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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민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신 32:9~12, 마 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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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담임 목사
 
  1990년 걸프 전쟁이 한참일 때 영국군 세 명이 길을 잃고 비틀거리며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대 대열에서 이탈되어 굶주림에 기진하여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막에서 미군 대장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미군 대장은 병사들의 무례함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네들, 내가 누군지 아나?”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옆에 있던 다른 병사의 옆구리를 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訣?진짜 큰일 났다.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저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입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마귀의 자녀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방인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선민의 자긍심과 자녀의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 이 문제는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을 때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발견하였을 때에 자신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편 22:6에는 시편의 기자가 말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1:15에는 바울이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야 당당히 살 수 있습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니 너무 기뻐서 당당히 외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이 스승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정말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 하나가 찾아와서 어떻게 내적인 자유의 단계에 도달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습니다. “나는 스무 살 때까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없었다. 스물이 지난 후 나는 끊임없이 이웃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나서 쉰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신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내 자신이 어떤 모습입니까? 선민입니까, 아니면 이방인입니까?

첫째, 이방인은 육을 염려하고 영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방인들은 이것 외에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구하는 것은 오로지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밖에 모릅니다.

  사람이 돼서 동물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다른 것이 많은 것 가운데 사람은 육체적인 것만 추구하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은 위를 향한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말의 헬라어 ‘안트로포스’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생영이 된지라”고 합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야 참 사람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만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스펄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세상 염려의 삼위일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삼위일체는 조금 달라요. 입고, 먹고, 사는 집 문제 즉 의식주가 염려의 삼위일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해결되면 되는 줄 알지요? 그래서 오로지 이 염려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이 셋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염려란 헬라어 ‘메리스’란 말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입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사는 집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집니다. 이것이 염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우리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온 천하 다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런데 목숨 문제, 영혼 문제보다 세상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육적인 문제 때문에 염려하고 골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주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어떤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 나왔습니다. 42세의 한 여성인데 얼굴이 흉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붓고 커진 여성입니다. 이 여성을 ‘선풍기 아줌마’라고 부릅디다. 아줌마란 말도 억울한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20대에는 상당히 수준 이상으로 예쁜 얼굴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다른 사람이 예쁜 걸 못 봐주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형을 시작했습니다. 성형도 제대로 했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흔히 “야매”라고 하는 부정시술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실리콘을 주입한 다음부터 공업용 파라핀을 주사하고, 콩기름을 주사하였습니다. 정신 질환인 환청이 있어서 누가 “넣어라”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콩기름을 얼굴에 넣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성형중독에 정신분열증까지 생기에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여성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마친 다음에 성형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정신과 치료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복음치료가 필요합니다. 여성이 예뻐지고자 하는 욕심은 누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의 관심은 육체적인 것, 예뻐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나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얼굴이 예쁜 것이 얼마나 갑니까? 몸매가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갑니까? 금방 사라집니다. 이야말로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1:24-25에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염려가 금방 시들고 떨어지는 육체가 아니라 영원하고 세세토록 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못생겼고, 키는 작고, 추하기까지 했으며, 대머리에, 눈썹은 짙고, 다리는 굽었으며, 매부리 코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도 안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울의 염려는 키 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영혼이었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어도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죽으려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살려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죽으려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방인이며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부인에게 가정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자질구레한 것은 내가 하고, 큰일은 남편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질구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집 사고팔고 땅 사고팔고 하는 것”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하는 큰일은 무엇이냐고 했더니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 등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우리가 좀더 큰일에 관심을 가지고 더 중요한 일에 염려해야 합니다.
  경제가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우리 영혼에 대한 염려가 앞서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마친 자녀의 대학교 입학이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염려는 그들의 하늘나라 입학입니다. 자녀의 학사경고가 염려되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학사경고가 아니라 구원경고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 선민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므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누구 아버지시라고요? 우리 아버지십니다. 누구에게 있어야 할 것이라고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신줄 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려고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낳고 양육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 구원자, 목자, 승리자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라도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책임은 낳으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부자인데 돈 걱정하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의사인데 병을 걱정하면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대결하여 가뿐히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악한 왕비 이세벨에 의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그는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멀리 도망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리고 아예 죽기를 작정하고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하여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까마귀까지도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공급하십니다.

  엘리사의 선지학교 제자, 요즘 말로는 신학생이 부인과 아들들을 남겨두고, 빚도 많이 진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학생의 부인은 과부가 되었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빚쟁이가 와서 그녀의 두 아들들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아들을 데리고 간다는 말은 아들들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기름 한 그릇 외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이웃에게 가서 그릇을 모두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릇이 다 찰 때까지 계속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릇이 찰 때까지 기름은 계속 나왔습니다.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 찼습니다. 과부와 두 아들은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생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빈 그릇도 차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은 10:9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대나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다 알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해롤드 스테판스는 “염려(worry)와 관심(concern)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염려하는 사람은 문제를 보고 관심가지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염려합니다. 선민은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 선민들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가를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숙한 다음에 보니 염려할 것이 아니라 염려를 맡길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알아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아버지입니다.

셋째,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진정한 선민입니다.

  결국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는 우선법칙이 있습니다. 우선법칙 때문에 선민과 이방인이 구분됩니다. 쓸데없는 것을 구하고,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정작 목숨을 걸 데는 안 걸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입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해야 진정한 선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물질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지식이나 학문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능력보다 우선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우리의 명예나 인격보다 우선합니다. 영적인 것을 구하면 육적인 것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염려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선법칙은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중했습니다. 대접하는데 열중했던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님께 자기 동생 일로 불평합니다. 대체로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사람은 불평합니다. 사람들은 긴급한 것(urgency)과 중요한 것(importance)을 혼돈합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혼돈합니다. 최우선의 가장 큰 적은 차선입니다.

  미국의 클로비스 채플이라는 목사님의 ‘두 척의 외륜선 이야기’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배가 멤피스를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로 향하여 갑니다. 빠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느린 배를 보며 비웃었습니다. 느린 배의 선원들은 은근히 화가 나서 더 빨리 가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두 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배가 뒤로 처지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 싣고 있던 연료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충분했지만 더 빨리 경주하기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배의 화물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빨리 가서 결국 경주에 승리했지만 수송해야 할 화물을 다 태우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경주에 일등을 하기 위하여 화물을 태우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리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승리는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멋있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확실해야 합니다.

  제가 금요일이면 목장에 심방을 갑니다. 제가 간다면 좀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데 가만 보면 성경공부나 기도보다 불에 올려놓은 밥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대추 넣고, 인삼 넣고, 오미자 넣고, 뭘 넣고 끓이는 차에 더 신경이 가 있는 것 같아요. 예배보다 식사나 차에 온통 신경이 가 있는 것은 우선법칙이 잘못된 것입니다. 잘 대접하려는 마음이야 고맙기 그지없지만 제가 더 기쁜 것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도 더 좋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이방 여인,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선민의 자격을 가졌습니다. 왜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다니엘 9:18에는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의 때문에,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선민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결론

  나폴레옹의 말이 도망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날쌘 병사가 자기 말을 타고 가서 장군의 말을 잡아와서 말고삐를 장군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 때 나폴레옹이 병사에게 “고맙네, 대위”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병사는 “감사합니다. 장군님”하고는 즉시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서 장교 숙소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병참병에게 대위의 군복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의 말 한마디에 장교로 바뀐 것입니다. 이 병사는 따지지도, 사양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왜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할 만한 힘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선민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택한 족속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에베소서 2:19에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합니다. 어떤 이는 어릴 때 사진이 없다고 자기를 낳지 않고 데려온 게 아니냐고 부모님께 물어본답니다. 사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야”라고 하는 한 마디입니다.
  믿음은 이방인을 선민으로 만듭니다. 할례가 문제가 아닙니다. 족보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고, 경제 때문에 움츠리지 말고, 선민의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삽시다.

  우리 앞에 모든 염려를 다 맡기고 모든 것을 주실 줄로 믿고 아버지를 따라 사는 좋은 아들, 예쁜 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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