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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⑥ - 바른 믿음을 가지십시오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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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교회)

<서론> 예- 고등학교 탁구 선수들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는 ‘영적 성숙’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명이 없는 조화나 인형이 성숙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어야 자랍니다.

또 기초가 허약한 건물은 크게 서지 못합니다. 기초가 올바라야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성장은 조금 진전을 보이는 것같다가 그 다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 이상 성장을 이루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중 오늘 본문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본문이고 동시에 제일 많이 오해를 받는 부분입니다.

역사적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본문을 대할 때, 행함이냐 믿음이냐? 구원논쟁의 틀로서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 논쟁 가운데, 이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구원받는 다른 길이 있음을 증거해 주는 proof text처럼 오해를 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4:1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은 가능합니다.

여러분, 오늘 야고보서에도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로 든 아브라함이나 라합의 경우도 이들이 그냥 선행을 쌓아서, 수도를 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그랬습니까? 이런 흔적은 없습니다.

이들의 행함은 하나님께 순종이고 이 하나님께 순종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초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야고보의 주장을 논박하려고 한다거나 또 야고보가 바울의 주장을 논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게 주장을 한 것입니다.

왜 자꾸 이렇게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서로 대치되는 말씀처럼 오해를 하는가? 당연히 역사적 사건 때문에 그런데, 그 역사적 사건에서 믿음의 선배들은 왜 그러는가?

개뿔도 없는 주제에 기라성같은 역사의 선배들을 판단해서 죄송한데, 제 생각에는 이런 연유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논쟁이 붙으면 쉽게 자기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합니까? 거의 대부분이, 아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안하지요. 어떻게든 자기 주장이 옳다는 증거를 끌어대지요? 또 자기가 속한 집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 보셨습니까?

종교 개혁 당시의 카톨릭과 개신교 어른들, 그 이후로의 논쟁을 벌였던 신학자 어른들도 이러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장로교 목사하고 침례교 목사하고 세례냐 침례냐 논쟁하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틀렸다 이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것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생각, 태도가 얼마나 뿌리깊은 지, 자기중심적 생각과 태도를 벗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지 거듭 확인합니다.  그래서 논쟁은 가급적 피하고 정직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실천해가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확인합니다.

바울의 로마서와 야고보의 야고보서, 모순이 아닙니다. 선입견없이 대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만 된다는 주장과 싸우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방종주의, 믿기만 하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주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행함”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는 할례와 같은 유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지칭하고 야고보가 “행함”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웃을 돕는 사랑, 하나님을 따르는 순종을 지칭합니다.

바울은 구원의 근거, 신자의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야고보는 구원의 열매, 신자의 외적 행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서로 모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야고보서 2장의 문제시 삼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행위로 구원받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작 야고보서 2장이 문제삼는 것은 믿음이 진짜냐 가짜냐를 지적하는 문제입니다.

행함,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은 진짜고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임을 콕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 가짜 믿음을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말뿐인 믿음이고 또 하나는 지식에 불과한 믿음입니다.

먼저 말뿐인 믿음에 대하여 야고보는 지적합니다.

어제, 오늘 제법 겨울다왔지요? 찬 바람도 불고 얼음도 얼고. 이렇게 날씨가 차가와지자, 찰리 브라운과 그의 여자 친구인 리누스는 집 안에서 옷을 단단히 껴 입고 있고, 스누피는 텅 빈 개밥그릇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찰리와 리누스는 집 안에서 스누피가 얼마나 추울까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합니다.

“스누피는 옷도 없어, 바람을 막을 벽도 없네, 밥그릇도 비었어.. 스누피가 추우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돼.”

그리고 그들은 밖에 나가서 스누피에게 말합니다. “스누피야, 잘 지내.” 그리고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좋아합니다.

이 만화를 그린 챨스 슐츠가 어디에서 이 아이디어를 얻은 줄 아십니까? 바로 오늘의 본문, 야고보서 2장에서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약2:14-16>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찰리와 리누스처럼 믿음을 lip service로만 표현합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무지하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주도적이 되지 않거나, 자기가 인정받는 지위에 오르지 못하거나 혹은 보수가 많거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을 삯군 목자라고 합니다. 입에 뭘 물려주면 움직이고 안 물려주면 꼼짝도 안하고.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소명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전락시킨 신성모독입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따르는 도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지요. 예수님 따라 거룩한 희생을 드리는 영광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명확히 말씀하셨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참된 믿음의 열매, 행위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참된 믿음이 있는 증거이지, 은사와 능력이 많은 것이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분, 혼돈하지 마십시오.

말은 값싼 것입니다. 포르노 잡지를 제일 처음 만든 사람, 그래서 떼돈을 번 사람, 허슬러(Hustler) 잡의 편집장, 레리 플랜트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번은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기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포르노 사진을 찍고 잡지를 만듭니다. 그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스스로도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에 속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안목으로 사람의 중심을 다 꿰뚫어 보십니다. <삼상2:3>에 보면, 한나의 기도 가운데 흥미로운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심히 오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교만한 말을 너희 입 밖에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중심의 마음은 결국은 태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써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삶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혹시 내 자신은 그리스도인라고 믿고 있는데, 당신이 사는 삶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지는 않습니까? 이기적 동기, 이기적 목적, 우월의식을 추구하는 것,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오르고, 성질대로 살고 똑같지 않습니까?

혹시 똑같다고 느껴지거나 생각된다면, 행동을 잘 보여서 나를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위장하려고 하지 말고 내 믿음은 바른 믿음인가 확인해 보십시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히라”

두 번째로, 야고보가 지적하는 속기 쉬운 가짜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 그치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그 지식에 내가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적하는 것이 <19절>이지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까?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 사실은 알고 두려워 떱니다.

귀신같은 믿음이라고 하지요. 지식적으로 다 알고 깨우치고 동의합니다. 귀신도 그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귀신이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귀신의 예를 들면, 귀신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신 줄 알고 두려워 떨면서도 그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존재입니까?

이유는 명백합니다. 하나님 말을 안 듣지요? 하나님을 따르지 않지요? 하나님께 순종 안하지요? 귀신이 삶을 살아가는 동기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듣고 자기 의로움, 자기 영광을 좇아 행동합니다. 그래서 귀신은 악한 영입니다.

유감스럽게 오늘날에도 귀신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다 압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인정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만유의 주인이신 것도 알고, 오늘날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도 알고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신학적 지식까지 정말 많이 압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 안 듣지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자기 의로움을 위하여, 자기 철학으로, 자기 고집으로, 자기 기분과 자기 성질로 살아갑니다. 꼭 귀신같이 살아갑니다.

사도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이런 사람의 믿음은 죽음 믿음, 헛것, 허접이 믿음, 가짜라고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믿음입니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 행함의 열매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름다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태어나서 생명이 있는 아기는 반드시 자라듯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믿음입니까? 하나님께 순종, 이웃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행함을 낳는 바른 믿음은, 이해하기 쉽게 구분하면,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회개하였느냐, 둘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 세 가지가 참된 믿음의 특징입니다.

가만히 보면, 믿음을 이렇게 말이나 지식의 수준으로 변질시키는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같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교회 사회 안에 이런 허접이 믿음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이 사역하시기도 전부터, 침례 요한이 사역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구원의 멧세지를 선포하자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구원만 받겠다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인간의 이 교활한 마음의 태도가 가짜 믿음을 낳습니다.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구원만 보장받고 싶은 마음. 이게 문제의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주시는 은혜의 초청에는 뭐가 있습니까? 회개가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한결같이 인간이 회개해야 됨을 깨우쳐 주지 않습니까?

<눅24:47>에 의하면 소위 선교, 무엇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까?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회개가 전파된다고 하지요?

<눅5:30,31>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치유만 받겠다고 하니까 연민에 치우칩니다. 그러면 사실은 더 병이 듭니다.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천국만 보장받으려고 하니까, 가짜 믿음으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사도들의 사역의 초점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허접이 신자들이 많은 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어렵고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안하고, 영생 보험을 들도록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이 땅에서도 내 맘대로 살다가, 내가 왕노릇하며 살다가 지옥에 안가고 천국에 가겠다는 심보가 얼마나 지독히 이기적입니까? 영원히 이기적인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까 믿음을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예수님께 의탁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믿음을 천국행 티켓팅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됐다, 이젠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간다. 천국 보장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삶에는 아무런 믿음의 행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 참된 믿음은 마음을 고쳐먹고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예수님께 내 인생을 의탁하여, 예수님이 책임져 주심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따르다” 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To believe in Jesus is to follow Him). 교회의 역사에서 참된 각성이 일어날 때마다 이 진리가 힘있게 증거되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예수님을 배우며 따르고 계십니까? 내 생각, 내 판단을 버리고 예수님을 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이처럼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행함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열매가 당연히 나타납니다. 당연히 삶이 변하지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데 어떻게 그의 삶이 안 변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된 믿음의 제일의 특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위 테스트입니다. 이기적인, 지독히도 이기적인 나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이신데, 어찌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이 없겠습니까? 사람들 모두가 나를 싫어하고 거절하고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싫은데,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아 주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수치와 고통을 묵묵히 담당하신 예수님인 줄 알았다면, 어찌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겠습니까?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 체면을 잊게 합니다. 그 사랑은 자기를 뛰어넘게 합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교인 여러분,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제가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 앞에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대답이 무엇이냐가 당신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간해 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함으로써 믿음이 있는 척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습니다. 예수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도리어 이렇게 정직한 기도를 드리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솔직한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

사랑하는 마음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행동을 낳습니다. 바른 믿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바른 믿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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