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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 (미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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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 명을 상대로 해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

무엇인가를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삶>은 진행되고, 기다림 속에서 인도되고, 기다림 속에서 성취되어 감을 보게 됩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 입니다. 연단 중에 마지막 연단도 기다림입니다. 인생의 성패도 기다림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기다림으로 출발합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열 달을 기다림으로 채워야 출산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새 생명이 열 달의 기다림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되면 조산하게 되고, 조산하게 되면 미숙아로 분류되어 인큐베이터 안에서 남은 기다림을 채워야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축복도, 응답도, 성취도 기쁨도 없습니다.

찬란한 새벽도 길고 긴 밤중을 기다려야 찾아오고 새파란 봄도 매서운 겨울을 기다려야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의 수확도 지루한 장마와 태풍을 기다려야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기다림의 연속인 듯합니다. 이러므로, 기다림을 아는 자가 인생을 알고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즐거운 일 아닐까요? 농부는 씨 뿌림으로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함으로 출산을 기다리고 낚시꾼들은 미끼를 던짐으로 고기를 기다리고 목회자는 많은 기도와 고통과 훈련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기다립니다. 인생은 기다림이며 지구력과의 싸움입니다.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립니다. 하루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쌀 씻어 불 지펴 놓고 뜸 들기를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 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 더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좀 더 발전되기를 기다리고, 결혼 적령기(適齡期)에 접어들면 젊은 남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그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게 되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을 기다리고, 집 없는 설움 속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의 새 집으로 이사 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분단 된 우리에게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가시 노릇하는 사람 곁에 있어도 성자 될 날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아닐까? 병든 자식 속 썩이는 남편 곁에 있어도 그저 살아있음으로 다행이 아닌가요? 기다림에 불평 않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일 것입니다. 밤중이 되면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것, 때가 되면 고추장에 밥 비벼 먹을 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은 밥상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매일 아프고 힘들지만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치유를 기다린다는 것, 오랜 시간동안 찾아오는 교인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구름 같은 성도들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주체할 수 없는 즐거운 일 아닐까요?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홀연히 임재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병 낫기를 기다리며, 문제해결을 기다리며, 믿음의 성숙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삶>은 모든 면에서 기다림의 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기다림은 곧 삶 자체입니다. 거꾸로 말해 기다림이 없는 삶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큼 소망(所望)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다림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 속에서 오늘의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이 없어질 때 그것을 절망(絶望)이라고 합니다.

만일 기다림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적막할 것이겠습니까? 기다림이 있기에 꿈을 키워가는 노력이 있고, 기다림이 있기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소망은 더욱 더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 무엇을 바라보고 기다린다는 것! 바로 그 자체가 삶이요, 소망이요, 행복입니다. 아직도 내게 기다림이 남아있다는 것은 바라는 소망과 사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현대인은 언제나 현재로 만족하지 못하고 오직 미래를 향해서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기다림인데 이것은 막연한 바램입니다. "좀 나아지겠지, 행여 좀 나아지겠지." 하는 것을 말하는데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생각하는 막연한, 아무 내용도 없고 보장도 없는, 그러한 바램을 '희망사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소망이라는 기다림은 객관적 약속이 있고 내용이 있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각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약속이 있는 바램, 약속을 받은 그러한 바램이 바로 소망입니다. 결정적 미래, 약속된 미래로부터 주워지는 바램, 그것이 소망입니다. 현실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과거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가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가진 꿈, 내가 가진 소망, 그것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고 미래적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기대 속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딛 2:13). 이러한 소망, 곧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후 장차 올 세상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이 있다는 소망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교회력 상 대림절(待臨節)이라고 하고 일명 대강절(待降節)이라고도 부르는 교회절기로 들어갑니다. 대림절은 금주부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정리하여 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대림절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을 기다리는 미래,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을 기다리는 그런 성격의 미래와 관련된 교회절기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대강절 첫 주일에 드리는 기도와 말씀과 찬양이 우리가 켠 촛불처럼 하늘의 빛이 되어 우리 마음속을 전류처럼 흐르기를 축원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는 서로 즐거이 화답할 수 있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단에 켜져 있는 촛불 하나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두운 세상의 빛이라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다리는 빛의 첫 날입니다. 성탄은 빛입니다. 성탄은 밝음이고 또한 맑음입니다. 맑고 밝고 환한 것이 오늘부터 우리 속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빛은 큰 빛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 안 오셨지만 사람들은 메시야의 오실 날을 수 천년동안 기다렸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늘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오시면 그 빛으로 인해 모두가 밝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을 맞을 때마다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합니다. 미래는 내일입니다. 내일이 어서 와야 지금의 괴로움이 끝나고 기쁜 날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 얘기가 항상 사람들의 관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태어날 것을 선포했습니다. 미가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베들레헴은 유다에 있는 작은 마을로 다윗의 고향이고 또한 에브라다는 다윗이 속했던 족속을 의미합니다. 미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 서에 보면, 다윗은 인격적인 흠도 있고 도덕적인 약점도 있으며 전쟁에서 피도 많이 흘렸지만, 선지자들은 다윗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외세의 침입을 잠재웠고 영토를 넓혔으며 막강한 국력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가가 선포한 이상적인 통치자는 비록 다윗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 통치방식은 다윗의 통치방식과 다릅니다. 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 주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다윗은 전쟁을 하면서 피를 흘렸지만, 새로운 이상적인 통치자는 평화롭게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불안하게 통치를 했지만 새로운 통치자는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때로 자신의 군사력과 권력을 의지하면서 통치했지만, 새로운 통치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때로 백성들을 착취했지만, 이상적인 통치자는 양을 사랑하는 목자처럼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주전 8세기 선지자였던 미가의 이와 같은 예언은 금방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이상적인 통치자가 태어날 것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미가가 예언한지 700여년이 지나서 예수님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만났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다시 읽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 본문이 메시아 탄생을 예언한 본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은 미가 예언자가 예언한 그 이상적인 통치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체험을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재현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오늘 우리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통치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매우 이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통치를 하신다.

미가서 5:3에 보면, 미가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다스릴 때,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은 자유를 상실했다는 것이요,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값이라고 말합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고통을 왜 당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죄의 값을 다 치렀다는 것을 의미하며 죄의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듯이 포로에서 돌아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적인 통치자가 포로들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죄의 값을 다 치르게 하고 자유를 얻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의하여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8:1-2).

예수님은 모든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통치자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용서하여 주시고,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고 상담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리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는 사람들은 심리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나 상담을 해주는 사람을 100% 신뢰해야 효과를 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100% 신뢰하고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100% 신뢰하는, 나의 통치자, 나의 메시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신다.

그리고 그 통치는 우리를 착취하시는 통치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시는 통치입니다. 선한 목자가 양떼를 먹이듯,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양식을 먹으며 살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삶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정의롭지 못한 우리의 행동을 싫어하시며, 지혜롭지 못한 우리의 삶을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정의 편에 서고, 진리 편에 서면서, 평화를 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통치를 땅 끝까지 위대하게 만드신다.

미가서 5:4 하반 절에서,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이상적인 통치자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 방법은 때로 약해 보이고,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위대하게 하십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 2002년 11월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친구, 가장 좋은 보약: 건실한 우정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이 글에 보면 친구와 건강에 대해서 실험한 결과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자면 좋은 친구관계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40% 낮고 또, 감기에 걸릴 확률도 네 배나 줄어들고 심장병에 걸릴 확률도 3배나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결과들을 통해서 결론하기를 친구관계가 좋고 사회활동이 좋은 사람들은 치명적인 병을 이길 수 있고, 더욱 강한 면역체계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보약이 되시고 건실한 신앙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우리의 건강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 수 있고 건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문제도 예수님의 통치를 따를 때 우리는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위대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통치에 복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드십니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를 열렬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을 내가 닮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라는 존재가 그 미래적 이미지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도 생각이고, 미워하는 것도 생각입니다. 그런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만큼에 존재가 되어진다는 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하겠습니까? 그 꿈이, 그 소망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며, 얼마나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기다려 가야 하겠습니까?

마치 무지개를 쳐다보는 것처럼 무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었으면 성취를 믿어야 합니다. 약속과 성취가 함께 있어서, 비로소 바른 대망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자는 성취를 믿어야 되는 것이고 이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이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다가오는 미래를 약속의 땅, 약속의 시간을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날을 준비하느라고, 그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오늘의 어떤 고난도 개의치 않고, 순교의 죽음도 아주 넉넉하게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자세는?

대강절 첫 주일에 가져야 할 우리들의 마음자세는 그 무엇보다도 미래적 삶의 자세, 곧 기다릴 줄 알고 앙모할 줄 아는 삶, 미래시간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받아드리는 자세의 회복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획하고, 예견하면서, 만들어가고, 쟁취해 가는 것으로서 '희망의 미래'를 보다 책임적으로 신중히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특히 신앙적인 삶의 자세에서, 미래는 '이리 오고 있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것, 삶이란 쟁취적인 성과물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허락과 준비와 선물로서만 가능한 신비로운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한 신앙의 계절이 바로 대림절기 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나의 모습에, 오늘 내게 있는 소유에, 오늘 내가 누리는 지위에, 오늘 내가 자리 잡고 있는 터전에, 오늘 내게 주어진 찬사에, 오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마십시다. 오늘에 집착하는 자에게 내일이란 있을 수 없고, 내일조차 갖지 못한 자를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결코 한 순간에 머무는 것이 없이 매 순간 순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구르는 돌멩이에만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만 청정한 생명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에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만 내일의 새 시간이 담겨집니다.

기다림은 신앙이고 성숙이고 인격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노아가 기다릴 수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뜻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괴테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쉬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잘 기다립시다. 그렇다고 쉬지도 맙시다. 기다리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비록 그 어떤 무서움 앞에서도 그리고 그 어떤 핍박이나 박해 속에서도 말씀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위대함입니다.

화란의 신학자 하켄디(Johannes Halkendik) 교수는 독일군을 피하여 산으로 도망가다가 일행과 헤어져 외로이 어느 동굴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한 유대인 소녀의 메모를 세상에 알린 일이 있습니다. 외롭게 굶주림과 추위에서 죽은 한 소녀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햇빛을 볼 수 없으나 저 밖에는 분명히 햇빛이 빛나고 있음을 믿는다. 지금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시나 분명히 하나님은 이 동굴 속에도 계심을 나는 믿는다. 지금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소식을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귀한 고백입니까! 나이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림의 소망>이 있었기에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맞이한 줄 압니다. 비록 힘  없고 나약한 한 소녀였지만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지휘하며 호령하던 장군보다도 어쩌면 더 침착하고 용감하게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은 세상 사람들의 헛된 꿈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산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확실하게 보장된 기다림입니다.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 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 깊은 영성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기다림의 소망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의 말씀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언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소망이 믿는 자들의 힘이요 위로요 확신입니다.

대강절이란 이 땅에 오셨던 주님을 기리고, 앞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세계를 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당신의 창조의 세계, 진리의 세계, 참 생명의 세계, 구원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말입니다.

2004년도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리십니까? 예수님은 온갖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만나를 주시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통치를 따라 살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대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통치를 따라 살 때에 세상에 평화가 있고 우리의 삶에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대림절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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