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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있으라 (막 13: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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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역사는 결코 우연히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마치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 바늘이 돌고 있으나, 그 시계바늘 자체가 도는 것이 아니라, 글자판 뒤에 숨겨져 있는 기계들이 그 시계 바늘을 돌리고 있듯이, 인류 역사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연히 또는 갑자기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하여 예언하시고, 그 예언을 성취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진행해 오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더욱 분명한 것이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그들의 흥망성쇠는 그때그때마다 생겨진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외치는 예언과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더욱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고,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 예언과 성취가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고, 그분의 생애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언급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죽으심과 부활까지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린 그 이루어짐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하신바가 다 이루어졌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 이루어졌다.”는 그 말씀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 가운데 아직 하나님 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것은 분명 말씀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허지만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다 성취되었듯이, 이 재림에 대한 말씀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입니다. 만약 예수 재림의 신양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본문 26절,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튼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27절, “그때에 그는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으리라.”
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대강절 바로 오늘입니다. 대강절은 강림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그것은 “오다”라는 뜻입니다.
이 강림절은 2천년 전에는 베들레헴에 오시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지만, 지금은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앞으로 다시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는 감격과 희망의 절기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한해 시작은 이 대강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기다리는 날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강절에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는 우리들은 2천년 전 탄생하신 예수의 의미도 되새겨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앞으로 다시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 때,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이지만, 그 당시 예수께서 오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자리를 내어놓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은 모른 척 했습니다.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가 왕이 된다는 말에 몰래 죽이려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오셨던 예수님은, 그러나 다시 승천하셨고,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대로 그분은 영광 가운데 반드시 오시게 될 것입니다. 대강절을 지키는 우리는 바로 “내가 속히 오리라”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로 가장 함축성 있는 교훈과 경고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에,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둑처럼 언제 올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인이 잉태하면 그 해산하는 날이 오듯이 반드시 그 날은 오다는 겁니다.

본문 31절에도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데, 그날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의 하라”고 하십니다.

“주의하라.” 뭘 주의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1-2절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 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성전이 무너지다니! 성전이 무너지는 것,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훼파 당했습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었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궁금하다 못해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보고 앉았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다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적그리스도 출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전쟁), 처처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을 것,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들이 부모에 대적하여 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재난의 시작이고, 환난이 지나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실제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하냐, 안 하냐 하는 것은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는 곧 혼돈의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1-14절에,  사도 바울께선, 지금은 자다가 깰 때요, 지금은 아직도 어두운 때요,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때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징조들이 깊어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려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예수님의 재림 가까운 때라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은 주의해야 할 때입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그런데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을 걸고 넘어뜨리는 수많은 일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마가복음 13장 21-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마 24:36-41)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때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습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 사도께선, 웬만하면 혼자 살아라 하시지만, 결혼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2-34절에, “나는 여러분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씁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로 인해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주님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깨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든 장가가고 시집가든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오신다는,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이 사실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 해야지요. 밭도 갈고, 맷돌도 돌려야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은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직장도 그만 둡니다. 내일 오시는 예수이신데, 그런데 몇 달 뒤에 수확하기 위해 뭐 하러 밭을 가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밭도 갈고, 맷돌도 돌려야 합니다. 다만 “무슨 일을 하든 깨어 있어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밭 가는데 깨어있어라.” “맷돌 돌리는데도 깨어 있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일을 맡기고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한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의 모든 재산을 그 종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나쁜 종은 주인이 더디올 거라고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십니다. 생각지도 않은 날, 뜻밖의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왔을 때, 그 주인은 종을 몹시 때리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살펴보면,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33절을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마가복음14장 38절에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럼 무슨 기도를 할까요?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이 코앞에 다가 왔다면 무슨 기도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오기 전에 돈이나 펑펑 쓰게 돈 많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실컷 먹고 놀고 쓰는 거지.” 그럴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기도하라 하셨을까? “내가 다시 오면 세상을 끝이다. 그러니까 실컷 먹고 놀고 즐기고 그러기 위해 기도하라” 그러셨을까? 그런 것 아닌 거 누구나 다 압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으니까요.

로마서 13장 12절,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하셨는데, 어둠의 행실이 무엇입니까?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하는 것,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 그런 것 들입니다.
빛의 갑옷은 입은 자는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5장 8-9절에,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에베소서 5장 15-20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것이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언제 주님 오실지 모르니까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달으십시오.”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탕은 꼭 죄짓고 돌아다니는 것만이 아닙니다. 될 때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도 방탕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시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요. 그리해야지요.
그래야 하는데……. 늘 주의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기쁨과 감격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그런가요?
우리 예수 오신다면 자신 있게 달려가 맞이할 수 있어요? 예수님 맞이할 자격들 있어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정말, 2004년 한 해 동안 아무 죄 없었어요?
마태복음 25장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주인님,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정말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일들을 내가 제대로 했나 생각 해 보면, 지금 예수님이 오실까 겁나요. 도저히 부끄러워서 그분 앞에 나설 수가 없어요.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는 예수님의 다정한 음성을 듣기보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런 노기 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까 싶어 두려워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낳고, 낳고…….” 그러면서 예수님은 족보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신앙 족보를 써 봅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을 써 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또 한 사람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은, 그래서 나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을 적어 보는 겁니다.
그런데 몇 명이 되나요? 몇 명이나 나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 받았나요?
초대 교회는 늘 “마라나타”하고 기도 했습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우두커니 앉아 기다린다는 것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오시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십시다. 일한대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모두 일하지 않아 아무 것도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어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1백만 원을 주셨어요. 그랬을 때 여러분이 10만원을 다시 예수님께 드리면 그게 여러분의 자랑에 됩니까? 50만원을 예수님께 다시 드리면,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겁니까?
사실 우리는 주님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 합니까? 그 주신 은혜로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했습니까?
100을 주신 주님 앞에, 겨우 50, 겨우 30, 겨우 10, 그나마도 드리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의 뜻대로” 말로만 외치고 늘 자기 뜻, 자기 욕심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무슨 배짱으로 “주님, 오시옵소서.” 기도하며, 무슨 배짱으로 구원과 심판으로 오시는 예수 앞에 서겠다는 겁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기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 고백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첫 번째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그 아가페는 온 인류를 죄와 사랑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그렇게 날 사랑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신 겁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필리아” 입니다. 그것은 스승으로서의 사랑 입니다.
두 번째 물으신 예수님의 물음도 “아가페”였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널 사랑하듯 너도 날 사랑 하느냐?” 베드로의 대답 역시 “필리아”였습니다.
세 번째 물으신 예수님의 물음은 “필리아”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날 스승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 역시 “필리아”입니다.
여기,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는 베드로의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엄청난 사랑. 우리가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저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고 물으시면, 전 감히 그분 앞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무 죄도 없으신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라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수많은 조롱과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사랑을 주신 그분께 “제가 주님은 사랑합니다.” 차마 그렇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요. 구원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이하는 것도 우리가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은혜로 사는 겁니다.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 그들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는 떳떳함이 아닙니다. 당당함도 아닙니다. 겸손과 부끄러움 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 입니다. 만약 주인이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는데 그렇게 남겼다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당당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사랑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최선을 다한 겁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는 겁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있어 그것이 감사해서 최선을 다하는 겁입니다.
달란트, 그러니 돈이나 재능으로만 생각하시는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 입니다. 우린 그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도 주님 앞에 나가면 부끄러운 겁니다.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울 뿐입니다. 오시는 주님 앞에 나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주님, 죄송합니다.” 그 말씀 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오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또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시금 다짐 하는 겁니다.
다시금 결단하는 겁니다.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다짐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 그 절망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주시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왜 낙심하여 고향으로 가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왜 그랬느냐? 왜 그렇게 살았느냐? 책망하시기보다, 이제부터라도 이렇게 살라고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다시오시는 예수, 이미 여기에 오신 예수! 그분 앞에서 지나온 삶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조용히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온 삶을 회개하고, 새롭게 다짐하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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