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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눅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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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종로교회)

지난 금요 심야기도회에 박형서 선교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만나는 사람들 열이면 열 다 죽겠다고 하는데 그러나 헤겔의 정반합 원리처럼 우리나라는 이런 과도기적인 과정을 거쳐서 크고 귀하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셔서 세계 방방 곳곳마다 12,000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 선교사들이 실패하고 엄두도 못내는 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마지막 때 모든 나라의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귀하게 쓰시려고 여러 가지 많은 종교, 이단, 이념의 갈등, 등 예방주사(?)를 미리 맞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환경속에서도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종족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국가와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23:10)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민족을 단련하려는 것이리라고 믿습니다.

1. 당신은 혹시 교인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 됐지 꼭 제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이런 생각을 종종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의 회원을 가리키는 말들 중에 “교인”, “신자”, “성도”, “하나님 자녀”, “천국 시민” 등등. 이런 용어들은 우리에게 상당한 위안을 줍니다. 그런데 제자란 말은 뭔가 매이는 것 같고, 짐을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자”란 말은 의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교인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자가 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믿는자(신자)가 되라고 했습니다마는 제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아직 아이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교인은 교회를 단순히 놀이터 정도로 생각합니다. 아이처럼 교회 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교인들 중에는 환자 같은 교인들도 있습니다. 늘 위로를 받아야하고 늘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물론 교회가 병원의 기능을 다 해야 합니다.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병실에 보니 아이들이 누워야 하는 곳에 멀쩡한 어른들이 꾀병을 부리고 누워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면, 누워서 우유병을 물고 누워 있다면 어처구니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인입니다.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든지 석가나 공자나 마호멧이나 다 똑 같습니다. 누가 됐든지 따르는 사람입니다. 다 착하고 진실하게 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아무 종교나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사람은 기독교에 걸렸으니 교회로 온 것이지 불교가 걸렸다면 불교로 갔을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과는 관계없습니다. 거듭남과도 관계없습니다. 단지 사람들과 사귐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기복적인 사람입니다.
헌신하거나 희생하거나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매우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교회에 안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리’였습니다. 오늘의 ‘교인’의 부류에 속한다고 봅니다.
무리들도 주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무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무리들도 기적으로 주신 식량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삶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한 부자 청년을 보세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예수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계명도 잘 지켰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네 이웃 불우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말하자 그는 재산이 아까워서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기를 원하지는 않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 역시 주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단 한 마디도 재산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삭개오 스스로 자기 재산에 대한 입장을 밝혔을 뿐입니다.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삭개오가 이미 자신의 삶을 바꾸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을 따라 변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라 가치관이 변하고 사상이 변해야 합니다.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외모가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관, 가정관, 물질관, 직업관, 인간관, 국가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모든 생각, 모든 그릇된 생활 방식이 바뀌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께 항상 병을 고쳐달라, 먹을 것을 달라, 귀신을 내어쫓아달라는 육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을 먹이실 때 그 따르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하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들은 단지 떡 얻어먹고 배부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전도의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일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훈련되지 않은 교인이끼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신앙인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자신의 삶, 사업, 가정이 편안하고 잘 되는 형통을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에 대한 설교를 좋아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믿고 부자되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직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이런 교인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빨리 거기에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신자입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거룩함을 압니다. 죄사함의 감사도 압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은사도 체험했습니다. 십일조도 바칩니다. 성가대도 합니다. 교사도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이 세상을 마쳤을 때에는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봉사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전도하지 않습니다. 희생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dlm 부류에 속합니다.

세째는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교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는 신자가 아니라 제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인에 머무르지 말고 신자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인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 많은 제자들 중 자신이 원하는 자, 자신과 삶을 함께 하고 자신의 모든 사역을 맡길 자 12명을 따로 뽑으시고 훈련을 시킨 다음에 훈련받은 12제자들에게 복음 전파, 귀신 축출, 병 고침의 능력을 주시고 전하라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다수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였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하시고 세상을 복음화 시켜 나가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끈기 있게 기도하다가 오순절날 120 문도와 함께 약속한 성령을 받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12제자 중에 또 핵심제자인 세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더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셔서 3제자에게만 새로운 이름을 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데, 변화산상에서 변화되는 곳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웨슬리도 그런 목회를 했습니다. 웨슬리는 은혜받고 성령 충만 받은 연합신도회(Society) 즉, 평신도들 약 30여명 중에서 10-12명의 속도를 구성했습니다. 속회를 이끄는 속장은 자신의 속원을 최소한 1주일에 한번씩 개별심방, 적절한 충고, 권면, 위로, 책망을 해주고, 속장들은 주 1회 목사를 만나 속원들의 자세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웨슬리는 속원들 중 철저한 신앙인으로 헌신되기를 사모하는 이들로 신도반을 조직하고 2-3개 속회에서 하나의 ‘신도반’이 형성되었습니다. 핵심 제자 훈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훈련받기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자신을 복종시켜서 주님의 제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나와 자리만 채워주는 교인, 무리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리’였습니다. 제자는 소수였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교인(무리)와 제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제자는 주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자입니다. 심지어는 부모나 친척, 자기 자신 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제자란 가르쳐서 훈련된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교인은 많지만 제자 된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때로는 자기의 취미도, 자기의 개성도, 자존심도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제자는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면 주님께서 제자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1)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2) 모든 병과
3)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냥 교인으로, 신자로 살아가는 분들은 주님이 주시는 권능을 체험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능력의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리로 사시겠습니까? 제자로 사시겠습니까?

2. 제자로 사는 길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제자의 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것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富)를 쌓기 위하여 과대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부하게 하시기 위해 도리어 가난해지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을 위하여 가난 해 질 수 있는가? 주님을 위해 가난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찾으며 훌륭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서민들의 삶의 목적이 내집 마련인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집’에 대해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일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조차 둘 곳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8:20). 예수님의 우선 순위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는 흰 토끼와 검은 토끼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흰 토끼와 검은 토끼가 날마다 싸웁니다. 흰 토끼가 이기면 평안하고 검은 토끼가 이기면 몹시도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검은 토끼가 죽겠습니까? 검은 토끼가 좋아하는 것을 주지 마십시오. 그려면 굶어 죽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골라서 살아가면 저절로 죄악은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 모든 것들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보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와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어서 결국 그것은 우리를 쓰러지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첫번째 자리에 놓을 때 우리는 더 좋은 자녀가 될 수 있고, 남편으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내 사라와 상의 없이 즉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합니다. 모리아산에 가서 아들을 결박하고 칼로 목을 칠려고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3.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요즘 공짜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짜라는 것은 사탕발림입니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는 것을 좋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공짜입니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예수를 믿어도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라야 합니다. 영어로 ‘제자’(disciple)라는 말은 ‘훈련’(discipline)이란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훈련은 곧 고난과 수고를 동반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3).“자녀는 태어나지만, 제자는 훈련으로만 된다”고 합니다.

본문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내 십자가는 너무 무겁습니다. 조금 가벼운 것으로 바꿔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한 방으로 데려갔는데 그 문을 열자 그 방은 여러가지 모양의 십자가로 꽉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 십자가를 아무 곳에나 내려놓고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선택하여라” 이 사람은 신나서 이것 저것 골라보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크고, 또 어떤 것은 등에 배기고, 또 어떤 것은 너무 넓고 . . 그러다가 한참 후에 마침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십자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예수님 이것이 마음에 듭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주셨더라면 이러한 번거러움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웃으시면서 ‘네 십자가를 자세히 들여다 보아라’ 하기시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다시 고른 그 십자가는 지난 수년동안 자신이 지고 다니던 바로 그 십자가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어떤이들은 항상 불평하며 감당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주를 따르는 자만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513)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찬송365) 내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기쁨으로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삶 그것이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제자의 길이기 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고난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기독교의 영광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고난을 피해서 로마를 도망쳤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고 그 앞에 나타나신 주님께 묻습니다. “Quo Vadis,Domine?”(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여,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말은 유명한 영화의 제목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고난의 멍에를 벗기 위해 도망친 로마로 가서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러 가노라’. 그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자신이 도망쳐 나온 로마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가 순교할 때에 자신이 어떻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느냐며 거꾸로 달리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외면하는 교회라면 주님의 교회가 아니며 주님의 제자도 아닐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고 말씀하십니다. 직분을 팽개친 사람, 사명을 팽개친 사람, 십자가를 땅에 내려놓은 사람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은 상관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가는 바른 길입니다.
자신을 돌아봅시다. 혹 당신은 교인인 정도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명령에 귀 기울이십시오.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제자는 입으로 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무엇 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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