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시 27:1-14)

  • 잡초 잡초
  • 316
  • 0

첨부 1


- 설교 : 박세종 목사 (소망교회)

샬롬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샬롬! 하며 인사를 합니다. 다같이 해보실까요? 샬롬!
그런데 진짜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샬롬 샬롬 하면서 반복해서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제 다시 한번 샬롬하고 인사를 나누시겠는데 옆에 계신 분이 진짜 진짜 반가운 분인지 아니면 옆에 계신 분이 나를 별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 정도로 대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샬롬! 샬롬!

세계적인 시인하면 이탈리아의 단테를 꼽게 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단테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그때 단테의 대답은
"네! 저는 모든 사람이 간절히 찾고 있는 평화! 그리고 안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단테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고 우리들이 찾고 있는 것도 바로 평화요 안식입니다.
복잡한 도시에서의 생활이란 도시락 같은 아파트에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위에서 애들이 쿵쿵쿵 뛰어 놀고 아래선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할 때면 아! 나도 저런 애기! 또 낳고 싶어라 아! 저 청국장은 나의 국 저 애도 나의 애!
그러나요?
시원한 물이 졸졸졸졸 흐르는 그 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솔잎을 씹으면서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산책하며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습니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어"
그런 꿈이죠
직장인들이 오랜만에 휴가를 맞아서 그저 단 며칠이라도 쉬어보려고 떠나면 가는 곳마다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다리 밑에 있는 그림자까지도 가슴 심장 뛰며 자리잡는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하니 우리에게 안식이란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냥 해본 소리여!
내 팔자에 어디 그런 게 되것어
하고 자조와 탄식 속에 그 꿈을 펑! 하고 깨지는 순간!
애들은 또 뛰기를 시작합니다. 쿵쾅쿵쾅

그런데 정말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피곤해 지는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나의 이 가슴에 갈등을 줍니다.
무거운 부담을 안겨 주는 거예요. 그래서 피곤합니다
그럼! 안식하고 평안하려면 목표를 하향 조정해야합니다.
목사님!
그러면 이 무한 경쟁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죠?
목표를 하향으로 조정한다고 평안하고 안식이 오는 게 아니죠?
우리에겐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그 힘의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일까요?
성경을 읽어보시거나 보셨던 분들은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예수님께서 뛰어 다니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실
얼마나 얼마나 바쁘시고 힘이 드셨고, 피곤하셨으면 그 풍랑 있는 갈릴리 바다의 배 고물에서 다 잠이 드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스케줄에는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잔치 집에도 가야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셔야 했고 가지각색의 병을 고치셔야만 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 가운데 더러운 사람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았는지 그러시면서도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보셨습니다.
하늘에서 날개 짓 하는 새를 보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안아 주시면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죠.
뭐 어떤 사람들처럼 뭔가를 손에 칭칭 감고 이것이 뭐냐!
애들은 가라! 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때는 새벽 해뜨기 전에 산에 올라가셔서 깊은 묵상을 하시며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시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그 때 부르신 찬송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아침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날 때에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불안하고, 피곤하고, 지쳐있는 우리들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여유를 찾는 일입니다.
얼마나 바빠요.
아직 빨간 불인데도 벌써 차들이 앞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황색 불이 그냥 서 있으면 뒤에서 3차 세계 대전이 시작됩니다. 파란 불엔 벌써 차의 뒷모습이 안 보일 정도로 바쁘게 살아갑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 다닙니다.
아예! 어떤 분은 너무 바빠서 예배 시간이 길게 느껴집니다.
기다리다 못해 축도 시간에 되면 벌써 일어나서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나

요즘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왜? 요즘은 모세 시대처럼 하나님의 기적이 없는거야!
그럼 내가 예수 잘 믿을텐데
아마! 하나님도 이젠 늙으셨나봐
그런가요?
시 46:10절입니다. 들어보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속은 위험하죠
왜요?
과속하면 주변을 살피는 시각이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뱀을 만나면 사람이 긴장해서 그 뱀만 보기 때문에 그 옆에 뱀을 잡을 수 있는 몽둥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요!
횡단보도에서 노란 불이 켜지면 벌써 도로 중간에 서 있죠.
나만 신호등대로 서 있으면 뭐 바보가 된 기분이죠.
저는 많은 환자들을 심방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게 바쁘게 뛰어 다니던 분이 병에 걸리면 별 수 없이 침상에 눕게 되죠.
하반신을 마취하고 나면 옆으로도 눕지 못하고 반드시 눕게 합니다.
아! 하나님은 강제적으로도 위를 보게 하시는구나!
그런데 감사한 것은요 병석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고 그냥!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그분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전 오랜만에 진짜 평안과 안식을 찾게 되었어요.
저녁에 왜 누워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눕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단잠을 주시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예수님은 결코 뛰신 적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시 121편을 좋아하셨을 거예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증권에서 오는도다
나의 도움이 아파트 평수에서 오는도다? 아니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염려와 걱정도 이기며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게 바로 샬롬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힘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부인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예뻐 보세요!
미인은 잠꾸러기
아! 미인 박명이여 박명
아! 모래시계의 K양이 못생겨서 갈라섰나 거 잘생겨 봤자라니까!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는 자기 힘으로는 포도를 딸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에이! 모든 포도는 다 시어서 먹을 수 없어

어떤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과 생각 속에 헛된 환상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정신분열이 생기는 거예요.
이거 다! 연약한 사람들이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낮의 해가 나를 상치 못하며 밤의 달이 나를 해치 못하리로다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는 자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나의 출입을 지키시는 도다"
12절을 보세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그러나 13절
"내가 산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절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고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약속은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절대로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출 3장에서는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절대로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분"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요즘말로 하면 목사님이신거죠.
그런데 그를 가리켜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까요?
12절처럼 그분을 향해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예레미야를 괴롭혔으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자녀가 굶어 죽게 하옵소서.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하인들이 다 전쟁에서 죽게 하옵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이여! 왜 날 낳으셨나요.
내가 태어난 그 날이 저주를 받았다면 내가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텐데요. 하며 태어난 날을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처럼 느껴집니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런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rise up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위대한 일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떻게요?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게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아요.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게 되고 평안이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버지의 집에 나아온 이 형제자매 모두에게 승리케 하시고 때를 따라 도와 주소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지켜 보호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