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의 두 가지 축 (신 10:12-19)

  • 잡초 잡초
  • 202
  • 0

첨부 1


- 설교 : 이용호 목사

- 설교내용 :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이 명령을 오늘 사랑의 두 가지 축으로 계산을 하고 이 말씀이 우리 모두가 함께 은혜받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함으로 아는 사랑

  얼마 전에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서울지방법원 앞에서 50억 돈뭉치를 승용차에 싣는 실험을 했습니다. 2억짜리 상자를 25개를 만들었습니다. 또 3억짜리 10개, 2억짜리 10개도 만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2억짜리 상자가 상당히 컸습니다. 사과상자보다 높이는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권 모씨가 50억을 승용차에 실어갔다고 했지만 상대 변호인단 측에서는 50억을 승용차에 도무지 싣고 갈 수가 없다, 검찰측에서는 아니다, 싣고 갈 수가 있다 해서 이런 실험을 한 것입니다. 돈 무게와 똑같은 무게로, 부피도 똑같은 부피로 했는데 서로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상식적으로 보면 사과상자 보다 큰 상자를 25개를 쌓아놓은 것을 보면 승용차에 이게 들어가겠느냐?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결과는 거뜬히 싣고 갔다고 했습니다. 상자를 싣고는 50키로미터로도 달리고 남산 고개도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호인 측에서 패배를 하고 검찰 측에서 판정승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만으로는 사랑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50억은 결코 승용차에 못 실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니다 거뜬히 싣고 갈 수 있다 라는 생각도 하는데 실제로 실험해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명령을 분명하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게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사랑

  첫째가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이 명령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여호와 사랑이 구체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모든 도를 행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해서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런 표현만 주시지 않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사랑을 설명하는 내용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 마음과 성품을 다해서 그를 섬기는 것이 사랑이다 라고 조건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게 내 행복을 위한 명령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되기 위해서 내가 명하는 것이다, 오늘날을 위한 명령이다, 여호와가 명하는 명령이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축에 있어서 제일 먼저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변할 수 없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그네 사랑

  두 번째 명령은 18-19절에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는데도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라” “사람을 외모로 대하지 말아라” 그리고 “뇌물을 받지 말라”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17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불우한 사람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개념이 아닙니다. 중동지방의 고대사회에서는 고아와 과부는 곧 노예입니다. 노예로 팔려가거나 노예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지 말아라” 뇌물이라는 것은 두 가지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뇌물 때문에 인성이 망가지고 도덕성이 망가지고 인간다움이 망가진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뇌물을 인하여 내가 유익을 얻으면 다른 사람이 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사람이 해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뇌물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보고 상함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이 말을 신약에 와서는 “이웃을 사랑하라” 그렇게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 축이 사랑의 축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엄격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신명기의 메시지는 이 두 가지 축을 가지고 계속 진행해 나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나그네를 사랑하라” 나그네라는 말은 이웃을 통칭해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내가 도와주어야 할 불우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의 축을 이렇게 두 가지로 연결을 하시는가? 이것은 하나님 사랑에 불완전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초신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사람이 감히 어떻게 접근합니까?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 사랑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표현이 되고 이해가 되고 하나님 사랑에 실현으로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길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이웃 없는 지킴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것도 이웃사랑의 표현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현

  그렇게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에 실현의 길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독단적으로 완성시켜 갈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의 깊은 속성의 내면이기 때문에 사람이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사랑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이 통로가 도덕론자들이 말하는 그런 개념에서 이웃이 아닙니다. 그 이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의 도구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죄인이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고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신명기 메시지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구제 십일조’ 란 말이 나오는데 이웃을 위하여 3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이한 십일조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이고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이웃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만 우리가 이웃 사람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품은 목숨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믿음의 길과 그의 도를 행하는 이 율법의 길을 엄격하게 제시하고 그 길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문 사거리에 보면 금화터널에서 고가로 가지 않고 사거리로 내려오면 사직터널 쪽으로 직진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매일 수시로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가끔 보면 눈치봐서 직진하는 차가 가끔 있습니다. 굉장히 아슬아슬 하고 위험합니다. 가지 말라는 그 이정표를 귀찮아합니다. 나는 이게 편리하고 좋은데 이정표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지 말라고 하는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가면 내게 화가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의 행복을 위해서 명하는게 아니냐” 이 사랑의 명령은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명령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정표는 우리를 귀찮게 하기 위해서 붙어 있는게 아닙니다. 가지 말라는 이정표, 가라 하는 이정표, 그것을 귀찮다고 역행을 하면 우리에게 큰 위험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귀찮고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말씀은 정도로 지켜 가야 합니다.

  사랑의 바탕 위에서

  오늘날 교회교육은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신이 오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게 기독교교육의 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랑의 축을 실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게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알맹이 없는 교육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난 과거역사 가운데 1919년 3.1운동은 여러 가지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당시에 불교도가 3백만명, 천도교가 2백만명, 기독교인들이 35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전체인구의 11.2%라고 합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중에 기독교인은 16명이었습니다. 일본 총독부가 발표한 통계입니다. 그 당시에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 중에 천도교도들이 1,063명, 유교도들이 55명, 불교도들이 45명, 기독교인들이 2,039명이라고 총독부가 발표했습니다. 그 중에 나라를 위해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60%가 기독교인이었다 라고 통계를 냈습니다. 여호와 사랑과 나라 사랑이 함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고는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 믿음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그 애국심이 하나로 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 검찰에 불려가서 심문을 받을 때 추상같은 호령을 받았습니다. “이봐, 누가 시켰어. 너희들 배후에 누가 있는 거야. 누가 감히 대 일본제국을 향하여 이런 대항을 하라 했나. 배후를 대라” 그러니까 이상재 선생이 싱긋이 웃으면서 “하나님이 시키셨소. 왜?”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민족사랑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그 지조와 강렬함은 참으로 놀라웠다고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연약함은 바로 이런 불균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불균형은 우리를 허약하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못하게 합니다. 외형적인 조건이 부족한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상당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체력도 영양의 불균형이 있으면 운동의 불균형이 일어나면 신체기능도 안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도 도덕성을 가지지 아니하면, 권력도 도덕성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 지식으로 사람을 해치고 권력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가치가 있고 거기에는 균형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 축을 이룰 때만이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한없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권을 존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북한정권만 아니라 오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행태도 사람을 망가지게 하고 인성을 망가지게 하고 도덕성을 파괴시키는 행위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자와 배운 자들에게 불균형의 이 심각함이 오늘 우리 사회에 위기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

  청소년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어떤 변호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도 공부를 잘한 수재이지만 자기가 자라왔던 주변의 친구들을 가만히 보면 도덕성이 망가지거나 인성의 불균형이 일어나 비참해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덕 변호사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망가지게 하는 줄 아십니까? 악덕 변호사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억울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 현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TV에 사례로 취재까지 되고 있습니다. 그 지식, 그 지위, 자기가 갖고 있는 그 모든 은사들이 인격성이나 도덕성이나 신앙의 가치와 축을 이루지 아니하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돈이 도덕성과 인격성의 가치와 결부가 되어야 합니다. 인격성을 잃어버린 돈, 인격성이 망가진 사람한테 돈이 잡히면 안됩니다. 도덕성이 망가진 사람에게 돈이 잡히면 무서운 도구가 됩니다.

  신명기 메시지는 모세의 입장을 이해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신명기 메시지는 이미 하나님 백성들에게 들려진 메시지입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에게 반복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장의 메시지도 앞의 6장에 나왔던 것을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똑같은 말씀을 거듭거듭 호소하시는가?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탄식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영천교회 성도들아, 오늘날 여호와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생활에 표적을 못 맞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거기에 과녁을 맞추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 앞에 자꾸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가 네게 요구하는게 무엇이냐?” 너희들이 들었으면서도 왜 응답을 못하느냐 라고 하면서 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라”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에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탄식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은 아름다운 능력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의 축이 바로 형성된 균형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생각하고 느끼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실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연구하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사랑의 실행이지 사랑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실행의 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모두가 새기고 우리 교육의 본질도 이 사랑의 축을 형성하는 교육으로 더욱 강화되어가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