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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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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11월 추천도서로 소개해 드린 대광고등학교 문경보 선생님의 ‘너는 나의 하늘이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이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 묶음 책입니다. 새 학기가 되어 점심식사 지원 대상자와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아이들 현황을 파악할 무렵 선생님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 두 팔을 못 쓰는 가난한 청년과 조금 지능이 모자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요. 청년은 고아였기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가씨에게는 홀아버지가 계셔서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비교적 괜찮은 조건의 집안에 서둘러서 시집을 보내었지만 첫날밤 이미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 밤중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가씨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끌려갔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이 아가씨는 아들을 낳아서 이제는 엄마가 되었고 아가씨의 아버지는 심근경색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가씨, 아니 엄마는 인형의 눈을 붙이면서 겨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서 다시 그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돈도 꽤 벌어서 자기 이름으로 된 집도 한 채 장만하여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아니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를 포함한 세 사람은 밤새도록 울다 웃기를 반복하며 온전치 못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세 식구는 일년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두 팔이 없는 아버지는 열심히 땀을 흘려서 일을 했고 지능이 떨어지는 어머니는 여전히 인형의 눈을 붙이면서 아이의 미래를 꿈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졌습니다. 그 가족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가난은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까지는 저희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점심을 굶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도 저희가 가난하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는 재산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가난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저는 식사지원과 등록금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지만 몹시 화가 났습니다. 제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선량하신 부모님,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이 불쌍해서입니다.

한 고등학생이 자기 삶에 존재하는 모순을 선생님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아픔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어디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가, 정말 평안은 있는가, 정의는 있는가 고민하며 때때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비단 학생만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 무언가 완전한 것, 행복한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방황하는 우리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2천년 전,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도 굶주림과 배고픔, 갈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은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자기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지 안타깝게 외치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습도 반복도 없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불행하지만 않게 살수만 있다면 그 길이 무엇일까요?’ 하는 의문을 가득 품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복의 바른 개념과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원하셔서 팔복을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 주위에 모인 사람들처럼 삶의 갈증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심정과 마음을 가지고 이 시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의로운 사람은 없으며 또 결단코 그럴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내 생각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의롭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내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반복합니다. 나는 또 넘어집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치 있는 삶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의로운 삶에 대해 갈증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바램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 나다운 삶, 내 존재 이유가 분명한 삶을 추구하는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몇 가지 관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면, 도덕적인 면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 ‘의’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었습니다. 율법적인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도덕적인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과 성격,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떠올리는 여러 생각이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은 아닙니다.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맞는 생각, 복되고 인정할 만한 성품과 습관을 가졌을 때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의는 인간관계 속에서 공정하고 바른 모습을 말합니다.

본문의 문법적인 구조를 보면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세상의 불의한 것과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이렇게 되면 본문의 말씀과 우리 사이에는 좀더 간격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나하고 너무 거리가 멀어.’,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어. 당장 부도가 날판인데.’, ‘이혼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셔야지 원......’ 생각하며 요청했을지 모릅니다. 죽도록 공부해도 취직할 수 없는 잘못된 사회구조가 문제지 지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생각하는 분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너희들의 그러한 필요를 나도 분명 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필요가 바로 행복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하십니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기 시작해야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문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등 근원은 영적인데 있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으면, 즉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이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말씀이 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이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기준을 의미합니다. 인간간의 의리와는 다릅니다. 

이러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먼저 세상에 절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행복은 없구나. 평안도 정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신 어르신들, 세상이 의롭다고 생각되는 요소가 어디 조금이라도 있었습니까? 살면 살수록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모순덩어리가 가득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 생각되십니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도 인생의 행복을 찾아 무척 방황했습니다. 여인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줄 사람에게 자기 생명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바쳐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꿈 말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남자를 바꿉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남편과 이혼한 여인이 처하게 되는 사회적인 지위와 받는 모멸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이혼을 하고 남편을 바꿉니다. 그것도 다섯 번씩이나 바꿨습니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여전히 갈증이 있었습니다. ‘인생에 행복이 과연 있을까? 내 것을 다 주겠다는데,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세상인가?’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외로이 물을 긷고 있는 여인의 모습,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삭개오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돈과 권력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돈을 다 거머쥔 삭개오의 마음에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해봤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갈증을 느낍니다. 체면을 무릅쓰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갔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무지개를 찾아다니시나요?’ 하는 복음성가 가사가 있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을 향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갈증,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70년대를 감옥에서 지냈던 민주화 운동의 상징, 김지하 시인이 민중이 이 땅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간절히 갈구하면서 썼던 유명한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습니다.

신 새벽의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내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이렇게 시작되는 시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인의 갈망이 한 절 한 절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씨가 그렇게 외치던 민주주의가 왔습니까? 외형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또 다른 독선과 아집,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토록 온 몸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정권의 주인공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과 어민, 많은 국민들이 고통과 아픔 가운데 현실의 비극을 호소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정의는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요?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은 역사가 계속 되는 동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아내가 있습니까? 남편들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형제가 결혼 기도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런 아내를 주십시오.’ 키는 몇 센티에 몸매는 어떻고 목소리는 어떻고 제가 힘들 때 와서 달콤하게 제 마음을 녹여주는 여인, 재산은 얼마쯤 있고 공부는 이정도로 등등.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런 여자 있으면 내가 데리고 살겠다.’하셨답니다. 완전한 여자가 없습니다. 완전한 여자를 기대하면 실망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완전한 남편이 있습니까? 살아 볼수록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완전한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 때문에 아파하는 여러분, 완전한 부모는 없습니다. 완전한 자녀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완전한 교회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열심히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완전한 교회에 대한 갈증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 중에 있던 사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교회,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의지하여 자기 운명을 극복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변화와 역전의 역사가 있는 교회, 한 사람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교회, 새로운 사람이 예수 믿겠다고 인생의 의문을 가지고 오면 누구든 십오 분에서 이십분 동안 천국과 예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훈련된 교인들이 있는 교회, 예배드릴 때마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교회, 부끄러워서 자기 문제를 노출시키지 못하는 구역원들을 직접 찾아가 섬기는 구역장들이 있는 교회,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을 예수 이름으로 사랑에 겨워 찾아가 돕고 헌신하는 교회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제가 이민교회를 담임할 때도 이상적인 이민교회를 세우고자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숫자적으로 60명되던 교회가 2-3년 사이에 200-300명으로 늘고 예산도 배로 늘었지만, 얼마 전에 가보니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안교회도 3년 동안 섬기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보니, 제 힘으로는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완전한 제도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들면 섬김을 위한 직분이 도리어 교회와 하나님 뜻과는 상관없는 자리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신이 받을 대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기존 신자들과 그들을 위한 교회 시스템이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낍니다. 누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세상에서 완전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좌절감이 목회자에게 올 때, 완전한 남편 혹은 아내에 대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 실망하여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 나 자신에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딸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딸의 행복을 위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야단치고 울리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왜 끝은 야단치고 있을까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근심줄 때가 참 많습니다. 제 인생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이번 주일에 와서 보니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생각과 마음, 실패와 실수투성이입니다. 제 자신에게 좌절하게 됩니다. 내 이익과 자존심 앞에 합리화라는 온갖 모양을 씌워 놓고 변질되어 가는 자신을 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왜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살지? 이렇게 살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아니잖아.’ 하는 마음이 없으십니까?

입원해 있는 동안 문득 병원에 가만히 누워 안 되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돌아보았습니다. 동안교회에 부임했을 당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치이거나, 10년을 원숙하게 목회해 오신 목사님들과 이제 갓 부임해온 저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면서 말씀에 은혜가 없다는 등의 메일을 7통씩 받고 나면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김형준, 너 고생 많이 했다.’ 생각했습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마지막 날 저녁까지 이 때문에 속상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 없이 목회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야, 너 나한테 이말 해놓고는 나가서는 딴 말한 적 한두 번이 아니잖니?’ ‘네가 헌금 약속하기에 믿고 다른 계획 세웠다가 나도 부도난 적 많다.’ ‘새벽기도 나오겠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네가 안 나와서 바람 맞은 적도 많다.’ ‘너 철딱서니 없는 짓 얼마나 많이 했니?’ 그 모습이 제 모습이더군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께 죄송하던지. 남 원망하고 있을 틈도 없었습니다. 바로 제 모습인데 누구를 원망 하겠습니까?

회개하지만 회개보다 무서운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아,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구나.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말씀이 비수처럼 마음에 와 꽂혔습니다. 로마서 7장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바울이 비교적 원숙한 시기에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22절-24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내 자신에게도 구할 수 없고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의를 찾아봅시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내어 달라고 말합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돈이 있을 땐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자유가 있는 것 같고 여자들도 따라오고 친구들도 생기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돈과 함께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들은 급기야 돼지우리에 살면서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입니다. 그러니 돼지우리에 살았다는 것은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탕자가 생각한 것이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풍족한데, 아들이라 감히 칭함을 받지 못해도 좋아. 품꾼의 하나로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갈 때부터 용서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행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착한 일, 좋은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믿으십시오. ‘하나님, 제게는 제 인생을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 파산선고를 하십시오. ‘주님, 이 세상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관계의 축복이 옵니다.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아파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넘어질 때 괴로워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잘 될 때는 기뻐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관계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아 주관해 주십시오. 다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임할 때 내 마음과 가정,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이 있음을 주님 제가 인정합니다. 주님,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주의 뜻 안에서 내가 살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때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저는 이것을 직접 실험해봤습니다. 여러분 제 성격 잘 아시잖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치밀하게 계획해서 지시 내리고 확인하고 점검하는 등 참 세세하게 준비하는데 이번 부흥회 때는 모두 맡겨버렸습니다. ‘하나님, 어느 강사가 되던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요일에 따라 선하게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가지 않아도 당신의 종들을 사용하여 주십시오.’ 제가 없는데 부흥회가 더 잘되었다고 합니다. 당회를 하면서도 이제는 장로님들께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님들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습 보면서 이제는 내가 나설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로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도록, 우리 교인들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제 마음에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우리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품을 찾기 전까지는 참 평안이 없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을 실감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힘은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를 맡겨 보십시오. ‘주님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맡기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기고 자녀 됨의 기쁨을 누리면서 자녀이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셔야 됩니다. 방금 말씀드린 행위의 축복이 아니라 관계의 축복이라는 것을 통해 여러분 존재 의미를 다시 확인하십시오. ‘주님 나를 알고 계시죠? 나를 사랑하신 주님, 내가 믿습니다. 나를 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 믿습니다.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시면서까지 나를 귀하게 여기신 나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적어도 이 땅위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 내가 살아가겠습니다. 주님께 내 인생을 맡깁니다.’

그리고 경건의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지 마시고, 매 순간 자연스럽게 ‘주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실까?’ 자꾸 물어보십시오. 가정에서 ‘저 원수 같은 사람’ 하지 마시고 ‘주님 어떻게 보셨습니까?’ 여쭤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해답만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옛날에는 잠수부들이 물 속에 들어가면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밖에서 펌프질을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부패한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의 공급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 즉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의에 목마르고 주리십니까? 맞습니다. 주릴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도 우리가 의지할 만한 의는 없습니다. 내 가정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시고, 이 민족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통치하실 때에야 진정한 의와 희락, 화평 그리고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가더라도 기쁘게 노래하며 걸어갈 수 있는 참된 기쁨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의와 희락과 화평이 넘치는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이 민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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