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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해 전진합시다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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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성경은 인생을 여러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가령,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든지, 농부와 같다든지, 또는 안개와 같다든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으로, 종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마는 역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비유되고 있는 것은 인생을 경기에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선수로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에서 바울은 인생을 마라톤 경기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 본문 가운데 두번씩이나‘좇아가노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디오코’라는 말로써 선수가 앞을 향하여 두 주먹을 움켜쥐고, 온 몸을 기울이고 달리는 그런 자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 신앙의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몇가지 기본이 되는 원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무총회에 임직을 받으시는 모든 분들은 임직의 목표, 하나님의 상급을 받기위한 푯대를 위하여 나아가기 위해서

또한 인생 신앙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세가지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푯대를 향해 전진하려면 우선 뒤엣것은 잊어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일들, 그것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면 실패한 것이든간에 좌우간??뒤에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잊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경기를 하는 선수가 좌우로 눈길을 빼앗겨도 안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뒤를 돌아 보아서도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좌우간 지난날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로‘배설물’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에서도 한마디 합니다.“뒤엣 것은 잊어 버리라”고 말입니다. 지난날 잘했던 일도, 지난날 못했던 일도 다 잊어 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래야만 앞을 향하여 전진할수 있습니다.

이사야 43:18절에 보면,“너희는 이전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일을??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애굽을 잊지 못했거든요?  보세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때가 좋았는데”였습니다. 조금만 일이 있으면 “왕년에 어떻고”하면서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거든요?

심지어 민14장에 보면, 어떤 한심한 짖을 했는고 하니?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까지 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해서 빠져 나왔는데, 다시 그리로 돌아 간단 말입니까? 결국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 광야에서 엎드러 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뒤엣것은 깨끗하게 잊으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였던 존 브레들리 쇼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 성공과 번영을 원한다면‘안녕히’라는 말을 깨끗히 할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Good Bye 라는 말을 깨끗이 할줄 알아야 성공할수 있다는 충고입니다.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이제와서 울고불고 한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 부질없는 짖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가에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권투시합을 구경할때 말입니다. 해설하는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거기에 상당한 진리가 있습니다. “아무개 선수, 지난날의 실패를 빨리 잊어야 할텐데 그걸 잊지 못해서 또 실패할까봐 겁이 나서 소극적으로 살살 피해만 다니다가 저렇게 얻어 맞고 있노라”고 말입니다. 권투에 있어서는‘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면서 쭉쭉 뻗어 주어야 하는데, 도망만 다니다가 얻어 맞는단 말입니다.

지난 날의 실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설가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잊을 것은 빨리잊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놓고 보세요.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잘하는 놈은 놀때는 실컷 놉니다. 아주 화끈하게 놉니다. 그러나 공부할때는 또 무섭게 하거든요? 그런데 못하는 놈을 보세요. 밖에서 놀때는 숙제 안한것 때문에 마음놓고 놀지 못하고, 또 공부할 때는 놀것 생각하느라고 집중이 안됩니다. 이쪽에서는 저쪽 생각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죽도밥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매일 책만 붙들고 있는다고 공부가 되는 줄 압니까? 맺고 끝는 것이 분명해야 말입니다. 일종의 절제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공부할때에는 죽어라 하고 공부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 때는 노는 것입니다.  잊을 때는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향하여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귀라는 놈은 참으로 묘한 놈입니다. 자꾸만 우리의 지나간 과거의 실수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낙심케 하고, 의기소침케 하고, 회의를 갖게끔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여기에 걸려 들어서 한동안 헤매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그의 아내의 지혜로 극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는 그 반대입니다. 성령은 일단 우리가 회개한 것에 대해서는 잊게 해주시고,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것은 바로 실수한 것을 지우도록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실수할수 있고, 시행착오를 거칠수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실패했던 기억들, 깨끗하게 지워 버리십시다.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며 마냥 후회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시간도 정력도 부족합니다.

더 심각한 말씀을 드릴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겠답니다.

눅 15장을 읽어 보십시오. 절대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과거게 묻혀가지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처럼 어리석고 답답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실패한 과거와 깨끗하게 단절할수 있느냐 하는 것이 미래를 향한 추진력에 바로메타가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과거속에 묻혀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스운 이야기 입니다마는 제주도에 가면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동네입니다. 아시는대로, 거기는 신혼부부들이 특별히 여행들을 많이 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혼여행 온 그 장소가 이혼의 장소로 둔갑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면, 신혼여행 왔다가 몰래 옛날 애인한테 전화하다가 들켜 가지고, 그래서 옥신각신 하다가 홧김에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신혼부부들이 이혼한 장농을 싸게 파는 곳이 사당동 어디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결혼을 어떻게 이해 하십니까???결혼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혼은 그 전까지의 모든 관계에 대한 청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전에야 애인이 몇이면 어떻습니까???그러나 결혼을 하는 오늘 이 순간으로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속 연결이 된다든지 이어지면 그 길로 결혼생활은 끝난 것입니다.??그러므로 결혼이란 미래를 향한 약속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청산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에 성공했다고 해서 오늘 교만할 것도 없고, 과거에 실패했다고 해서 오늘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인양 자책하고??좌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뒤엣것은 잊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야 시원스럽게 앞을 향해서 달릴수가 있습니다.


2. 푯대(성공적인 경주)를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이 추상적이라면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목표가 추상적이면 안됩니다. 한때 관능의 미로서 세계 사람들을 사로 잡았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 하므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전 남편이었던 존 디마지오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그녀는 세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목적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아주 중요한 얘기 아닙니까? 그녀는 분명히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말 디마지오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실패가 죄가 아닌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치스가 2차 대전때에 헝가리에다 수용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포로들로 하여금 매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쓰레기를 한쪽에 쌓아 놓게 하고, 그 다음날에는 그 쓰레기를 다시 제 자리에 옮겨 놓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명령대로만 움직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주입니다. 어떤 포로는 흐느껴 울다가 죽도록 매를 맞았고, 어떤 포로는 괴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포로는 쓰레기를 버리다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전기 철조망에 달려가 그대로 타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포로들이 점점 미치광이로 변해 갔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나치들이 포로들로 하여금 목적없는 삶을 살게 하므로 스스로 자멸하도록 한 전략중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정신착란증 아니면 자살이었다고 합니다. 삶에 있어서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명퇴와 조퇴와 강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모르나 그야말로 무섭게 뛰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벽기도 마치고 돌아갈때면 벌써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뜁니다.‘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뛰는 것입니까?’ 이것을 생각지 못하고 무작정 뛰다보니, 어느새 일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달음질인지, 무엇을 위한 수고요, 돈벌이였는지.... 그 후속조치가 약한 것이 우리네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앞에 나와서 구하는 것을 봐도 그저‘하나님 내게 이러이러한 것을 달라’는 것 뿐입니다. 그것 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저 무조건 달라는 거라.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도 말입니다. 돈을 달라고 할때에도 용도가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후하게 줍니다. 아니, 줄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앞에 용도도, 목적도 분명하지 않을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달음질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목적은 푯대를 향하여입니다. 목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입니다. 목적이 추상적인 것이라면, 목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표준 번역 성경을 보면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우리의 달음질이, 우리의 신앙적인 경주가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같은 공부, 꼭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늘 죽는 소리 해 가면서 일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콧노래 불러가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후자는 체력이 남아 돌아가고,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환경이 좋아서인가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전자는 일, 그 자체를 바라본 결과이고, 후자는 그 일로 인하여 주어질 결과를 미리 내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게으르고, 농떼를 부리면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0년 20년 30년 후에 나의 모습을 내다보니, 오늘의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내일의 상을 바라보기에’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옛날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서로 싸우면 같이 울고 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은 다르다고 합니다. 옆방에서 엄마 아빠가 싸우잖아요? 그러면 속으로 아무나 이기라고 응원을 보낸다고 합니다. 오히려 좋아라 한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싸움 끝에는 화해한넵시고 분명히 외식을 할테니까요. 아이들은 이걸 노리는 것입니다. 당장에 치고박고 싸워서 누가 이기는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보세요,

아이들은 벌써 그 다음 사건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부모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당장만을 생각하고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에 올일을 한번만 생각했더라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어떤 때 보면, 아이들만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부모로서 자식들 보기에 창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 교육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현재가 반드시 현재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멀리 내다 볼줄알아야 합니다. 오늘로 인해 가져올 내일의 결과들을 말입니다. 영광된 미래를 말입니다. 더 나가서는 장차 그 나라에서 주어질 상급을 미리 내다 볼줄 아는 신령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 미래를 내다 보기에 오늘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다같은 육신입니다. 날때부터 일 좋아하고, 날때부터 쇠덩어리가 있나요? 다 놀고 싶고, 다 쉬고 싶고, 남들이 하는 것 나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도 절제하며 우리일에 매진할수 있는 것은, 그 후에 돌아올 결과를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기도하느라고 “힘들지 않느냐?”고, “피곤하지 않느냐?”고 불신자들이 묻습니다. 물론 저를 생각하느라고 하는 질문인지는 압니다. 그러나 이제 보세요. 그것은 질문이 될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신 해 줄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막말로 저 힘들면 나도 힘들고, 저 어려우면 나도 어렵지? 안 그렇습니까???그러나 저는 의지를 가지고 매일 아침 일어납니다. 무슨 의지냐구요? 이제 보세요, 새벽기도 하루라도 빠지면 그날 하루는 왠지 찜찜하게 생활해야 하거든요? 물론 육신적으로는 좀 덜 피곤할련지 모르나 그러나 마음과 정신은 그리고 영혼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하루라도 좀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의지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하니까, 그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어나다 보니 그런대로 습관이 된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면서 달려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할 3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작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분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목표는 상 주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지로는 어떻습니까? 시작과 명분이야 그럴듯하지요. 얼마나 멋있고 좋습니까? 그러나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부르심의 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세상에서 누리는 평판에만 관심이 있고, 세상에서 얻는 상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도 시험드는 것입니다. 알아주니 안알아 주니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접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알아주면 어떻고 안알아 주면 어떻습니까? 그날에 하나님이 알아 주시면 되지, 안그렇습니까? 사람이 알아주면 하늘에 상을 잃어 버릴까 두려운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자기 상 이미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의 뜻을 보면,‘지불완료’라는 뜻입니다.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무슨일을 하든지 동기가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3. 푯대를 향하려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했습니다. 중단없는 전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달릴 것이라”이 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회적인 것이 아닌 계속적인 의미입니다. 이 꾸준하게 전진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매년 경험하는 바 아닙니까? 년초에야 누구나 대단한 결심들을 하지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소위 용두사미식으로 말입니다. 작심삼일로 끝나기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습니까? 그래 이 마라톤에서는‘힘의 안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진짜 프로선수는 맨 처음부터 총알같이 뛰쳐 나가지 않습니다. 고루고루 힘의 안배를 하면서 꾸준하게 달립니다. 결국 그가 골인하는 것입니다. 그가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주자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비교적 인상깊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은쟁반위에 기적 ’과 ‘후지어’라는 영화입니다. 둘다 스포츠를 배경으로 엮어지는 영화들입니다. 전자는 아이스 하키요, 후자는 농구경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휴머니즘 영화들입니다. 특히 후지어라는 영화를 보면 말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시합장에서 선수들이 출전하기 전에는 꼭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시골의 무명선수들이 지역 예선을 거쳐서 마침내 종합 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대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전체 학년이라야 64명의 정원을 가진 시골 고등학교 무명 농구팀과 2,800명의 정원을 가진 대도시의 유명 농구팀과 한판 붙게 되었습니다. 체력면에서나 기술면에서나 능력면에서나 열세인것만은 사실입니다. 시골 선수들이 바짝 쫄아 있습니다.

이럴때 코치가 선수들을 앞에 놓고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 가슴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다면 결과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승부욕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금까지 훈련한대로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고 주문을 합니다. 그리고는 역시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는 경기장으로 뛰어갑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사실 저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고 봅니다.

하는데까지 하다가 끝나도 괜찮습니다. 반드시 내가 업적을 남겨야 하고, 내가 기념비를 세워야 하고,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열매를 따야만 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 그런 교만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저 오늘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최선을 다하는 것 뿐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다 쓰러지면 거기까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신념처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금년 한해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2005년 12월 1일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2004년도를 시작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오늘 사무총회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오늘 임직을 받으며 원하옵는 것은 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달려갈 길을 예비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맡겨진 달란트를 감당하는 신앙의 경주를 하는 저희들로 하여금 뒤엣것은 과감하게 떨처 버리고, 주신 임직을 감당하기 위해 오로지 앞만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만을 위하여 좇아가는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임직을 감당하도록 성실한 마음가지고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지 매사에 최선 다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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