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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한될 수 없는 감사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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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철 목사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 (요한복음 12:3)

어린아이가 열 살이 되면 대략 6,000개의 낱말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말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고, 성인이 되면 평균 25,000단어를 알게 되는 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단어 역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자의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 쿨리지는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이 되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보는 영적 지혜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로 찾은 것이며,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라는 작자미상의 시는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는 깊은 깨달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비록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바라시던 그 모든 것을 주셨으니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H. 스펄젼 목사님은 “밤하늘에 별 주심을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 주심을 감사하면 더 큰 햇빛을 주시고, 더 큰 햇빛 주심을 감사하면 이젠 햇빛도 소용없는 천당을 주시네”라며 감사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해야 할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는 축복자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는 그의 언니 마르다와 오빠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집을 즐겨 찾으셨습니다. 이들의 가장인 오빠 나사로가 죽자 예수님은 무덤까지 찾아가 죽은지 나흘이나 된 그를 살려 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마리아는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그들을 다시 방문하시고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무시게 되자,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곁에서 열심히 시중을 들었고 나사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주님과 함께 식탁의 음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마리아는 300일의 인건비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 어치의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은 제한이 없는 감사였습니다. 낭비하는 감사요, 넘치는 감사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감사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이 감사를 예수님은 귀히 여기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마리아의 감사사건은 아름답고 귀한 일이며 기억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를 제한하는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가룟 사람 유다의 비난에서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12:5)

왜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헛된 낭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사의 세계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 자기주장일 뿐이었습니다. 감사하는 행위 속에 있는 감사의 참된 감격과 기쁨을 보지 못한데서 나타난 오해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하여 마리아의 감사를 그대로 두고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감사를 제한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감사를 제한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감사는 낭비하게 하는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은 감사가 낭비하는 사랑의 역사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나타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감사의 역사는 바로 낭비하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감사는 사랑을 받는데서 사랑을 주는 응답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가 응답하기에는 너무 큰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에 대한 감사는 낭비하는 감사로 드러납니다.

바울은 본래 기독교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드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제사장의 명령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에 다메섹으로 향하는 중에 빛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후부터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지음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기쁨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으신 그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전도자로 내놓은 낭비하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낭비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낭비하며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낭비하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낭비하는 감사는 더욱 큰 사랑을 만들고 하나님의 더 큰 기쁨과 축복의 역사를 만듭니다. 이 낭비하는 감사를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마리아를 축복하셨습니다.

감사는 이웃을 돕는 공의를 세워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제한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감사 없이 이웃을 돕는 공의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이웃을 돕는 공의를 세워주는 능력이 됨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감사의 역사를 제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사는 이웃을 돕는 공의를 역행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감사는 오히려 이웃을 돕는 공의를 더욱 크게 해 줍니다. 감사가 넘칠 때, 이웃을 돕는 공의로움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왜 낭비하느냐며 이웃을 돕는 공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감사의 역사를 깊이 깨닫지 못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유다의 공의는 감사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웃을 돕는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모습에서는 이웃을 돕는 어떤 모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어라.” (요12:6)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여행해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낯선 느낌은, 그들은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혁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회공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개념을 살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며, 프로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조아 때문이라고 하고 사회가 혼란한 것은 기득권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기득권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다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혁명에는 원망과 함께 누구 때문이라는 책임전가의 주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적으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나 아닌 그 무엇, 이를테면 사회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투쟁하려 합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기에 그 공의는 하나의 기존 집단과 대립된 또 다른 집단의 이득을 만들어 내어 결국 병든 공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공의는 자기이해의 득을 찾으려는 공의이고, 자기의 명예를 세우기 위한 위선만을 보여 줍니다.
감사는 이웃을 돕는 바른 공의를 세워주는 역사입니다. 감사는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 이전에 하나님께 낭비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상대방의 입장에 있는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제한하지 못하게 하심은 감사는 감사의 대상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감사를 제한하는 것은 감사를 받는 대상보다는 자기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비난하는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막14:6,새번역)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막14:8,새번역 )

마리아의 감사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인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감사를 제한한 유다는 예수님의 입장보다는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감사는 내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사할 대상의 입장에 있는 것이기에 낭비하는 감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감사는 감사의 대상인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감사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낭비하는 감사였습니다. 그녀의 감사는 향유를 부어드리는 희생이었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여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최고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겸손으로 경배하는 감사였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감사는 사랑의 감사였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이 감사를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 마리아의 감사는 예수님의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는 감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막14:9)

1997년 10월 11일 밤 10시쯤 서울 성수동 주택가 골목에서 만취되어 잠들어 있던 주인 김모씨를 돌보아 주었던 ‘영자’라는 혼혈 진돗개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며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날 이 개는 술에 만취되어 잠들어 있던 주인을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옷깃을 물고 흔들며 연신 얼굴을 핥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 파출소로 김씨를 옮겼고, 이 개는 파출소 소파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잠든 주인의 곁을 지키며, 새벽 5시 30분 깨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개는 그 이전 5일에도 성수여중 부근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김씨를 온몸으로 감싸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 ‘영자’라는 개는 다세대 주택 2층에서 혼자 살고 있는 김씨의 유일한 가족으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였고, 주인의 술 주정에 꼬리를 잘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개가 주인을 떠나지 않고 주인의 생명을 구하고 돌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미물의 짐승인 개도 주인을 알거든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우리의 주님 에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는 제한될 수 없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낭비하는 감사는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하는 풍요한 삶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제한하지 않는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더욱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을 소유하십시다. 감사를 제한하지 않음으로 풍요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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