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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위기와 도움의 손길들 (삼상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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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한 해동안을 우리에게 주시고, 한 해를 믿음으로 결산하고, 새 해를 출발하는 당회주간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도 우리 주님이 청지기에게 결산을 원하실 때 넉넉하게 주님 앞에 열매를 드릴 수 있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의 반열에 모든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고난을 받을 때 보내주신 많은 돕는 손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단이라는 사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자기 아들과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 자기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가장 가까운 우정을 나누는 친구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들에게조차 친구를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모든 신하들에게도 다윗을 보는 즉시 죽이라고 공개적으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왕이 다윗왕을 죽이라고 하는 것을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다윗은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만찬에 초대받아서 혹은 수금으로 연주를 하는 장면에서도 두 번이나 창을 피해야 했고, 자기 딸을 아내로 맡게 해서 왕의 사위를 하게 했는데, 그것을 축복의 도구가 아니라 다윗을 해치려고 하는 음모가 되어서 사울왕 스스로 딸 미갈을 주어 올무가 되게 하리라고 하는 참으로 놀라운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딸을 주어서 사위를 삼고 사위가 되면 신하보다도 자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신하의 관계에서 이제는 사위와 장인의 관계로, 그러면서 그는 18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겠다. 폐백 대신에 블레셋 사람 양피 100개를 베어가지고 와라.

결혼식을 하면 폐백 드리는 시간이 있지요. 구약성경에도 이 폐백에 대한 말이 나오는데, 원래 이 폐백이라고 하는 말은 대추와 말린 꿩고기를 놓고, 그것을 처음 결혼을 하고 나서 시댁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때에 드리는 선물이 바로 폐백입니다. 요즘은 꿩고기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보통 다들 잘 디자인해서 폐백닭으로 사용을 하고는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간은 정확하게 남편이 아내를 주셨기 때문에, 아내를 주신 것에 대해서 보상, 신부의 몸값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지금 사울왕은 사위가 된 다윗에게 내가 그 폐백에 대한 값으로 신부의 몸 값으로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블레셋에 가서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고 양피를 베어오면 내가 신부의 몸값을 받은 것으로 하겠다. 이렇게 제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딸을 미끼로 해서라도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해서 안 되니까 블레셋이라고 하는 다른 이방의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하셨고, 블레셋에서도 혹은 그 많은 죽음의 위협에서도 다윗을 지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딸 집에 자객을 보내서 다윗을 죽이려고도 했었고, 라마 나욧에까지 자객을 보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자객들이 예우를 하는 놀라운 변화의 모습들을 통해서 사울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를 맛보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엄청난 고난과 죽음의 위험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도움의 손길이 바로 요나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다양하고 여러 가지지만, 사람을 통해서 도우시는 손길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변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세우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로부터 공개적으로 듣고 굉장히 마음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나와 다윗은 정말 우정을 나눈 형제의 우애를 나눈 그런 사이입니다. 서로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뢰하고 있는, 여기보면 다윗을 심히 기뻐했다. 서로가 서로를 기뻐하는 아주 존중하는 그러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고민하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 친구에게 가서 아버지가 너를 나와 신하들에게 찾기만 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당분간 은밀한 곳에 숨어있으면 좋겠다. 내가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 이후의 일을 또 소식을 전해주리라. 위험을 알리고 도피를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나단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사실 아들이지만, 왕과 신하의 관계이기도 하고, 이미 사울왕에게는 악신이 임해서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정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아버지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한 사울을 찾아갑니다. 4절에서 5절은 요나단의 왕을 향한, 아버지를 향한 충고와 직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이 사울왕에게 표현한 단어 중에 아주 대단히 놀라운 단어가 있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을 한 단어인데, 그것은 왕이여, 신하인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십시오.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당신의 계획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행위입니다. 이쯤되면 다윗은 정말 목숨을 걸고 자기를 위해서 변호해 주고, 또 왕에게 바른 말을 해주는 우정 어린 친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그랬는데, 바로 이 요나단을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다가 아버지가 나를 죽일 수도 있을 터인데, 자기의 딸의 사위를 삼아서 그런 관계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이고 보면, 자기가 아버지에게 어떤 해를 받을 지도 모르는데, 요나단은 그러나 충고하고 있습니다. 직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하는 행위입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지도자 주변에 바른 이야기들을 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이승만대통령 시절에 경무대에 계시던 그 분들, 주변에 장관들, 비서관들은 항상 대통령에게 모든 것이 잘 된다고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느냐?’, ‘잘 먹고 있습니다. 올해도 풍년이 들어서 먹고 남습니다.’ ‘근데 소식이 들리는데, 배고프다고 그러는데, 흉년이 들었다고 그러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한번 남대문시장이라도 가 봤으면 좋겠는데..’, ‘거기 뭐 하러 가십니까?’ 그래도 가보겠다니까 결국은 남대문시장 쌀 파는 상인들에게 대통령이 물어보면 얼마라고 이야기하라라고 다 해놓고 거기 가서 ‘쌀 값이 얼마입니까? 요즘 어떻습니까?’, ‘아이고, 각하, 풍년입니다. 먹고 남습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다 막아버렸어요. 대통령은 돌아와서 우리 국민이 잘 사는가보다. 배고프지 않고 지금 먹고 살고 있는 그런 형편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를 멍들게 하는 것은 사실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만약에 요나단이 아버지의 계획을 다윗에게 알리는 것이 고자질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예요. 오히려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다윗, 기뻐하는 다윗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저 입만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왕에게 나아가서 그러한 일이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왕에게 직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직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요나단의 목은 순식간에 달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는 책임있는 행동이 뒤따라가야 합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입만 살아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 책임이 추궁되면 꼬리를 내리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요. 이런 요나단의 모습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데,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고난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윗인데, 이 다윗에게 자꾸만 어려움이 자꾸 찾아올까? 왜 사울은 끊임없이 이 다윗을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할까?

다윗이 고난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놓이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른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간사하게 행동하고,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했다면, 다윗은 이런 어려움을 덜 받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기를 향해서 만만이라고 천천이라고 말할 때, 화를 내면서 주책없이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고 막 화를 냈다면, 왕의 마음이 그래도 저 친구가 나를 조금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마음의 서운함이 조금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적으로 왕의 마음에 아첨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항상 그의 행동은 정정당당했습니다. 다윗의 행동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라고 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사람이 나를 뭐라고 판단할까? 라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실까가 더 그에게는 중요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른 일을 한 다윗에게 끊임없이 고난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그런 고난과 역경, 죽음의 위험을 계속 겪으면서도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일단 살고 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될만도 한데, 다윗은 절대로 인간적인 방법은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왕을 찾아가서 권면합니다. 그것은 잘 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 범죄라고 하는 히브리 어휘의 뜻은 표적을 놓치는 것이라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왕이 이렇게 명령하고,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정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지금 왕이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간적으로 왕의 창에 날아오거나, 경호원의 칼이 나아와야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6절에 보면 사울왕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서 이렇게 반응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왕의 마음이 그 아들 요나단의 그 생명을 건 충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약속하는데, 다윗이 죽는 일은 없을거야. 하지만 이 사울왕에 이 약속은 마치 국회의원 선거때, 대통령 선거때 끊임없이 남발하는 공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정치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말 대통령을 잘 하려면 대통령 후보 시절에 했던 공약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께서 후보 때 공약했던거 사실 마음에도 없던 거 아니겠어요? 그거 실천해 보려고 억지로 밀어 붙이다가 결국은 대통령의 체면도 손상되고, 그 지역의 국민들 마음도 상처를 입고,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후보 때 공약했던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그 정치가의 말은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은 후보 때 했던 말들은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점수를 얻기 위해서, 표를 얻기 위해서 못할 말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것을 또 믿고 하는 사람들도 순진한 것이지요.

지금 이 다윗,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는 이 말은 정말 하늘에 뜬 공약이었습니다. 다윗의 안전을 사울은 잠깐동안만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전갈을 넣었습니다. 왕의 마음이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 했으니까 이제 다시 궁으로 돌아와도 되겠다. 왕 앞에 다윗을 인도하고, 다윗이 왕 앞에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간은 아주 잠깐동안이었습니다. 이미 사울의 마음 속에 성령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령이 사탄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그런 분별력과 힘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하려고 해도 머리가 짤려버린 삼손처럼 ‘이제는 내가 정신차려야지.’ 했지만, 이미 그의 두 눈은 갈고리로 뜯겨 나갔고, 그의 두 팔은 이방 신전의 기둥에 묶여서 맷돌을 돌리면서 수많은 이방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사로 쓰임 받았던 저 인간이 우리 앞에서 저렇게 두 눈을 빼앗기고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모습을 보라고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어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 때는 너무 늦었어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사실 우리가 몰라서 지난 한 해 동안을 보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열매가 없다면, 혹 하나님께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다면, 하나님 앞에, 성도들 앞에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또 한번의 기회를 요청할 것입니다.

한 해만, 한 해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고백할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다윗이 끊임없이 고난을 받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살수록 그에게는 고난이 다가옵니다. 하나님 영이 가득하면 가득할 수록 사울에게는 악령이 역사해서 다윗을 끊임없이 죽이려고 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난이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모습을 여러분들은 지금 본문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난, 그런데 이 다윗의 고난이라고 하는 이 모습을 여러분들이 그냥 육신의 생각만 가지고 보면 다윗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다윗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다윗은 얼마나 인생이 피곤했을까?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의 의로 정직하게 살면서 다윗처럼 그렇게 고난만 주어지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적당하게 살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윗의 고난을 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고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사랑을 베푸실지라도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고, 죽이게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던 그들이 그 손을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던 그 손들이 어느 날 그들은 예수를 못 박으라는 손으로 바뀌어졌어요.

여러분, 나 자신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제일 실망할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초신자들이 조금 어렵게 하거나, 믿음이 없는 분들이 어렵게 하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별 일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사님네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술을 잔뜩 먹고 와서 밤새도록 목사를 욕하고 문을 발로 차고, 다 때려 부숴요. 그런 일 참 많았습니다. 욕을 먹고, 멱살을 잡히고, 시달려서도 다음날 아침에는 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리고 그 남편의 이야기를 집사님에게 절대로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집사님은 자기 남편이 지난 밤에 무슨 일을 목사에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들은 아무리 당해도 서운하지 않아요. 왜? 그럴 만 하니까... 하지만 제가 신뢰했던 사람, 제가 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 저도 위로 받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이 목사의 의중과 목사의 심령과 어긋난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는 너무너무 마음의 상처가 되어졌습니다. 뭐가 막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정말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수준이었습니까? 이 정도 밖에 안 되었나? 하면서 제가 막 무너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깨어 겸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리를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순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종의 자리처럼 비워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그들의 손길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조차도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 줄 믿습니다. 그 한 마디를 위해서 주님은 당신의 인생을,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보혈을 우리에게 쏟아부워 주신 줄 믿습니다. 이게 주님의 구속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속에 사역 속의 그 안목으로 보자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2장 19- 20절은 말씀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움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노라.’ 애매히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정말 불리하게 이야기를 듣고, 평가를 받을 때, 단순한 사람들은 얼굴이 빨개지고, 막 입에 거품을 물고, 막 열을 받아가지고 그러지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고난을 받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견디고 참으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의 고난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요. 이 말씀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우리가 숲 속에 들어가서 헤메면 잘 모르는데, 멀리 산 정상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속사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뭐가 보여요? 지금 사울을 중심한 인본주의적인 왕권을 대신해서 다윗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중심해서 하나님 중심, 신본주의에 하나님 중심에 왕권을 새롭게 세우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순간순간에 그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행동들이 나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의 흐름 앞에 그것들은 낙엽과도 같아요.

여러분 개미가 지나가는데, 큰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주먹만한 바위가 있습니다. 개미에게는 수백배, 수천배 큰 바위이지만, 여러분들은 그냥 두 손가락으로 들어다가 옮기기 쉽지 않아요?

지금 사울 입장에서는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할만큼 수없이 많은 고난과 난관이 그의 앞에 다가오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중심의 왕권을 세우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섭리 앞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놀라운 역사가 이 다윗을 통해서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그 계획에 도전하는 행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사울은 길르앗전투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 다윗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사람을 통해서, 때때로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을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급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당신의 손길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우시는 손길이 언제든지 예비하시고, 다윗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의롭고, 정직한 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은 돕는 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견디게 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곤고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자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이기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다윗은 인간적 방법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을 통해서 요나단을 통해서 수많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때때로 자연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종을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손길에 확신을 가지고 주를 바라보며 새해에도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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