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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성찬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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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설교내용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청계천에 강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기대하면서 시민들이 교통 불편을 참아주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원합니까? 그 의미는 “사람과 자연과의 친화”입니다. 이 도심 속에 자연을 회복하고 자연환경과 도심이 서로 공존하면서 서로 사는 친화의 의미를 두고 프로젝트를 시행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두 가지 조화와 균형이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합니다. 사람이 없다면 자연을 회복할 이유가 없고 자연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연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행동할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은 함께 공존해야만 사람도 유익하고 자연도 유익한 것입니다.

  신령한 조화

  그와 똑같이 십자가와 성찬은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성찬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성찬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성찬 속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찬예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에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주님 자신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 16장21절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러 왔노라” “나는 화목제물로 죽으러 왔노라”고 친히 자기가 지실 십자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엄격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29절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의 멍에를 매고 나를 좇으라, 이 멍에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강조하신 두 십자가는 성격이 다르면서도 함께 있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지신 십자가와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올 때 져야하는 십자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있으므로 모두 의미를 살리고, 두 십자가의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속죄의 십자가와 사명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죄 값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지시고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에 이릅니다. 메시야가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자로서 져야 될 십자가를 분명히 지라고 엄중하게 가르칩니다. 37, 38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나보다 더 사랑 하면 합당치 않다고 비교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부모, 자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사랑하되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부모, 자녀는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 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이 선을 명백하게 긋고 제자도의 길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 문제를 성찬식을 통해서 엄격하게 우리 자신에게 새겨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합니다. 여기에 타협이 없습니다. 부모, 아들, 재물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습니다. 그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술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하니 술에 밥 말아 떡을 안주 삼아 먹겠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그런 선택이 아닙니다. 어느 집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사돈집이 부잣집이고 양반집입니다. 그런데 사윗감이 별로입니다. 그런데 또 한 집에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가문은 별로인데 사윗감이 참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딸을 불러 놓고 “얘야, 너 어디를 택할래?” 물어보았습니다. 딸이 하는 말이 “동가식서가숙 하지요”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지요. 신앙의 길에는 이런 원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여기에 어떤 과정보다도 출발부터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분명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전적 헌신이 있은 후에 가야 합니다. 전적 헌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시간낭비입니다.

  분명한 선택과 헌신

  요즘 신혼여행 가서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때문에 대판 싸워 편치 않는 신혼부부가 있다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결혼했으면 양쪽 다 끊어야지, 보내는 사람이나,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선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분명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결혼식에 신부가 자꾸 울었습니다. 그 부모가 보기에 참 딱해 보였습니다. ‘우리를 두고 혼자 떠나니까 우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같이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부모님이 물어 봤습니다. “얘, 너 결혼식 때 왜 울었니? 우리를 생각하고 참 안되어서 울었니?” 그때 딸의 대답은 “선 본 남자들 중에 아까운 사람들이 있어서 울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눈물을 잘 분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성경말씀의 제자도의 길에 대해서 아주 엄중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비장한 각오와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주님입니다. 그 제자들을 앉혀 놓고 십자가를 지시는 전날 밤에 주님은 성찬을 베풀었습니다. 성찬을 베풀기 전에 아마 짐작컨대 주님은 제자들에게 2-3시간 이상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4장-16장까지입니다. 그 안에 있는 말씀 중에 핵심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내가 곧 구원의 길이다.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두 번째는 제자도를 강조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를 따르는 자세로

  어린아이들의 적성을 실험하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기어다니는 아이들을 실험해 보면 앞에 장애물을 두고 기어가라고 합니다. 어떤 아이는 장애물 앞에 가서 멈춰 버리고 포기해 버립니다. 어떤 아이는 장애물을 피해서 둘러 갑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장애물을 흔들고 밀치고 가는 아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아이는 체념형, 두 번째 아이는 도피형, 세 번째 아이는 진취형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기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이런 모습으로 적용해 봅니다. 체념형은 예수 믿고 신세타령하고, 낙심 잘하고, 조상 탓하고, 남 탓하는 딱한 신자들이 더러 보입니다. 너무 우리는 체념을 잘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불경기가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습니다. 집 값이 1/5로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지진이 많이 나는지, 얼마나 태풍이 많이 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10년 이상 침체기에 있어도 국민들은 상당히 냉철하다고 합니다. 아주 어려운데도 냉철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 올라도 들끓고, 내려도 들끓고 야단입니다. 우리는 정서가 너무 풍부한 것도 탈입니다. 너무 요동을 잘합니다. 낙심을 잘합니다. 유학 가는 아이를 배웅하면서도 울고 통곡하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너무 값없이 함부로 흘리지 맙시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냉철해야 합니다. 냉철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이 냉철한 것입니다. 혼합된 것은 냉철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 분명하게 주 앞에 헌신 된 사람이 냉철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이 냉철합니다.

  도피형의 특징은 무관심입니다. 절대로 한 가운데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제 각 기관의 총회를 하고 임원을 맡으셨습니다. 심리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졌으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헌신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의 마당의 한 가운데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박수만 치고 응원만 할께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선수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달려가야 합니다. 단순히 선수가 아닙니다. 후보 선수는 참 비참합니다. 하늘나라의 주전선수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를 요구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분명히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취형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도피형으로 하시면 피곤해지고 자기 자신도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검을 잡고 전투하는 삶

  우리는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불가피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다릅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치 않은 것을 변명으로 내세우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범죄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굉장히 도전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34절부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굉장히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 온 줄 아느냐?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너희들 손에 칼을 잡혀 주러 왔노라” 그 칼을 가지고 전투하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분명히 따르려면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협을 하면, 구경꾼처럼 따라가려면 전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려면 너희 손에 칼을 잡고 전투를 해야 합니다.
  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잡혀 주신 그 칼을 여러분들은 어디서 놓쳐 버렸나요? 그 칼을 여러분의 집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 칼은 항상 우리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하고 그 칼로 우리는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칼은 에베소서 6장에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칼을 휘둘러야 합니다. 성도는 이렇게 행동해도 말씀이고, 저렇게 행동해도 말씀이어야 합니다. 좌우의 날선 검입니다. 양날을 가진 칼입니다. 성도가 가진 이 칼은 불신자를 향해서 벨 수 있고, 성도를 향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양날을 가진 칼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향해서도 통하는 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끼리도 통하는 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칼을 잡고 아들과 애비가 싸우는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바로 지고 가려면 영적전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 손에 칼을 주러 왔노라. 주님이 주신 그 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와 제자들이 지신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속죄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사명의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고 바울은 단호히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이 단호한 선택과 분명한 헌신, 분명한 희생,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도 바울처럼 오늘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자랑 할 줄 아는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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