시간을 보내시고, 봉사하시고 충성하는데 시간을 보내시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교육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십시요. 세월이 악하기에 세월을 악한테 쓰지 마시고, 세월을 좋은 데 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과, 우리교회, 우리가정, 우리사회와 조국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자들처럼, 애정 없는 눈으로 보면서 비난과 정죄를 일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모든 일을 보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존엄성을 귀히 여기고,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세월을 하나님께 투자하며 살 수 있는 여러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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