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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결산 (눅 1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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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요즘  수능시험 부정으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대학은 가고 싶으나 실력이 되지 않자 대리인을 고용하거나 휴대폰으로 답을 내려 받은 것입니다.

이 일은 점수가 필요한 사람과 돈이 필요한 사람간에 이해관계가 피차 맞물려 빚어낸 범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믿겠습니까?
본문이 그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불의한 청지기

청지기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청지기인 자기 임의로 탕감해 주고 나중에 탕감 받은 사람들로부터 후대함을 받고자 했던 일입니다.

역시 「세상에 이런 일이?」하는 TV프로에나 나올 법한 일이지만,
살고자 했던 청지기와 빚을 탕감받기 원했던 채무자들이 공동으로 벌인 「사기 행각」입니다.

2) 잘못된 칭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지기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왜요?
방법은 그릇되고 부정되었지만, 「나중」을 생각했던 바가 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즉 방법은, 생각지 않고 나중만 생각했다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 인식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교훈과 얼마나 다릅니까?

  눅 12:29-31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시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다릅니까?

  잠 2:21-22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세상은 과정과 방법을 무시하고 오직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중심까지 감찰하시기에 동기도 과정도 방법도 결과도 의로워야 합니다.
포지션만 보시지 않고 마인드까지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교훈

그렇다면 주님의 주된 교훈은 무엇인가요?
왜 불의한 청지기의 옳지 못한 행위까지 대두하면서 제자들을 교훈하고자 했을까요?
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② 작은 것에 충성되어야 큰 것에도 충성된다.
③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성도라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훈의 중심사상은, 「지금만」이 아닌 「나중, 미래」를 준비하라 입니다.
불의한 종의 지혜는 바로 「나중」을 준비한 지혜로움 아니었습니까?

수능 시험부정을 치른 이들이 공통된 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지만,
방식이 온전치 못했기에 저들의 미래는 더욱 망가져 버렸습니다.

뉴스를 보는 이마다 다 혀를 차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애들이 신세 망쳤네...

◦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십니까?
◦ 노후를 위해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료를 내십니까?
지혜롭다면 방식도 지혜롭게 해야 됩니다.

모름지기 불의한 청지기는 미래를 준비 했다지만,
불의하게 준비 했기에 망가진 미래 사람이 된 것입니다.

4) 준비

그렇다면 빛의 아들된 우리네의 영원한 미래를 위한 모습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나요?

① 청지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청지기에는 청지기 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불의한 청지기처럼 주인행세하게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성경의 계시 사상이 바른 청지기 사상입니다.
즉, 인간은 잠깐 동안 하나님 것을 빌려서 생산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고 심부름하는 하나님의 관리인이요 대리인이요 일군에 불과하다는 의식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을 잘 알면 맡겨진 것을 갖고 잘 활용하여 남기는 유익한 청지기가 되고,
주인을 모르면 맡겨진 것을 허비하거나 보존하는데 그치는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가 됩니다.」

이러한 청지기에게
동서고금을 통하여 요청되는 것은  「성실, 충성」입니다.

  마 25:21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리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고전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

옛날 어느 부잣집에 머슴 둘이 있었습니다.
한 머슴은 성실했으나 한 머슴은 요령을 피우고 믿을 수 없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하루는 불성실한 머슴의 버릇을 잡아 주려고 두 머슴에게 새끼를 꼬라고 밤에 명령했습니다.
성실한 머슴은 밤새워 새끼를 꼬아 쌓아 놓았으나 게으른 머슴은 대충 꼬다가 잤습니다.

이튿날 주인은 두 머슴을 불러 각각 꼰 새끼를 갖고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희에게 1년간의 품삯을 주련다 어젯밤에 꼰 새끼에다 돈을 꿰어라」

어찌 되었겠습니까?
성실하여 충성된 머슴은 돈을 많이 가질 수 있었지만,
요령 피웠던 머슴은 불과 몇 냥 밖에 가질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성실」혹은 「충성」은 청지기든, 머슴이든 언제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산입니다.

본문의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계심을 몰랐기에 맡겨진 것을 허비했고,
채권을 탕감해 주는 등 불성실과 불의를 자행한 것입니다.

충성에는 3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 시간의 충성입니다.
똑같은 시간을 맡았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중요합니다.

다수는 나를 위해 씁니다.
다수는 용두사미식으로 씁니다.
년 초에는 의욕적으로 쓰다가 연말에는 느슨하다 못해 방치하기 일 수입니다.

㉡ 분량의 충성입니다.
뭐든 맡기시는 주인은 능력껏 맡기셨습니다.
자연 분량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것만 중요시 여긴다면 착각입니다.
작은 것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주인 되시는 주님은 처음부터 큰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일단 작은 것을 맡기신 다음 큰 것을 맡기십니다.

㉢ 환경의 충성입니다.
형통한 때, 건강할 때, 여유로울 때 충성하기란 비교적 수월합니다.
그러나 곤고하고, 가난하고, 바쁘고, 힘들 때 충성하기란 참 힘듭니다.

그러나 청지기에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전천후 충성이 있어야 됩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요셉에게 본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충성했기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사로 까지 생각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작은 일에도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②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청지기에는 맡겨지는 때가 있고,
        일하는 때가 있고,
        쉴 때가 있고,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산과 다른 「평가의 때」를 잊으면 안 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어리석음은 「결산의 때」에 알았으나 평가의 때는 몰랐습니다.

  눅 16:1 “~그가 주인의 소류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은 청지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평가는 「날마다」입니다.
이 평가는 결산을 「결정」짓습니다.

진정한 청지기는 이때를 즐거워해야 일이 즐겁고 결산이 두렵지 않습니다.

많은 청지기들이 결산의 때만 기억합니다.
그 날이 오래 남은 줄 알고 있습니다.
주어진 일을 뒤로 미릅니다.
◦ 아이들이 좀 큰 다음에
◦ 돈 좀 번 후에
◦ 조금 한가해지면 등..

그러는 사이에 그의 평가는「뺀질이」가 되고 「미룸이」가 되고, 마침내 그 평가 따라 결산의 때에는 아무런 상급과 칭찬이 없어지게 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왕은 식사예법이 엄격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손자들은 식사시간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루는 식사시간에 요크손자가 「~저 할아버지!」하며 무언가 말을 하고자 했는데,
할아버지 왕이 말을 막았습니다.
「식사 중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라고 했지? 식사 후에 하거라」

식사 후에 왕이 손자에게 묻습니다.
「아까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
손자가 말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무슨 일이든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청지기 평가의 때를 잊으면 결산의 때는 「내 놓을 것이」없습니다.
평가의 때를 기억하면 「열심이」「충성이」「헌신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인생 결산을 위해 좋은 평가를 쌓을 때입니다.

  결  론)

정신분석가 프로이드는 「인간은 쾌락의 욕망이 충족될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심리학자 에들러는 「인간은 어떤 권력을 장악했을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또 에릭 프롬은 「인간은 서로 사랑할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청지기로 태어났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디서 삶의 의미를 느낍니까?
12월은 우리 신앙의 결산을 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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