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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서 (사 41: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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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직 목사 (새문안교회)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들의 삶의 환경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젖과 꿀 흐르는 땅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면적 전체가 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니다. 남한의 1/4도 채 안 되는 땅이지만 지형과 지세가 다양하다. 북쪽은 레바논 산맥과 고원(高原)으로 되어 있다.

동쪽은 요르단 계곡, 서쪽 지중해 연안평야이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반사막지대이다. 최남단은 이스라엘 면적의 1/2에 가까울 만큼 광대한 네게브 사막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동서와 남북이 서로 다른 지형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다. 식수와 농업용수로 갈릴리 호를 이용하는데 비가 오는 계절인 겨울에 가뭄이 들면 물 사용에 큰 위협을 받는다. 갈릴리 아래 쪽에 있는 사해는 식수로 사용할 수  없고, 생물이 살지 못하는 곳이다.  예루살렘도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동서로 분할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은 유대인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약 20%에 해당하는 아랍계 팔레스타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작은 나라는 사막과 평야가 함께 있는 것처럼 유대인 거주 지역과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이 나뉘어 있다. 이렇게 상반되는 것들이 공존하는 것은 오래 역사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형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 가운데도 이러한 개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흉년과 풍년, 물 부족과 샘 근원이 함께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흉년을 피하여 내려 갔던 땅에서 농사를 짓고 흉년 가운데서도 100배나 수확을 거뒀다. 또 이삭은 우물을 파면 파는 곳마다 그 곳에서 물이 나왔다. 우리에게는 경이로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삭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 고 있는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림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야기나 고대 페르시아의 2인자였던 하만과 가녀린 여인 에스더의 이야기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극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에 이렇게 불 균형을 이루는 사건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옛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약 700만 명 정도의 이스라엘에게 거대한 아랍세계가 꼼짝 못하고 있다. 성도 여러 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 졌을 때가 있었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 졌을 때가 있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판단과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사자의 무서움을 인정하지 않는다. 풀무 불의 위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골리앗 같은 거인의 힘이나 하만 같은 권력가의 힘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계획이나 지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풍요로움을 풍요롭다고 하지 않는다. 풍요 가운데 빈곤이 있고 빈곤 가운데 풍요로움을 말씀하는 것이 성경이다.
또한 성도가 겪는 슬픔 역시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에스더 9:22절에는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고린도전서1:27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나 미련한 사람들은 지혜롭게 하신다.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시고 비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오른 손을 빌려 주신다.
슬픈 자들,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마음을 주신다. 우리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상황을 잘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 속에 채우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오른 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과거를 돌이켜 보라! 내 자신이 어느 때 평안하고, 자신감이 넘칠 때가 언제였는가? 주님 안에 있을 때였는가? 밖에 있을 때였는가? 지금처럼 이렇게 현실이 어둡고 막막할 때 우리는 무엇을 겪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심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그 갈증으로 혀가 마르고 있다. 성도 여러 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위태로운 순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장기간 투병하는 환자들이 혀가 마르고 작게 줄어들면 별세가 가까운 것으로 판단을 한다. 여러 분 혀가 마르는 현상은 대충 견딜 만한 갈증이 아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쉬운 상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혀가 마른 사람이 누구인가?" 이미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느 한 가지가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어느 한 가지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미 이러한  현실을 겪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피곤하고 지치며 영적으로는 죽어 가고 있다.

여러 분!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새 힘이 있는가?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려고 하는가? 아니면 힘들면 힘 드는 대로, 지치면 지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성도 여러 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내 오른편에서 나의 오른 손을 꼭 잡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 하나님은 요셉의 감옥에서 역사하셨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신음하던 이집트에서 역사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던져졌던 풀 무 불 속에서도 역사하셨다. 그리고 사자 굴에서도 역사하셨다. 본문18절을 보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역사를 위해 광야에 나오셨다.  헐 벗은 산과 골짜기와 사막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혀가 마를 때까지 응답을 받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제까지 버려진 땅으로 만 알았던 광야가 하나님의 일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헐 벗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와 사막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설명해 준다. 헐 벗은 산에 홍수가 나고, 골짜기에 어둠이 찾아오고, 광야와 사막에 물도 없이 방향을 잃으면 인간은 속수 무책이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여러 분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가?

불평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불평과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애굽에서 탈출한 것은 사실인데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고 실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걸어와 홍해 앞에서 절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광야 길을 걷다보면 이와 같이 불평을 늘어 놓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암담한 현실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문제는 더 나빠진 상황이 아니라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천년, 2천년 그대로 있는 것이 문제이다. 죄인이 죄 가운데 그대로 있는 것이 그것이 진짜 문제이다. 여러 분이 광야 한 복판에 그냥 서 있다면 그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러나 날마다 피곤하고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광야를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소망이 있다. 산더미만한 파도가 덮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애굽에서는 홍해를 건널 수 없다. 광야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이 절망과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기독 실업인 중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이 20대의 한참 나이에 근육무력증에 걸리게 되었다. 한숨과 절망의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지만 그에게도 기쁨은 있었다.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 만큼은 기쁘고 즐거웠다. 희망과 용기가 솟아났다. 그는 기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는 2년 동안 누워 있으면서 3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는 수천권을 독서를 통해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얻었고 2평짜리 가게를 얻어 시작한 일이 큰 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는 현재 자체 상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의류 업계에 대 기업을 이루었다. 인간에게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전혀 없다. 불평하는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려거든 하나님을 찬송하라! 두려움으로부터 승리하려거든 기도하라! 과거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현재와 미래에 적용하여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을 더 두렵게 한 것은 뒤 쫓아오는 애굽 군대 때문이었다. 애굽 사람들의 압제와 착취와 괴롭힘 속에서 벗어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성도들의 피난처로 삼으라는 뜻이다. 여러 분들도 여러 분 현실에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특히 더 나빠진 변화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것이 질병이든 경제적 문제이든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계속해서 실패만 하더라도 그 변화가 중요하다. 애굽 군대가 뒤 쫓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럴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분이 지금 실망스러운 변화를 겪고 있다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 우리 나라를 "헐벗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와 마른 땅과 사막" 한 가운데로 이끌어 내셨다. 우리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다시금 경제적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를 구경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능력을 행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녀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광야를 걷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해보라! 본문에 나오는 "헐벗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와 마른 땅과 사막"이 우연한 곳이 아니다. 가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곳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백성들을 이 곳에 가져다 놓으신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작정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야곱의 도피 생활도 광야와 같은 곳이었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의 왕궁에서 미디안 광야로 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성령님께서 성자 하나님은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 곳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셨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
사도 바울도 회심한 후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광야에 나가 훈련을 받았다. 우리가 광야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일이다.

그래서 에스겔 20:35절은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민족의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거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너희를 심판하겠다"(표준새번역개정판)고 말씀하셨다. 풍요로운 세상에서는 인간이 주인이 되기를 자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끊임없이 광야로 이끌어 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인간은 무력하고 무능한 것을 깨닫게 하신다. 광야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뿐이다.  마태복음 11장 7절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광야에서는 세상 것을 찾아서도 안되고 찾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광야 같은 세상인가? 그러면 여러 분은 찾을 수없는 세상 것을 더 이 상 찾지 말라! 소용 없는 일이다. 연어나 송어에게는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가 있는데 그것을 귀소 본능이라고 한다. 수 만 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가도 산란을 위해서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정확하게 돌아 오는 것을 귀소 본능이라고 한다. 연어나 송어는 번식을 위해 회귀하는 데 인간에게도 더 놀라운 귀소 본능이 있다. 인간의 귀소 본능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더욱 깊이 깊이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집트는 가나안 만큼이나 복 받은 땅이다. 풍요로운 곳이다. 항상 물이 넘치는 나일강 때문에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었다. 이웃 국가들은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태양열을 싫어 했지만 이집트는 오히려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 인간은 풍요로운 땅 이집트를 항상 동경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요로운 땅 이집트에서 언제나 우리를 이끌어 내신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살던 곳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이집트로 내려간다.

그는 그 곳에서 사라의 미모 때문에 큰 일을 겪을 뻔 했다. 이삭의 때에 가서도 가뭄이 들자 그도 이집트로 내려 가려고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 순종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임하여 바벨론과 앗시리아에 멸망하기 전 애굽과 동맹을 한다. 그리고 그 곳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시야서 30장에 하나님은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사30:2).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사30:7).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31:1)고 하셨다. 여러 분! 우리가 추구했던 곳이 애굽과 같은 곳이 아니였는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이 애굽에서 풍요로움을 누린 것은 고작 3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후로 400년간 종살이를 한다. 가장 풍요롭고 안락한 땅에서 그들은 굶주리고 속박받았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동경하는 땅이었다. 그러나 애굽을 원했던 이스라엘이 받았던 것은 고난뿐 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데려 가셨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 이후에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각각의 주제가 있지만 이 책들의 공통된 주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이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은 40년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 거기엔 경제 원리가 필요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 물과 양식이 있었다. 자연 환경도 그들의 건강을 헤치지 못하였다.

애굽과 같은 풍요로운 곳에서는 빈곤하였고 광야같은 이 황량한 곳에서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우리는 이세상의 주인이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이 광야 같은 곳이 우리의 터전이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얼마나 확실하게 보여 주셨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분명히 보여 주시고 있다. 우리가 버려진 땅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가장 쓸모 없는 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가장 기름진 땅 애굽에서 가장 쓸모 없는 땅 수르 광야, 신 광야, 바란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광야를 지나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크게 행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에게는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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