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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걸음 더…….(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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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12월 첫 주일입니다. 2004년도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숨 가쁘게 달려 온 것 같습니다.
모두들 힘드셨지요?
대통령 탄핵이니 뭐니 해서 난리를 겪었고, 행전수도 이전으로 또 한번 나라가 떠들썩했습니다. 최근에는 원유가격이 올라서 숨통을 조이는가 했는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경제가 새해 앞에 서 있지만 그 어떤 소망은커녕 답답함만 더하게 합니다.
모두들 힘드셨지요?
많이들 울었을 겁니다. 지금도 힘들어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람의 중심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새로운 소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일을 할 때는 그 결과를 기대하고 시작합니다.
우리도 그랬거든요. 여기 표어처럼 좋은 열매 맺겠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거든요. 그렇기에 기대에 대해서, 그 기대했던 것만큼의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결과가 없는 일은 심지어 그 동안에 애쓰고 수고한 일조차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일본의 어느 조그마한 해안 동네 ‘미나미타 만’. 거기의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느 해, 그 동네에 공장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그 동네 어부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늘 그러하듯이 고기잡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이상한 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리면 엄청나게 아파하면서 고통 하다가 결국 숨졌습니다.
조사결과, 그들이 잡은 고기가 수은 중독으로 중독 되었고, 그 고기를 먹은 사람 역시 수은 중독으로 그리 되었다는 겁니다. 그 수은 중독의 원인이 바로 그곳에 세운 공장이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공장 측에서 동네 어부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계속 고기를 잡고, 잡은 고기를 가져오면 전량을 공장 측에서 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늘 그러하듯이 고기를 잡았고, 그 고기는 공장 측에서 전량을 돈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공장 측은 그 고기를 시멘트에 섞어서 굳힌 뒤, 다시 바다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어부들은 처음에 괜찮았습니다. 얼마가 잡히든, 잡힌 고기는 순식간에 팔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잡은 고기가 그렇게 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기를 잡아서 뭐 하느냐는 겁니다. 다시 버리기 위해서 고기를 잡다니…….
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거립니다만, 까뮤가 쓴 이방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한 사람이 땅을 팝니다. 자기 키보다 더 깊이 파는 겁니다. 그렇게 한 뒤, 다시 그 옆의 땅을 파서 방금 판 그 웅덩이를 메웁니다. 그래서 그 웅덩이가 다 메워지면, 또 다른 웅덩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또 땅을 파서 웅덩이를 메웁니다. 그러면 다른 웅덩이가 생기고……. 그러면 또 파서 메우고……. 그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조리하고 합니다. 목적이 없는 거지요. 결과도 없는 거지요.
시지프스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시지프스는 신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게 무슨 벌인가 하면, 있는 힘을 다해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라가는 겁니다. 시지프스는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그 바위를 굴려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 왔다 생각되어 손을 놓으면, 그 바위는 다시 굴러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그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립니다. 그래서 꼭대기까지 오라오면 다시 굴러 내려가고……. 그러면 또 굴려 올리고……. 그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물론 큰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이 힘든 일어니까 벌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고통은로 다가오는 벌은 그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런 결과가 없다는 겁니다.
꺄뮤의 이방인이나, 시지프스의 이야기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 아무 결과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그래도 난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잖아요? “도대체 난 뭐 하며 살았나?” 싶을 때도 있었잖아요? 살아온 삶의 흔적은 있는데,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이 허무할 때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허무를 이야기 합니다. “살아 보았자”라는 겁니다. “애써 봐야 헛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가요?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허무한 겁니까? 여러분이 살아온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나요? 금년 한 해도 그렇게 애쓰고 수고 했는데……. 얼마나 땀 흘리고 얼마나 눈물 흘렸는데……. 그게 다 헛일이었어요?
아닙니다.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은 어느 한 순간도 무의미 한 것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1-8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라고 비유하십니다.
왜 농부라고 하셨을까요? 농부들이 뭔가를 심을 때에는 그 결과 곧 거두어들일 수확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이 포도나무를 왜 심었겠습니까? 포도 열매를 따자고 심은 것 아닙니까? 농부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많은 소출을 얻는 겁니다. 포도나무 가지마다 아주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리기를 바라는 것이 농부의 소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도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되라고 세상을 만드신 것 아닙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라고 사람을 만드신 것 아닙니다. 그냥 되는 대로 살라고 여러분과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 아닙니다.
거기 2절에 보면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5절에는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더.” 그리고 “많이.” 열매를 맺되 “더” “많이” 맺기를 원하시는 분이 농부로 비유된 하나님의 심정 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농부의 마음을 가지셨다는 겁니다. 하나님 역시 열매를 원하시되, “더”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라 “예수 믿습니다.”라는 첫 번째 계단에 머물러 앉아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푯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부부가 자식을 낳는 것도 소원 중 하나 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나면 소원이 사라집니까? 또 다른 소원이 생깁니다. 그게 무슨 소원이겠어요? 그 자식이 자라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만 입니까? 구원 받았으면 그만 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맺어야 할 열매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들 아닙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야 까닭이 있습니다. 살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느티나무가 아닙니다. 느티나무는 열매 맺기보다, 가지가 무성하여 뻗고 잎이 무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여름날 시원한 그늘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것도 느티나무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은 당신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신 의도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래서 우리가 그 가지라면, 우리는 다른 것을 열매 맺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포도나무가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같을 수는 애당초 없는 거고, 포도나무에 사과 열매에 달리면 더 좋은 거 아니냐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만 맺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예수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는 예수 열매만 맺어야 합니다. “아무 열매나 맺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것은 곧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예수 없이도 된다.”고 하는 교만이요, 또한 이단인 것입니다. 예수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는 예수 열매만 맺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슨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습니까?
보통, 열매라고 하면 전도를 생각 합니다. 물론 전도도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열매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열매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열매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열매 곧 예수님의 열매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곧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순간마다 “나는 얼마나 예수를 닮았나?” 스스로 물어보고, 그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난 얼마나 예수를 닮았나?”
그리고 농부가 포도나무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것 보고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 보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잘라 버려질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예수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유다 같은 사람일 겁니다. 평소에는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정작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뒤로 슬그머니 빠지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깨끗하게 하시는 가지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손질하시는 가지가 있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입니다.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잘라져야 하는 가지입니까? 깨끗이 손질하는 가지입니까?
그동안 열심히 신앙으로 살려고 발버둥 친 사람도 있을 겁니다.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린 반드시 주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으로 결정되는 그 순간이 반드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구원 입니까? 멸망입니까?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는 그래서 불에 태우실 가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더 열매 맺게 하시려고 깨끗하게 손질하실 가지입니까?
금년 한 해 우리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예수님의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으면 얼마나 됩니까? 30배? 60배? 100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 한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 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눅 13:6-9)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그냥 두었겠어요? 만약 여러분이 포도원지기라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그냥 두었겠어요? 주인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어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게, 그런 은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그렇게 삼년을 살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필요한 것들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두려워 마십시오. 열매가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물론 부끄러워해야지요. 열매 없음에 죄송한 마음 가져야지요.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그것은 뻔뻔함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년에도 열매가 없습니다.
다만 열매가 없음에도, 열매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음에도, 찍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 주셨음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끝났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끝이 아닙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더 힘을 북돋우어 준다는 겁니다. 필요한 것을 더 채워 주신다는 겁니다.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도 그러셨잖아요.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 보실래요?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열매 맺을 수 있다.” 아멘.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건 아셔야 합니다.
그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신 능력으로만 된다는 거, 이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여러분이 그래도 주님 앞에 드릴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 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 앞에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그래야 열매를 맺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것 같아도 쉽지 않습니다.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부지런히 영양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낮에는 쨍쨍 햇볕에 있어야 하고 밤에는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탄소동화작용도 하고 뭐도 하고 그래야 합니다. 강한 비바람에도 견디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있다는 것은 어떨 것 같습니까?
쉬운 것 같아요? “믿습니다.”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니 간단 할 것 같지요?
사람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누가 끊어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스스로 떨어져나가려는 성질까지 갖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못 여는 겁니다. 예수님 영접하기를 망설이는 겁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내 안에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더불어 먹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내 안에 영접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내 안에 영접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얼 망설입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 하십니까?
오히려, 오히려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베델까지 따라 갑니다. 베델에 남으라 하셨지만 이번에는 여리고까지 따라 갑니다. 여리고에 남으라 하셨지만 이번에는 요단강까지 따라갑니다. 그 요단강에서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갑절을 받게 됩니다.
그럼요. 은혜가 되는 곳에는 부지런히 따라 다녀야 합니다. 하물며 생명과 복이 되시는 예수님을 왜 놓치려 합니까?
저는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순간마다 주님께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걸음이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 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이 여자가 어떻게 보입니까?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 걸음걸음에 확신이 보입니까?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 걸음걸음에 소망이 보이십니까?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 걸음걸음에 뜨거운 열정이 보이십니까?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 걸음걸음에 그 여자의 생명이 보이십니까?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그래도 한 걸음 더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달에, 열매 없음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적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기에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마크 웰만(Mark Wellman)이라는 등산가가 있습니다. 그는 1982년도에 등산하다가 암벽에서 추락하여 허리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89년 7월 18일. 하반신이 마비된 마크 웰만은 3천 2백 피트, 자그마치 약 1천 미터나 되는 암벽을 올라갔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험준한 산 엘 까피땅(El Capitan)을 정복한 겁니다. 등산가인 친구 마이크 코벳이 암벽에 로프를 걸어주면 웰만은 오직 팔의 힘만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는 한번에 6인치(15cm)씩 자기 몸을 끌어당길 수 있었습니다. 섭씨 39도나 되는 무더위 속에서, 9일 동안 약 7천 번 로프를 당기는 엄청난 노력 끝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에 6인치만 오르면 됩니다.” (6 inches at time)
한 번에 15센티로 약 1천 미터의 암벽을 올라간 것 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 합니다.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오직 내가 실천할 때만 이루어집니다. 앉아 있지 말고 나가서 착수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천 미터에 15센티미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15센티가 끝내 1천 미터의 암벽에 오르게 한 겁니다.
내 하는 일이 작다고, 내 하는 일이 보잘 것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도무지 내가 한 게 뭐 있느냐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통해 앞으로도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한 걸음 더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05.12.2004 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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