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늘에 내일을 심어라 (마 6:33-34)

  • 잡초 잡초
  • 253
  • 0

첨부 1


- 설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오늘 강변교회 강단에 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강변교회는 ‘아기자기하다’‘오손도손하다’라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김 목사님이 10년, 20년 전에는 저 같은 사람 알기를 '마귀새끼'라고 알았을 겁니다. 그렇지요?(웃음)  그때 제가 ‘좀 지나보십시오. 다 알고 나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제일 많이 전화로 접촉하고 만나는 분이 김 목사님입니다. 저 욕한 것 후회하시지요? 라고 가끔 물어봅니다. 저도 옛날에 좀 미워했던 것 후회합니다(웃음). 저를 너무 비판하셔서요.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세월이 지나면서 사고 방식도 바뀌고 인간의 폭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렵게 살 때는 신앙의 폭도 좁았습니다. 우리는 좀 더 커야 합니다. 웅덩이를 더 넓고 깊게 파야합니다. 교회도 깊고 넓어져야합니다. 바라기는 강변교회가 이 한 축을 담당하고 경동교회도 힘을 합해서 담당 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지요. '아침 형' 인간.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맨 날 일만하고 살면 언제 쉽니까? '저녁 형' 인간도 있습니다. '아침 형' 인간은 낮의 인간이라는 뜻이고 '저녁 형' 인간이란 밤의 인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둘 다 좋은데 밤과 낮 사이를 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새벽 형' 인간입니다. 새벽은 밤이 끝나고 동시에 낮이 시작하는 기점입니다. 끝과 시작이 만나는 시점이 새벽입니다. 지나간 밤은 여기서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낮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새벽이 중요하고 새벽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방하면서 어느 믿지 않는 분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암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그의 아들 내외가 찾아와서 자기 아버지가 죽기 전에 성경공부도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제가 찾아 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아신교'(我信敎) 신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만을 믿던 그가 자기에게 암이 찾아오자 자존심도 완전히 죽고 아신교도 깨져 버렸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오버 브리지(over bridge)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인생 살다가 over bridge를 건너면 또 다른 생이 있는데 그 또 다른 생은 무엇인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 다리를 넘으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그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시지요"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믿기로 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분의 십자가 죽음, 그것을 타고 가야 부활이 보장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고 세례 받고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다리가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세분 이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너무 혼탁하고 죽음의 함정에 빠진 것을 보고 이 세상 전부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 over bridge가 필요하다고 결정하시고 다리를 놓아 주려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것이 십자가라는 다리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다리입니다. 죄 된 옛 역사가 끝나고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다리, 옛것이 끝나고 새 것이 시작하는 곳, 세상 나라는 가고 하늘 나라가 시작하는 그 지점, 새벽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그 지점,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무엇으로 입증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잉태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날마다 오늘이 십자가의 날이요, 부활의 미래가 시작하는 날이요, 오늘이 매일 새벽이 되어야합니다. 십자가의 새벽을 권해드립니다.

  제가 30대에 독일에 가서 한 10년을 지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죽인 가스실에 자주 안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스실을 나오면 철조망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가스실에서 살아 나온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내용은 포로수용소에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철조망만 바라보고 절망한 사람은 하루씩 하루씩 죽어가다가 해방되기 전에 전원 죽었고, 철조망 너머에 있는 들국화를 바라보면서 아침을 맞이했던 사람에게는 그 들국화가 희망이 되어 전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어려운 현실 뒤편에 있는 가냘픈 실 날 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죽는 법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면 십자가는 아픕니다. 아픈 십자가 속에 영원한 불빛인 부활이 잉태하고 해산의 고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 하나로 저는 살아갑니다. 

  제가 김 목사님한테는 이야기 합니다.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오손 도손 한 강변교회와 꽉 짜인 경동교회가 상당히 다르지만 우리는 이 십자가 다리를 건너는 부활의 영광을 모두에게 맛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같이 뭉쳐 보고 싶습니다. 사람 몸도 좌우가 있어서 기능을 잘 하고 있습니다. 밤과 낮이 있듯이 좌, 우도 있고 진보, 보수도 있는데 문제는 둘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한 몸에 붙은 지체로서 기능을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몸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서 같이 가는 것을 지킨다면 우리 나라는 복을 받습니다. 같이 모여서 큰 틀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하지만 한 통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제가 느낀 선진국입니다. 저는 늘 우리 사회가 오케스트라 같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휘자는 예수 그리스도신데 성경말씀을 악보로 삼고 성령의 지휘를 받아 같이 하면 교회는 신앙의 오케스트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일을 맡겼습니다. 그 희망이 오늘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음악을 잘 하시는 분, 그림을 잘 그리시는 분, 말씀을 잘 하시는 분, 마음씨가 좋으신 분, 죽기 전에 몽땅 쓰고 가십시오. 재산을 가지신 분도 없는 분에게 나눠 주십시오.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찬송을 하십시오, 봉사도 그렇게 하십시오. 갈 때는 모든 것을 놓고 갑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도 놓고 갑니다. 하늘의 부유함 때문입니다. 질병을 놓고 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없애 주십니다. 좋은 것만 아니라 나쁜 것도 다 놓고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저는 에덴동산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 그 어려움을 지나면서 인생의 진미를 깨닫는 것, 기쁜 일이 있을 때 가족끼리 모여서 찬송하는 것,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면 아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도 없거니와 돼 봤자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보 같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세계 속에 선악과라는 하나님 나무가 지금도 옆에 있고 그 옆에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쓸데없이 선악과를 먹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청지기가 되어서 실컷 먹고 쓰고 봉사하고 기쁘게 살다가 놓고 가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잘 말 해 주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산꼭대기에 양 한 마리만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 두 양이 양쪽에서 서로 버티고 서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둘 다 살 수 있겠습니까?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엎드리고 그 위로 지나 간 후에 다른 한 마리가 지나가면 산다는 것입니다. 엎드리면 둘 다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의 원인은 엎드리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엎드려야 합니까? 가진 자가 먼저 엎드려야 합니다. 힘 있는 자가 먼저 엎드립시다. 아는 자들이 먼저 엎드립시다. 신앙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먼저 된 자들이 엎드려서 우리를 지나가게 하면 우리도 살고  win-win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골고다 언덕에서 엎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들은 삶의 귀감이 되는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양17마리를 가진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세 아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17마리 중에 절반을, 둘째 아들은 3/1을, 막내에게는 9/1을 상속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세 아들들은 나누어지지 않는 숫자 때문에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옆 동네에 양 1마리만 상속받은 어떤 가난한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자기의 양 1마리를 싸우는 형제들에게 그저 주었습니다. 세 아들들은 그제 서야 큰 아들은 9마리, 둘째 아들은 6마리, 막내 아들은 2마리를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모두 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왜 세상이 전쟁이 있고 갈등이 있는 줄 아십니까? 나누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누는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욕심 때문이지요.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합쳐서 18이 되어 다 나누시고 하시는 말씀“나를 따라 오너라”하십니다. 그러면 세상도 바뀌고 가정도 바뀌고 구원을 받습니다. 다 이런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지혜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미래를 앞 당겨서 맛보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늘 그런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시간의 장소는 십자가라는 장소입니다. 부활이 예비 된 장소입니다. 

  오늘은 내일의 시작입니다. 오늘 속에 내일이 움트고 있습니다. 한 알을 뿌립시다. 각자 한 사람씩 일하시면 강남이 뒤집어 지고 강북도 뒤집어 집니다.  이 나라가 다 구원을 받습니다. 문제는 서로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다. 이 결단을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하십시오. 지금 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