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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눅 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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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오늘 말씀의 제목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주 성령께서 오늘의 주인공 시므온에게 주신 말씀인데요, 놀랍게도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죽을 수 있다는 뜻이요, 뒤집어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보기 전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꼭 기억하기고, 이번 성탄절을 주님을 직접 뵙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말씀 중에 <보다>라는 동사가 있군요.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만큼 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인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볼 수 있음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내가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복중의 복입니다. 그러나 평소 우리는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감사는커녕 내가 볼 수 있음을 그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모든 것이 또한 당연할 뿐입니다. 그런 채로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 성령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그리스도를 직접 뵙기 전엔 죽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죽지 못하는 인생, 최악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번 대림절을 넘어 성탄절에 이르도록, 꼭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의 의미와 특징을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본다는 것, 그것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보는 일,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시선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아주 멀리까지 날아갑니다. 나의 눈은 단숨에 어디든 달려갈 수 있습니다. 남산에 올라 서울 시가를 한번 훑어보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 거리를 젤 수조차 없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도 한 순간이면 가능합니다. 내가 눈을 감았다가 뜰 시간만 있으면 난 무엇이든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은, 내가 눈을 뜨기만 하면 이내 그것은 나의 눈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 그것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본다는 것의 두 번째 특징은 내가 본 그것이 곧 나의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내가 믿겠다! 말만 듣고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귀로만 들어서는 믿지 못하겠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보아야 믿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본다는 것이 곧바로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합니다. 무엇인가 보는 일, 그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요, 동시에 나에게 믿음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하여 내가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 복 맞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볼 수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2

하지만 본다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보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정말 내 눈이 보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건가?>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느끼고 판단한 것을 그대로 다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볼 있는 세계 보다 볼 수 없는 더 세계가 더 넓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물을 목격한 두 사람의 판단 결과나, 같은 사건을 목격한 두 사람의 해석 결과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해서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내 눈으로 본 것이라 해서 그것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얼른, 예수님 살아 계실 때 그 분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들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뵈었으니, 저들은 100% 그 분을 믿고 따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고 그 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지금 쳐다보면서도, 감동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박해하며, 심지어 그 분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저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분이 어떤 분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는 것이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보는 것의 전제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보았다고 그것이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얼마든지 잘못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믿음의 눈으로 본 것만이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눈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믿음의 눈이요, 다른 하나는 의심의 눈입니다. 해서 눈 이전에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일단 의심이 생긴 사람의 눈에는 믿지 못할 것들만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자기 눈으로 저 위대한 사도 바울을 직접 보면서도, 저를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요 염병 같은 사람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의심의 눈을 가진 사람들의 시선의 끝은, 자꾸 지옥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의심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늘 불안하다는 겁니다. 믿지 못하니 불안할 수밖에요, 해서 의심의 눈을 가진 사람들, 그 인생이 참으로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몸의 눈으로 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일단 믿음이 생긴 사람의 눈에는 믿음의 세계가 보입니다. 일단 믿음의 눈을 뜨기만 하면, 단숨에 천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나를 단숨에 어디든 데려다 줍니다. 우린 믿음의 눈으로 에덴동산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만 뜨면 홍수 너머의 무지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만 뜰 수 있다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어 계신 아기 예수님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믿음의 눈은 언젠가 내가 돌아가게 될 저 영원한 나라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해서 우린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오늘을 이겨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을 가진 이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 3

이렇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릴 줄 안다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 그 소망이 이루어주실 줄 믿기에, 그 날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대망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혹독한 세월을 오직 기다림 하나로 견디어 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믿음 하나 가지고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누가 선생님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2:25 / (읽기) / 그랬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어 수사법을 감안하여 풀어 설명하면, 이 노인은 일부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랬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을 지키며,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의 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기다림, 더 이상 현대인들의 삶 속에 매력 있는 미덕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네 한국 사람들, 기다리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기다리다 심각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시므온은 한두 해도 아닌 평생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들고, 그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직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인물, 하여 오늘 우리는 시므온을 다시 만나, 2004년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 4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시므온의 마음엔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해서 25절에 보면, 시므온을 가리켜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기다리는 자 시므온이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든지, 주 성령께서 이렇게 약속해 주실 정도였습니다. 26절인데요,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므온을 어여삐 여기사,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곧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그를 데려가지 않겠다는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기다림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여 마침내 성전에서 존귀한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다가다 만난 예수님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보며, 오래 기다린 끝에 만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이 더 복 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다림 없이 만나게 되는 만남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 없이 다가오는 성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성탄은 다시 다가옵니다.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문제는 내 마음 속에 기다림이 없는 경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나하고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다림이 없기에 성탄절이 그저 달력에 빨간 색으로 칠해진 한 날일 될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언젠가부터 우리 마음속에 성탄에 대한 기다림이 사라진 듯 합니다. 해서 우리 성도들의 기다림 속에 다가오는 성탄절이 아니라, 거리의 상점이나 백화점에서 울려 퍼지는 성탄 캐롤을 타고 성탄절이 다가오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성탄절이 너무 상업적이 되었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오히려 성탄절을 조용히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아무런 장식도 하지 말자, 아무런 행사도 하지 말자, 그저 조용히 보내자는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이러다가 아예 기쁜 성탄절을 세상에 통째로 빼앗기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입니다. 주의 백성하고는 상관도 없이 얄팍한 상혼으로 얼룩진 빛바랜 성탄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입니다.

아니오, 그리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성탄의 소식은 우리 인류에게 주신 가장 기쁘고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 성도들이 일년 중 가장 목소리를 높여 주님의 오심을 찬양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고 기쁨으로 전하고 또 전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자에게만 성탄은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성탄, 곧 그리스도의 오심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축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참에 아직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당신에게 우리 주님을 꼭 소개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로,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어려서 새벽 송 돌면서 나누던 성탄 인사 한번 하고 갈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 5

시므온에게서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은, 그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되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역시 2장 25절인데요,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자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기다림의 동기와 목적이 분명하군요. 그랬습니다. 시므온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다린 것 아니라, 그 어느 때 보다 하늘의 위로가 필요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절은 즐겁고 행복한 계절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무너져 내린 조국, 무너져 내린 성전, 완전히 짓밟힌 선민의 자존심, 그 한 복판에서 시므온은 쓰라린 가슴을 안고 오직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 속엔 자기 동포 이스라엘이 위로 받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이 백성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분,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노익장의 동포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탄의 의미가 개인적 지평에서 민족적 지평으로 확대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한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 전체의 구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여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주의 위로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성탄절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소중한 계절이라 하겠습니다. 왜?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절을 지내는 이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의 위로가 필요한 우리 동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절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제단 마다 주님 앞에 달려 나와, 이 땅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믿음의 경륜이 높으신 노익장 어르신들께 간곡하게 부탁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하늘의 위로가 없이는 새 해를 맞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어르신들의 기도가 없이는 넘어가기 힘든 고개인 것 같습니다. 부디, 더욱 뜨겁게 기도해 주시되, 이 땅 이 백성들에게, 오시어 위로하여 주시고, 새 힘과 새 소망을 주십사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경건한 삶으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므온을 다시 만나 배워야 할 두 번째 사항입니다.

# 6

2:29 / (읽기) / 같은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풀어줍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제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한가? 30절에 그 답이 있군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그랬습니다. 시므온이 이제 자기 눈으로 주의 구원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이 생명 불러 가셔도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의 마지막 모습은 그토록 평안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왕에 믿기로 한 것, 단 하루를 믿어도, 오늘 죽어도 좋다는 그런 믿음으로 멋지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쩨쩨하게, 옹졸하게, 미지근하게, 이도저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믿지 마시고, 내 오늘 죽어도 좋다는 그런 배짱으로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일,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 만나지 못하면 이런 고백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므온은 강보에 쌓인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뿐인데, 이미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 본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3년 동안 수업을 받은 후도 아닙니다. 그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찬송 한 자락 불러본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실 구원의 역사, 반드시 허락하실 승리의 역사를 믿었기에, 힘든 오늘을 살면서 천국의 기쁨을 가불하여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31절을 보면,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역사가 된다는 믿음으로 그는 이미 승리했던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이미 승리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4년 성탄절에 천국이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성탄의 모습 대신, 여전히 상업화되고 타락한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 다시 오시는 우리 주님의 구원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앞으로 펼쳐질 위대한 구원 역사를 내다보시기 바랍니다. 우린 이기기로 예정된 주의 백성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실망한 영혼, 방황하는 영혼, 위로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다가가 우리 주님 곧 오신다고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장 32절의 말씀을 성탄 선물로 미리 드리고 싶습니다. / 2:32 / (읽기) / 거기 빛과 영광이란 단어에 표시하십니다. 그런데 어디를 비추는 빛이라고요? 이방을 비추는 빛! 그 빛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으로부터!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 곧 이스라엘의 영광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며,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계절, 하늘의 영광으로 충만하여, 온 세상을 비추는 환한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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