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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상집이 잔치집 된 사연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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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옛날 어느 왕이 궁중의 학자들에게 세상 역사를 정리해서 기록해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학자들이 모여서 역사를 정리하였더니 여러 권이 되었습니다. 왕은 너무 방대하니 간단히 요약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해서 나중에는 줄이고 줄여서 한 권으로 만들었습니다. 왕이 그 책의 첫 장을 펴자 글자 하나만 덜렁 쓰여져 있었습니다. 괴로울 ‘고’(苦)자였습니다. 다음을 넘겨보니 전부 백지였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학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 역사를 연구해번 결과 모든 게 고통이라서 그렇게 한 글자로 요약해보았다는 겁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옳거니. 세상의 역사는 실로 고통의 역사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천태만상입니다. 남녀와 노소, 직업, 신분, 학력, 재력, 성격, 취미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고통과 슬픔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흔히 뭐라고 말합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서 죽기까지 모든 게 고통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인간 세상을 가리켜 고해(苦海)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욥14:1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 ”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고통 중에 살다 마지막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면 정말 비참하고 한심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희락과 기쁨,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역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혹시 남모르는 고통과 슬픔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크고 작은 것들이 다 있을 줄 압니다. 누가라도 그렇죠. 정도 차이와 모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의 메시지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을 자식 겸 남편으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생때같은 아들이 죽은 겁니다. 청천벽력이죠. 눈물바다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도 함께 슬퍼합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신 겁니다. 그때 그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을 겁니다. 아들이 죽었다 살아났지만, 마치 자기가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초상집이 변하여 잔치집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초상집 같은 인생이 잔칫집 같은 인생을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1] 나인성 과부의 기구한 인생 : 초상집 같은 인생

나인 성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나인’이란 이름은 헬라어로 ‘사랑스러운’ ‘즐거운’ ‘아름다운’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대로 경치도 좋고 기후도 좋은 지방입니다. 그런 곳에서 늘 편안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이 그렇지 않죠. 그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2절 보면, 간단한 설명이지만 그 여인의 형편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 ” 그 여인은 일찍이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 키우면서 그에게 온갖 기대와 소망을 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제는 장성해서 의지하고 살아갈 만한데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이런 말이 있죠. “자식 떼놓고 돌아서는 어미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인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다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가운데 휩싸여 있었을 겁니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살 길이 막막합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마음속으로 그 장례 행렬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장례 풍습을 기초로 상상해 보면 이렇습니다. 관을 운구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뚜껑이 없는 상여입니다. 아들의 싸늘해진 시신을 보면서, 차마 떠나보낼 수 없어 매달리다시피 하며 시신을 붙잡고 따라갑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또 흐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같이 슬퍼하며 길게 늘어서서 따라갑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장례 때에 애가(哀歌)를 연주하는 피리장이 몇 사람을 불렀습니다. 아마 그 날도 그랬을 겁니다. 처량한 장송곡을 연주하며 천천히 따라갑니다.

어쩌면 모든 인생이 이런 모습인지 모릅니다. 동분서주하며 살아가느라 생각 없이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인생이란 죽음을 향해 고통 중에 행렬을 지어 걸어가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이끄는 죽음의 행렬인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는 모든 인생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권세는 바로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생이 죄인이 되어,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롬6:23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죽음의 권세가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함으로 불행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끌어갑니다. 그 죽음의 권세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스스로는 그 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마지막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죽음의 권세’를 묘사하는 구절이 고전15:55-56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 구절에서 ‘쏘는 것’은 ‘독침’을 가리킵니다. 마치 독침을 쏘아서 고통 가운데 넘어뜨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권세가 일평생 인생을 따라다니며 괴롭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향해 날카로운 창을 들이대며 추격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또 이런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요즘이야 농촌이라면 몰라도 도시에서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 닭을 기르는 집이 있으면 한낮에 공중에서 매가 빙빙 돕니다. 그러나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 기회가 되면 어느새 내리닥쳐 닭을 낚아채 달아납니다. 죽음의 권세가 꼭 이렇습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가 기회만 되면 고통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의 인생도, 또 그 외아들의 인생도, 심지어 조문하며 함께 행렬을 지어 따라가는 사람들조차 사실은 똑같은 신세입니다. 죽음의 권세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초상집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리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2] 나인성 과부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 유일한 구원자

그런데 그 여인에게 놀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온 것입니다.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장례 행렬은 성문에서 나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은 성문으로 들어오고 ... 조금이라도 시차가 났다면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여인의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님! 그분은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도, 자식이라도, 친구라도 그 고통과 슬픔, 사망에서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동정하지만 무능력한 동정에 불과합니다. 때때로 그것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너무 고통과 슬픔이 심하면 오히려 그 동정이 부담스럽고 성가시기조차 합니다. 때로는 “당신이 내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안다고 그래?”하고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공감하는 진정한 동정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체휼’이라고 합니다. 히4:15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씀입니다. 체휼이란 직접 경험하고 느껴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랬습니다. 그분은 온갖 인생고를 다 경험해 보셨습니다. 그 당시 가장 비천한 목수의 가정에 나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아직 핏덩이였을 때 헤롯왕의 핍박으로 애굽에 피난을 떠났습니다. 나사렛에 돌아가서는 가난한 어린 시절에, 육신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요셉과 마리아 사에에서 태어나 동생들을 거두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와 죽은 아들을 보면서 마치 당신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있는 겁니다. 13절 보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깊은 동정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나인성 과부를 보면서 어린 시절 모친 마리아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고통스러워 할 모친 마리아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동정이란 이처럼 자신과 상대방을 오버랩 시키며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정은 그저 같이 울어주고 마는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아무리 동정을 해도 능력이 없으면 무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은 능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13절에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눈물을 그치도록 도와주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그런 강한 의지와 능력이 곧 나타납니다. 14절 보면, 관에 손을 대십니다. 여기서 관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상여입니다. 뚜껑이 없는 겁니다. 시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겁니다. 그것은 손으로 만졌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수의를 풀어헤쳐 얼굴을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쉽지 않은 행동이지만,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일입니다. 율법(민수기 19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절대시신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만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나님 아들의 신적 권세와 능력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15절) 이처럼 예수님의 동정은 능력이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유일한 구원자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새 인생 : 잔칫집 같은 인생

예수님의 그 놀라운 능력으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으네 그 어미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일 순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요5:2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과 마주친 장례 행렬, 죽음의 행렬은 이제 생명의 행렬, 축복의 행렬로 바꾸어졌을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와 그 아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다 환호성을 지르면서, 예수님을 앞장 세우고 나인 성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인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을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초상집이 잔칫집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 중에 있던 사람도 소망을 갖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도모다까 시모지라는 일본인 사회사업가의 일화입니다. 그는 한때 사형수였는데, 일본 정부가 사형 집행 하는 대신 북해도 탄광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자신에게 면회를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였는데, 늙어버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죄송했지만 마음이 강퍅해진 그는 욕을 하며 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알았다며 보따리 하나를 주며 “그래. 내가 돌아갈테니 이것이나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가신 후 풀어보니 성경책입니다. 짜증을 내며 방 구석에 처박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방을 함께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더니 빈정대면서 한 장씩 뜯어 담배를 말아피웁니다. 자기는 내던졌지만 그 광경을 보니 부아가 났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불원천리하고 갖고 오신 건데 ... 그래서 호통을 치며 성경책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성경에 빠져 버렸는가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후 점점 성경에 빠져들어가서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에 들어가 일을 하다 점심 시간이 됐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다른 동료들이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빠져나가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성경을 읽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바로 자기가 일하던 그 갱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함께 일하던 30여명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살아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범수로 인정 받고 여러 차례 감형이 되다가 마침내 출옥했습니다. 고향에 가니 이미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각오로 돈을 열심히 벌어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양로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학교를 여럿 세웁니다. 후일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교육자 대상과 사회사업가 대상도 받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절망의 수렁에서 소망이 넘치는 인생을 변화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만나면 슬픔과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그때 살아난 청년도, 여인도, 또 모든 무리들도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생명의 역사는 기쁨을 창출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래서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살이가 고달플지라도, 생명의 소망과 생명의 역사가 있기에 영혼의 내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61:3 말씀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시30:11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나오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기쁨’ 혹은 ‘희락’입니다. 그녀는 흉년이 들어 모압 땅으로 이민 갑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차례로 잃고 두 며느리와 자신만 남게 됩니다. 그녀는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며느리를 떠나보내려 하지만 룻은 끝내 따라옵니다. 고향에 온 나오미는 너무 부끄러워 고향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기쁨’이라는 뜻)라 부르지 마시오. 나는 마라(‘쓰다’는 뜻)요!”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오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며느리 룻이 보아스라는 신실한 남자와 재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오벳이죠. 다윗의 조부입니다. 나오미는 고통으로 쓰디쓴 인생 ‘마라’가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 ‘나오미’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초상집 같은 인생이니까? 아니면 잔칫집 같은 인생입니까? 당연히 예수님 모시고 잔칫집 같은 인생이 되셔야 합니다. 영생을 얻고, 소망과 기쁨이 넘치고, 날마다 승리하는 인생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초상집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도, 온 세상 사람도 이제는 죽음의 권세 아래 초상집 같이 사는 인생을 청산하고, 잔칫집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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