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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돌아봅시다 (히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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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흔히 ꡒ남의 일 참견 말고 네 일이나 하라ꡓ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이 일 저 일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새 천년 접어들었는데도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는 정말 남의 일 참견 말고 너의 일이나 하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은 너무 다른 사람의 삶에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은 서로 붙어있는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삶은 서로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현대인의 기본 윤리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목적이 이끄는 삶을 공부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면 남는 것은 관계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ꡒ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ꡓ(롬12: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관계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같은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 서로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가족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면 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ꡒ너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ꡓ(갈4:7, NLT)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가족관계는 혈육의 가족관계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관계는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가족관계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지만 다만 일시적일 뿐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므로 형제간이라도 잘 만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멀리 사는 형제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더 낫다고 해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만났지만 이혼으로 인해서 본래 관계가 소멸되기도 합니다. 혹은 나이가 들어가므로, 아니면 죽음으로 깨어지곤 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영적인 가족관계는 영구적입니다.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지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피로서 맺어진 관계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것은 보배로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예배하는 우리 사이에서는 ꡒ네 일이나 신경을 쓰라ꡓ고 말하고 끝나는 사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기일에만 관심 쓰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에서 자랄수록 하나님은 우리 일에만 신경 쓰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의 관계가 성숙해 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ꡒ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ꡓ(빌 2:4) 자기 일을 잘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알뜰살뜰 챙겨주는 것을 보면 하늘아버지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지 믿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속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에덴동산 같은 완벽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ꡒ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사이에서 사람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소속되어야 신앙공동체에 소속되어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 신앙생활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께 속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 속하고 여러분이 그분께 속하면 우리는 같이 서로간에 속해 있습니다. 서로 함께 사역하도록 부름 받았고 서로 함께 격려하도록 부름 받았고 서로 함께 한날 하늘로 부름을 받을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 영광스러운 기업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홀로 지내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께 속해 있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이제 울산교회 교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요구조건이나 기대사항 없이 그냥 교적부에 이름만 올리는 것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비전 성취를 위한 40일 훈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다른 믿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영원히 서로에게 속한 존재인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ꡒ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ꡓ(롬12:5)

이제 우리 모두 진리를 들으면 별반 거부감을 갖질 않습니다. 그럴리가 만무합니다. 특별히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책을 잘 읽은 성도들이라면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포함된 바를 실천하려고 하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식으로 나도 그 사람을 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대우를 할 만한 사람이냐 그것을 따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밑바탕에는 ꡒ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ꡓ하려는 이런 성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잘해 주었으면 나도 잘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소홀하면 나도 그 사람에게 잘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공식입니다.

신앙인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에 따라서 나도 신앙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바깥사람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요? 용서할만하지 않다고요? 맞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용서하라고 명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 우리가 용서받을만 해서 용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높이 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여러분과 서로간의 깊은 관계 만들기에 대해서 “서로 돌아봅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배운 방식대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법도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할 뿐 아니라 그 일에 행동으로 개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ꡒ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ꡓ(히3:12-3) 성경은 말합니다.

피차 권면하라 는 말을 여러분 눈여겨 보십시오. 호소하라 간곡히 부탁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피차 권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려면 여러분 자신이 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고 살펴야 합니다.

안하던 행동을 하면 왜 저렇게 행동을 할까? 생각해 봐야합니다. 여러분 40일 동안 같이 만나던 사람이 지난 금요일 안 나왔습니까? 살펴야 됩니다. 전화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아 지난 주일 바빠서 못 갔습니다. 다음주일에 가지요” 그럴 겁니다. 그리고는 다음 주일에 안 올 수도 있습니다. 40일 동안 같이 열심히 만났는데, 몇 주간 만났는데. 전화하면 박절하게 할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핑계합니다. ‘바빴다’고 그러고, ‘다음에 가겠다’고 하고 그리고는 안 오는 겁니다. 한두번 빠지다 보면 점점 멀어지고 멀어지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보다 타협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 욕하고  돌아서는 일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바쁘다고 핑계하고 연락 오면 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로 점점 타협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결서약을 한 열 다섯 살 난 청소년이나 예수 믿기로 결단한 쉰 다섯 살 된 어른이던지 타협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 들어 보셨지요?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당장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에 넣어 주면 가만히 있습니다. 불을 밑에서 때도 따뜻하니 그대로 있어 자기가 거기서 삶기는 줄 모르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유혹이 무서운 것은 그렇습니다. 한 단계의 뜨거운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그렇게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잘 나오던 사람이 새 차를 사더니 차를 씻고 닦고 광내고 몰고 나오고 하다가 한 주일 빠지고 두 주일 빠집니다.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엄마 아빠 손에 붙잡혀 가지고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어른 예배라도 참석을 했는데 그렇게 하던 아이 같으면 서울에 가서 대학을 가면 나올까요 안나올까요? 3년 동안 데리고 다닐 때는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꽝” 입니다. 부모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를 만끽한답시고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합니다. 3개월 보장도 안 됩니다. 대학 졸업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잘 하겠습니까? 천만에요.

신앙도 없는 사람의 딸들을 사귀면서 비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수용할 것이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타협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딱 한번만 절호의 찬스”인데 그럽니다. 중년이 되어서 사업을 해도 기회는 또 찾아옵니다. ꡒ한 건만 하자” 는 것입니다. “한 건만 잠깐 눈감고 하자”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 오시면서 빈터에 3층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어떤 장립집사님 그러시더라고요. 자기가 로또를 사서 당첨만 되면 그 앞의 땅을 다 사서 헌납하겠다고, 여러분 당첨 될 리도 없고요 되기 전 마음이 당첨되고 나면 그 땅  교회 줄 리도 만무합니다. 그리고 복권 당첨된 돈으로 헌금하는 것 저는 사절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물질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지 그렇게 일확천금 한 돈으로 교회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 가려니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돌아 보아야 합니다. 소그룹은 서로를 잘 보살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20명을 한 그룹에 넣어서 소그룹이라고 해요.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말하는 것하고 실천하는 것하고 같지를 않습니다. 수년 전에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설교를 하면서 자기는 물량선교는 안 한대, 말은 그런데 들어보니까 내용은 그것이 물량 선교였어요. 20명 앉혀두고 소그룹 한다고 해서는 말이 아닙니다. 서너 명씩 앉아야 서로 살필 수 있고 서로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40일 동안 잘 해 오셨습니다. 연말까지 계속해서 해 갑니다. 기억하십니까? 40일 동안 해 오던 소그룹 연말까지 일단 갑니다. 가면서 저희들이 다시 한번 정리를 하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피차 권면하기 위해서는 행동의 변화를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영적으로 방황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는 이것을 인식하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부딪혀서 이마에 피가 뚝뚝 떨어지면 눈이 제일 먼저 발견합니다. 그렇지요? 눈이 보면 어디에 신고하지요? 119에 신고합니까? 아닙니다. 자기 두뇌에 연락을 합니다. 지금 피가 떨어지고 있다 그러면 두뇌는 어디에 명령을 내리지요? 오른손보고 ꡒ눌러라ꡓ그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오른 손이 “못하겠어요. 왼 손이 놀고 있는데 왜 나만 시켜요” 여러분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라고 한다면 다른 지체가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고 있는데 내일이 아니니 관심을 꺼야지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려고 하니 어색하던데요? 귀찮은데요? 왜 남의 사생활에 개입해야 됩니까? 남이 아니라니까요. 한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펴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의 삶을 살피겠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서로 무관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몸이기에 서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뭔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도 있습니다.

지체가 하나님으로 멀어지고 있는데 두 주 세 주 빠졌는데도 내 살기 바빠서 챙기질 않습니다. 챙기려면 ‘좀 잘해 봅시다’라고 말하니까 좀 켕기잖아요. ‘나는 얼마나 잘하는데 다른 사람보고 잘해 보라니’여러분이 완벽하지 않아도 개입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완벽해 진 다음에 개입하려면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한번도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살아야만 합니다.

개입하셔야 결혼관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을 구하고 가정을 구하고 삶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입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아직도 남은 고민들이 있습니다. 불신결혼을 예사로 하고 있는 지체를 보고도 교회가 적극적 개입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어떤 분이 자기 자녀가 불신결혼을 하는데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왜 광고를 실어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해 왔습니다. 항의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당회까지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주보에 언젠가 밝혔던 대로 그냥 실어주기로 했습니다. 실어 달라면 불신결혼 실어주되 불신결혼을 한 사실이 교회 앞에 공적으로 공포되면 그 부모는 치리를 받는 걸로 하자고, 그냥 실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집사님 딸도 불신 결혼하네, 권사님 아들도 불신 결혼하네, 이렇게 되면 신앙 공동체가 와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실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실어드리고 대신에 여러분은 일정 기간 동안 벌 아래 있어야 됩니다. 공적으로,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책임을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육관 때문에 다시금 알게 된 사실입니다. 칼럼에 언급한대로 십 수억의 연보를 가지고 만든 연건평 천 평이 넘는 7층 건물을 두고도 모두가 제일 좋은 시간대인 오전을 선호하기에 답이 쉽게 나오질 않아서 고민됩니다. 그래서 지난 한 주간은 ꡒ자나 깨나 불조심” 그런 표어가 있듯이 “자나 깨나 교육관ꡓ그랬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물어 보았지요. 초등학생들은 어리니까 엄마하고 같이 10시, 12시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왜 중, 고등학생은 오후에 3시쯤 모이면 안 되는가 그때는 교육관이 다 비였는데 그랬더니 대답이 고등학생은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불신결혼을 해도 아무도 정색을 하고 권면이나 책망을 하는 사람도 없고 집사 집 믿음의 자녀들도 주일날 쉬지를 못하고 학원에 가도 아무도 입을 뻥긋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의 가장 왕성한 종교는 대학교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교가 최고의 종교이고, 불교 천주교 기독교 다 할 것 없이 시중만 들고 있습니다. 절에서 하는 것 보십시오. 백일기도 들어가도록 하고, 수천 배 절하도록 합니다. 어떤 교회는 수능을 앞두고 일주일 동안 학부모 기도회를 열어서 어떻든 붙게 해 달라고 마리아 앞에 가서 손을 비비고 어디든 다 그렇잖아요.

어떤 종교도 대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이 이번과 같은 수능 부정을 낳은 것입니다. 문제아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아이들이 다 했습니다. 남학생들만 한 것이 아니고 여학생들도 했어요. 올해만 한 것이 아니고 선배들이 하던 대로했을 뿐입니다. 부정을 저지르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청소년을 양산했습니다. 청소년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어른들의 잘못이지요.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면 신자들의 잘못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신자들의 잘못이라니까요. 

이제 좋은교회 울산교회는 오늘의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방관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일날 학원을 가는 청소년은 내일 주일날 사업을 하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오늘 대학가는 것이 중요해서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하면 내일 돈버는 것이 중요해서 사업장 문 열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부모가 오죽해서 자기 아이를 주일 오후에 학원에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집사가 기본적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 물론 교단에 따라서 주일 의식이 아주 희미한 곳도 있습니다. 전혀 죄책감조차 중직자들은 느끼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 같으면 그렇지 않겠어요? 안 믿는 아이들이 모두 다 가니까 불안한 겁니다. 성적도 제대로 안 올라가는 놈이 주일까지 논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가라는 겁니다. 이해는 되지만 도움은 안 됩니다.

주일 오후에 학원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셨습니까? 자고 있습니다. 하품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낳기는 했지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힘써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 되는 날에는 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야 능률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주일날 하루라도 왜 쉬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다만 불안해서 그래서 어떻게 될지 불안하니까, 조금 찜찜하지만 학교 마치고 고등부 빨리 마치고 학원에 가라는 것입니다.  아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부모들은 고등학교 다닐 동안 고등부 생활하지 말고 나와 같이 어른예배만 잠깐 드리고 집에 가서 공부하라고 그럽니다.

그래요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고등학교 때만 그렇게 하고 대학가서 신앙생활을 잘 하면 무슨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아는 대로는 고등학교 때 아이를 그렇게 키워서 대학가서 신앙 문제 때문에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도 없는 배우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결혼하겠다고 들이미는 것이고 자기가 자식을 못 키우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도 안하고 주보에 안 실어 준다고, 이렇게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입시를 위해서 신앙의 정조가 오늘 유린당하면 내일 사업을 해도 무슨 일이라도 다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허물어진 청소년의 제단을 바로 쌓기 위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 주일 우리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요?

열심히 일하고 하루 쉬도록 하신 창조주의 뜻에 따라 주일 온전히 쉬도록 아이들에게 그렇게 지도하면 올해 수능시험 점수보다 그렇게 일년 동안 우리가 키우게 되면 점수 못 미칠까요? 저는 생각합니다. 

52주 동안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하면 주일 하루 쉬면 쉴수록 좋은 성적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아니하신다 할지라도 여러분과 저는 신앙대로 살아야하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렇게 하면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좋은교회 울산교회가 울산에서 제일 많은 성도가 모여서가 아니라 제일 큰 교육관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대로 살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있는 교회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눈빛이 반짝거리는 청소년들을 만나보려면 울산교회를 가봐라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좋은교회 울산교회는 내년부터 부모와 함께 하는 청소년 예배를 신설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마다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축복해 주고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52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면 올 연말 성적보다 내년 연말에 못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저가 워낙 아이들을 키울 때에 “대학, 대학” 하지 못해서 남의 자식 데려온 자식 키우듯이 하긴 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제 아이처럼 키우겠습니다. 낳은 자식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데려온 자식은 정성껏 해야 된다고 그러데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보다는 더 많이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부모님들도 함께 노력해야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계속되는 이 부정의 파문들이 뉴스시간을 메우고 있지요? 직장에 취직해도 돈 된다면 그것이 민족을 팔아먹는 일인지도 모르고 정보를 팔아넘기지요. 국가에 근간을 흩뜨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진급 심사에 부정이 오가지요. 국회의원들은 한 표 찍을 때 절대로 안 그러는 것처럼 하고서는 하는 것 보십시오. 이런 세상을 우리시대에 마감하면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고통 하는 것으로 끝을 내지 왜 우리자녀들에게까지 이렇게 답답한 현실을 약속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 올 곧은 신앙의 청소년들을 키우는 일에 마음을 합해 봅시다. 우리 아이들 고등하교 다니는 3년 동안 부모가 눈물로 기도하면 여러분의 30년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냥 사람의 말로 듣고 여러분의 가치관에 따라서 시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서 그렇게  3년 보내면 30년 동안 여러분의 자녀 때문에 고통당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런 부모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어른예배에 참석하고 가서 공부해라’ 그 아이 때문에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눈물 흘리는 부모들 보아 왔습니다. 이왕 흘릴 눈물이면 우리 자녀들이 청소년기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지낼 때에 그들을 위해서 한번 기도해 봅시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이일을 하기에 앞장서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학부모로서, 신앙의 학부모로서 함께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 아름다운 울산교회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이제는 살아가야 합니다. 되는대로 산 것은 이전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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