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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의 신앙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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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기다림의 신앙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
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
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
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누가복음 2:25-33) 

대강절은 주님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대강절은 첫 번 탄생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재림할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
다.
대강절에 대한 교리적 지식보다는 실제적인 생활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야 오심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던 시므온과 같이 기다림의 신앙을 본받아서 우리도 재림의 주님을 맞
을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1. 시므온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 예언자들의 성취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결국 그의 기다림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를 만난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과 구별된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세상 속에서 동화되어 살거나, 아니면 그냥 체념하고 살았으나, 시므온은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신 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둡기만 한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때가 차매 하나
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는데, 그 때가 찼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더 기대할 것이 없는 가
장 어둠이 짙은 시대이었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실제적으로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끝으로 한 300년 동안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탁(神託)
전하는 선지자의 음성이 모두 사라졌던 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 요한이 나타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
리가 들려왔습니다. 모두 그가 오실 메시야라고 처음에는 알았습니다. 그 만큼 그 시대의 암흑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메시야 오시기기를 기다리며 산 사람이 시므온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은 영적인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부정과 불의가 득세한 세상이라고 해도 시므온과 같이 기다림의 신앙을 버리지 않
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보면서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믿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살면서도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오직 메시아에게만 있음을 알고 그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기다림의 신앙이 있었기에 일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항상 그 위
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어두운 세상에서 살면서도 시므온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았습니다.

2. 오늘의 크리스천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므온에게는 성령의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네가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참되게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약속이 따릅니다.
아무리 어둡고 답답한 환경에서도 성령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낙심한 심령에게도 성령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다리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삶은 기다리면서 사는 삶입니다.
어릴 때는 유명한 배우가 기다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연예인의 사진을 방에 걸어놓고 그의 싸인 하나라도 받기를 사모합니다.
어른들 중에는 주식값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하여 그런 기회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나다나엘 호손의 작품 중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의 앞산 바위 위에 인자한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과 똑 같은 사람이 나와서 그 마을의 화평과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을의 어린 소년 하나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생긴 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그 소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 그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면서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간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형성되어 갑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고통도 기쁨으로 변했네/ 고통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노라면/ 나는 어느새/ 나는 어느새/ 주님을 닮아/ 주님을 닮아가....."
라는 감동적인 찬양이 있습니다.

3. 우리도 시므온 처럼 크고 위대한 것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의롭게, 경건하게 살게 됩니다.
그것은 환경의 지배를 극복하게 됩니다. 사회가 다 썩고, 정치가 다 실망을 주어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
는 사람들에게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가리어 태양을 볼 수 없는 궂은 날에도 태양은 구름 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약속대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이기에 산 소망의 기다림입
니다.
로마서 8: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
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다림은 재림의 약속을 한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초림의 마구간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장 나팔 소리에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허랑방탕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강절기에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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