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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래로부터의 기적 (막 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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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채수일 목사 (한신대신학전문대학원장)
               
1. 지금부터 2천년 전, 로마 제국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먹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의 부를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호화스런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해방된 노예들이나 마시는 거친 포도주와 음식을 먹는 이른바 내적 절제의 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이 두 가지 먹는 방법에는 그러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깊은 계급적 골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해방된 노예와 주인 사이에도 깊은 골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111년에서 112년 사이에 비티니에서 고문당한 두 명의 여자 노예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어떤 신에게 찬양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찬양하며, 청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공동으로 식사를 실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대 신앙공동체의 특징의 하나가 이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임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먹는 방법은 달랐습니다. 초대한 사람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을 천대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식사나, 부유하지만 내적 절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해방된 노예들이 마시는 질 나쁜 포도주를 마시는 식사와도 그리스도인의 식사는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에는 음식의 질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초대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해방된 노예냐, 여자냐, 어린이냐, 부자냐, 가난한 자인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참여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먹는 방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많은 생활양식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다던가, 품위 높은 가문의 여성이 해방된 노예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 일이라든가, 청렴성, 직업생활에서 속이지 않는 것 등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먹는 방법에서 그리스도인은 철저한 평등성을 지켰다는 것이 이들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별했습니다.

2. 이런 전통은 물론 예수님의 먹는 방법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먹는 방법에 대한 보도는 복음서에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삶의 일부는 어쩌면 먹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처음부터 부활사건에 이르기까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마 4,3).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절망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분이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가, 그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눌 때, 비로소 그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눅 24,30-31).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던지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 11,18-19)라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은 일(마 12,1-8)에서부터, 결혼잔치에서 술이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요한 2,1-1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겨자씨(막 4,26-29), 누룩 등이 등장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는 일은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일의 하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요 6,41; 6,48)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세상 끝까지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새로운 약속을 축하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5병 2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본문은 네 복음서 모두에 전승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당한 후,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피한 예수님에게 소식을 들은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무리를 예수님은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눅 9,11).

날이 저물자 끼니를 걱정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 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흩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갑자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을 선생님은 모르시나?”

“우리 목구멍도 채우지 못하는 판에 이 많은 사람들을 무슨 돈으로 사 먹인담?”

“어디 혹시 숨겨 논 비자금이라도 갖고 계신가?”

사정을 모르는 것 같은 예수님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당시 현실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이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하시자, 그들이 알아보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 빵과 물고기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공관복음서에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요 6,9).

보리 빵은 유대인 식사의 주성분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굽거나 소금에 절인 물고기도 바닷가에서는 대체로 빈약한 반찬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을 떼를 지어 풀밭에 앉게 한 후,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를 받아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는데,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3. 이 ‘5병 2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기적능력을 입증하는 이야기로써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까짓것 빵과 물고기를 늘려서 5천명을 먹이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우화적으로 해석했는데, 떡 다섯 개는 모세 5경, 열두 광주리는 열두 사도로, 물고기 두 마리는 시편과 예언서 또는 복음서와 사도 서신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 설교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이 복음으로,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인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본문 전체를 도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 이야기를 “복음의 설교라는 양식으로 군중을 먹이도록 사도들에게 보여준 모범”이라고 봅니다. 칼뱅은 그리스도가 육신적인 일을 돌보는 데까지 목자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의 확증으로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이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을 기꺼이 나누어주자, 다른 사람들도 주머니에서 각자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내놓아 모두 배부르게 먹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5병 2어의 기적이야기’를 기적으로 볼 것이냐, 설화로 볼 것이냐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본문이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먹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먹는 방법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었고, 바로 이 먹는 방법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먹을 것을 사러” 보내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쳐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놀랬지만 제자들은 군중을 위해 빵을 사러 갈 준비를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야 했습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느냐?”

  그 때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문제가 단순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나누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한 형식의 경제, 아니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다”와 “나누다”의 대조는 오직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배고플 때, 빵을 사먹을 수 있는, 교환가치에 근거한 사회적인 모든 관계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매우 적은 것일지라도, 나눈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먹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의 경제위기의 배경에는 교환가치에 근거한 시장논리의 지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시장으로 통합니다.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없는 것,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부도난 기업의 어음만도 못합니다. 인간관계까지도 매매법칙이 지배합니다. 이 시장 안에서는 무한경쟁의 법칙만이 지배하고,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소외와 차별은 생물학적 운명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식탁에는 누구도 소외될 수 없습니다. 이 식탁에는 모든 사람이 초대받습니다. 이 밥상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세상에서 굶주리는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누는 것에 이르기까지 평등한 밥상공동체의 실현은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에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원하셨다면,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곧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이미 돌로 떡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한 어린이가 자기가 가진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소금에 절인 두 마리의 생선을 내놓지 않았다면 과연 예수께서 기적을 베풀 수 있으셨을까? 물론 예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기적을 만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어린이가 아니었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위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덩이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넘었다면 이것은 이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양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감사했습니다. 무슨 감사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로 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킬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했을까요? 기적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는 기적을 만들도록 위탁받은 제자들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생명을 살리거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살림, 곧 기적은 우리가 가진 것, - 그것이 돈이건, 밥이건, 관심이건, 사랑이건, 정보건 연대건 간에 - 모든 것을 나눌 때, 자신의 처지를 먼저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필요에 전적으로 자신을 바칠 때 만들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됩시다. 광야 같은 이 세상 안에서 생명의 샘 같은 기적을 만들도록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초대에 우리가 아멘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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