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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 (행 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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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필곤 목사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결핵 요양소를 만들고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던 셔우드 홀이라는 의료 선교사가 계십니다. 지금 서울 양화진에 그의 부모와 동생 그와 그의 부인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그 날을 바로 보며 묻혀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부모님도 의사 부부였고 자신도 의사 부부였는데 부모님은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뼈를 묻었고 자신들도 한국에 와서 일제로부터 추방되기 까지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시다가 98세로 하늘 나라에 가신 분입니다. 이분이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담아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자서전을 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쳐서까지 한국 사람을 사랑한 이사람들의 가족사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은 17살 때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보람있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다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어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된 의사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로 오게 되었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신이 질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딸 역시 한국에서 질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고 맹인들을 위해 점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광혜여원'을 만들었고 '어린이 병동''평양외국인학교' 조선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최초로 조선에 세워진 여성을 위한 의학교로 우석대병원과 고려대학병원의 전신이 되었답니다. 왜 이분들이 이런 모신 수난을 겪으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조선 땅에 와서 선교했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를 보내셨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나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 조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남편과 딸을 이방 땅에 묻으면서까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한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뜨겁게 한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 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죽음의 위기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소 싶었지만 유대인들의 암살 계획을 알고는 도보로 마게도냐로 갈 것을 계획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어려움과 고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무엇을 합니까?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세워 줍니다. 가진 것이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 줍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격려함으로 세워줍니다(1-2).

1)바울은 제자들을 권면하여 세워주었습니다.

오늘 성경 1절을 보십시오. 데메드리오로 인하여 큰 폭동 사건이 그치자 바울은 제자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갑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떠났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라는 말은 에베소에서 고린도(헬라)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를 다 망라(網羅)하는 말입니다.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왜 그곳 교회들을 갔습니까?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권하다는 말은 '파라칼레오'라는 말로 '곁에 불러 놓고 이야기하다. ' '권면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말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를 세워주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여 위로해 주십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2)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여 세워 주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세워 주었습니다. 만날 수 없으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헬라에 3달을 머물렀습니다. 헬라는 아가야 지방을 가리키는 헬라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가 머문곳은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3개월 머물면서 무엇을하였겠습니까? 기독교 기본 교리인 로마서를 기록하여 로마에 보내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고린도전서를, 마게도냐에서는 고린도 후서와 갈라디아서, 고린도에서는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여유있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건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나이 많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사람을 세워 주었습니다.

3)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사람들을 나의 가진 것으로 격려하여 세워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그 위에 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을 세워 주는 사람이 있고 남을 넘어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세워 주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신앙 생활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세째는 일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데 있습니다.(고전10:31) 일과의 관계는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마25:21; 고전4:2) 인간 관계에 대한 목표는 세워주는 것입니다. 깍아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힘을 주어 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대강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①경쟁자 ②이용자 ③무관자 ④동반자입니다. 상대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질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이용자로 생각하는 자는 욕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를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관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를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를 세워주는 것이 곧 자신이 세움받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한국인의 약점 중 하나는 남을 깎아 내리는 버릇입니다. 나 이외 것을 영원한 적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심리학자들은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더욱 세워주기 싫어하는 것은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보드랭은 카인 컴플렉스(근친증오)라고 합니다. 매사 흠을 잡기로 하면 모두를 지옥같은 삶으로 끌고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절망하며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반색을 하며 말했습니다.『드디어 당신이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군요.해고당한 일이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세요』아내는 남편을 격려한 뒤 돈을 꺼내 놓았습니다.『이럴 줄 알고 당신 봉급에서 따로 마련해둔 돈이예요. 당신이 명작을 쓸 동안 이 돈으로 살아요』나다니엘 호손의 명작 「주홍글씨」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서로를 잡아 먹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사사건건 토를 달려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대통령이 APEC 정상회담을 떠나니까 정당 대변인이 독설을 퍼부는 것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대통령 부재가 모처럼 나라가 조용해질 기회라고 말하며‘되도록 오래 머무시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어느 정당편은 아니지만 왜 우리나라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국정질문을 하는 국회의원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게 보였습니다. 좀 상대방을 세워주며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면 자신의 체면이 깎이고 손해가 됩니까?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고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 행복입니다. 우리의 작은 희생과 노력으로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격려해 세워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갖은 것 없다 하여도 말 한 마디로도 격려하며 세워 줄 수 있습니다. 매사 독을 품으면 안됩니다. 선생을 베푸는 목사님에게 가서 "당신은 살아있는 부처님입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리가 번쩍이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가서 "참석해 주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통해 얼마든지 우리는 서로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선 순위를 만나는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데 집중합니다.(4-6)

1)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어 살았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항상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늘 4-6절까지 보면 8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가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그냥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 베뢰아에서 소바더를 선택하여 자신의 전도여행에 동행을 시켰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를 뽑아 동행하였습니다. 더베에서는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를 뽑아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속에 포함된 사도행전의 기록자 의사 누가도 동행을 시켰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동행했겠습니까? 물론 3차 전도여행 때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 주기 위해 각지역 대표들을 뽑아 동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도 2차 전도 여행 때도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뽑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후에 훌륭한 하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아 동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세워주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모범을 통해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할 때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12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가와 실라와 동행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어려워도 이일을 중심으로 활동을 합니다. 드로아에서 기다리게 하고 다시 가서 만나 함께 합니다. 바울은 인생의 말년에 아들처럼 훈련시켜 제자를 삼았던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라고 말씀합니다.

2)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일생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고 이 일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 명령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의 뛰어난 점은 여호수아라는 훌륭한 제자를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사기의 혼란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세워 놓았기 때문에 영적 암흑기에 이스라엘을 밝게 비출 수가 있었습니다. 후계 구도가 없는 회사가 얼마나 혼란 스럽습니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0세 때 "이제 나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였던 30살이다. 더 이상은 어린애같은 짓과 헛된 일을 하지 말자. 주여, 오직 당신의 뜻만을 생각하게 하소서!"라고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녀 인생의 종반에 이르렀을 때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한 마디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군요. 그것은 , 나 자신이 하나님께 숨겨 두고 내놓지 않은 부분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외과 의사이자 부인과 의사인 하워드 A. 켈리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날 밤, "나는 나 자신과 시간과 재능과 야망,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복되신 주님, 주께서 쓰시도록 나를 성켤케 하소서. 주님께로 나를 가까이 이끌지 못할 것이라면, 세상적인 어떤 성공도 내게 허락하지 마옵소서."라고 일기에 기록하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연세대 설립자의 손자인 언더우드 3세(원일한)에게 기자가 당신은 왜 낯선 한국 땅에 와서 대를 이어 일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소명 때문]이라고 간단히 답했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선생님 셜리반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셜리반은 헬렌 켈러를 48년간 개인 지도한 가정교사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기 때 어머니가 죽고,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으며 하나뿐인 동생도 병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 역시 안질이 악화하여 실명하였습니다. 두번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구명되었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바아바라 신부였습니다. 신부는 절망적인 소녀에게 십자가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과거에는 종지부가 찍히고 사랑과 소망으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전개되는 구원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보스톤 파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6년간의 분투 끝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이 성공하였습니다. 맹 농 아 3중고의 짐승 같은 소녀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였습니다. 무녀 48년을 그를 돌보았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소명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고통받는 인류에게 소망의 등불이 된 위인 헬렌 켈러를 길러냈습니다. 필라델피아 템풀 대학이 헬렌 켈러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할 때 셜리반에게도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3. 하나님을 사람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7-1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위기를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수많는 사람들이 때때로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점은 위기를 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위기를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도 수많은 위기를 당했습니다.

1)위기의 상황에 포기하지 않고 바울은 유두고를 살려 줍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다 유두고가 추락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좋아했겠습니까? 주일날 저녁 바울은 밤늦게까지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한 청년이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설교를 듣다 깊이 졸다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째서 말씀을 듣다 졸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습관성으로 졸았는지, 낮에 피곤하게 일하였든지, 등불을 많이 켜 놓아 산소가 부족해서 그랬든지 말씀듣기가 지루해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두고는 "복되다. 다행이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헬라 사회의 하층민들 가운데서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낮에 고된 일로 졸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깊이 졸더니"라는 말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완전히 곯아 떨어진 상태입니다. 얼마나 피곤했을까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도 예배시간에 조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절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의사 누가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죽은 것과 기절한 것을 구분하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다 한 청년이 죽은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드로아 교회에 큰 시험이 든 것입니다. 여름 수련회를 갔다가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다 익사한 교회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합니까? 교회에 왔는데 미끄럼 뜰에 머리가 부딪쳐 터졌습니다.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영역이 부족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다른 교회에 가달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교회의 위기입니다. 이 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화를 내며 분노합니까? 설교듣다 졸더니 저주를 받았다고 좋아합니까? 교인들에게 몰매를 맞을까바 도망을 갑니까?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합니까? 낙심합니까?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금방 분별이 됩니다. 드로아 교회를 와해시키려는 사탄의 계략을 압니다. 그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워주기로 결심한 사람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10절에 보십시오. 당당하게 내려가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처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린 것처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고 말하며 자신있게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까지 떡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날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사건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사건으로 인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당시 복음을 훼방하고 성도들을 대적하는 환란의 시대에 살던(3,29,30) 그들에게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2)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사람을 살림으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살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고 창조성을 말살해서는 아니됩니다.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고 가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림받은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각종 병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살 때부터 13년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질병과 고독과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한가지 병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 그녀의 육체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질병으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77년 일생 대부분을 육체의 가시인 질병과의 투쟁하며 살았지만 그녀는 "빙점, 죽음의 피안까지, 길은 여기에, 살며 생각하며, 이 질그릇에" 등 많은 작품을 써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무수한 질병 가운데서도 그녀를 쓰러지지 않게한 것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질병은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소천하기 직전에“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었습니다, 그대신‘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 후 남는 것은‘쌓아온 공적’이 아니라‘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회개하고 정결해지고 온전해 집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 고통이란 귀머거리 세상을 일깨우는 그분의 메가폰이다.'라고 했습니다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는 있는 윌리암 홀 박사 일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씌여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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