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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감(同感)하는 자와 일하시는 하나님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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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은호 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지난 2001년 10월 7일 주일에, 동안교회와 학교법인 숭의학원의 후원으로 김동호 목사님과 일본 동경한인교회에 가신 오대식 목사님,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한 후, 3년 2개월의 사역을 마치고, 이제 정든 높은뜻 숭의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 저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처음으로 목회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유란, 아무런 방해나 걸림돌 없이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목회자가 꿈꿀 수 있는 복음적인 목회에 대한 비전과 꿈이 제가 누릴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더 이상 비복음적인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더 이상 소진(消盡)하는 목회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기대와 꿈’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제가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높은뜻 숭의교회가 개척초기의 그 정신과 꿈을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사임하면서 정든 교회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 동안 저의 16년 목회사역의 2/3나 함께 하였던, 김동호 목사님을 떠나게 된 것을 아쉽고 무척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1989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부산 소정교회에서 2년 간 부목사로, 동안교회에서 송치헌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을 모시고 6년 2개월 부목사로 사역하고, 성은교회에서 4년 담임목사로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동안교회에 이어서 높은뜻 숭의교회에서 4년간 팀 목회를 하면서, 목사님과 함께 목회한 것이 10년이었고, 4년간 담임목회를 위해서 떨어져 있었지만, 결국 14년 동안 김 목사님과 함께 목회 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물불 가리지 않는 한창 힘 있떤 때에 김 목사님을 만나서 함께 목회하는 동안, 어느 듯 40대 중반에 접어든 다소 신중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목사님은, 저에게 늘 말 없는 목회 스승이셨습니다. 늘 자율적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때로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지켜봐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서로 간에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共存하는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목사님이 가지신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참 좋은 목회 스승들이 계십니다. 부산 소정교회 김두봉 목사님은, 은퇴를 눈앞에 두고 저를 불러주셨는데, 아들 같이 사랑해 주셨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저에게 목회 A B C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연륜 있으신 목회자의 목회적인 여유와 심방목회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동안교회의 원로목사님이셨던 송치헌 목사님께는, 설교사역의 성실함을 배울 수 있었고, 다소 지나칠 만큼 교회 중심적인 목양일념(牧羊一念)의 전형적인 목회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궁극적인 목회 모델은 그 어느 분도 아닙니다. 여러 목사님들로부터 목회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앞으로 남은 제 목회의 ‘궁극적(窮極的)인 모델’은 예수님께 두고 싶습니다.

저는 8년 동안 부목사로 사역 한 바가 있습니다. 부목사로 사역할 때, 제가 가지고 있었던 목회철학과 기준은, 제가 사역하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목사이지만, 담임목사의 마음과 심정으로 목회하면, 좋은 부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목회했습니다. 상대적이긴 하겠지만, 그와 같은 저의 목회철학과 목회기준이, 담임목사님과 교우들의 신망을 얻는 목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비록 짧은 4년간의 담임목회 경험이지만, 담임목회를 하면서 저의 그와 같은 기준과 목회철학은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교회의 직원들과 교직원수련회를 하면서, 제가 부목사로 사역할 때 가지고 있었던 목회기준과 목회철학을 말씀드리면서,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직원들에게 제가 가지고 있었던 동일한 마음과 기준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채 6개월도 못 되어서, 담임목사 중심적인 저의 목회기준과 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저의 신앙과 신학과 목회철학이 다른 교역자들과 교우들의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기준(基準)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담임목사인 제게도,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릇된 삶의 방식들과 사고방식, 목회적인 불완전한 기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의도적으로라도 담임목사가 기준이 되는 목회를 포기해야겠다는 제 안의 요구가 제기 되었던 겁니다. 새로운 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났습니다. 그 새로운 기준은, 담임목회를 하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와 교우들의 신앙과 삶과 신학의 기준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 때부터, 저의 목회관심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목회하기를 원하실까? 어떤 교회를 기대하실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목회를 ‘예수님과 동감同感하는 목회’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감의 기준이 바뀐 겁니다. 동감同感의 기준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개척초기부터 사람이 주인(主人)되는 교회가 아닌,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분명한 목회철학과 기준을 가지고 출발한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개척정신(開拓精神)이요,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켜야 할 과제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과 매력(魅力)이어야 합니다. 이 정신은, 때마다 일마다, 잊지 않고 마음 깊이 새기면서, 매사(每事)에 실천해야 할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는 제 자신과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다시 진지하게 되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동감(同感)의 기준’은 누구입니까? 흔히 하는 말로,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삶의 ‘컨셉(concept)의 기준’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추구하고, 따르는 ‘동감의 기준’이 하나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계적인 명문인 ‘Harvard 대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수와 학생들이 끊임없이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창의적인 학문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 하버드 대학의 진정한 힘이 나온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미 연구하고, 공부한 것을 반복하고 학습하는 데 궁극적인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부터 하버드 대학은 출발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버드 대학의 힘입니다.

보편적이고,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기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상식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보다 더 창의적인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부터 그 정체성을 찾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의 힘과 매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그 다름의 기준(基準)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의 다름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철학이나, 이념이나, 상식적인 가치나, 보편적 가치,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으로부터 우리 교회의 ‘다름의 기준’이 나와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예수님 사역의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다름(different from)'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 28-29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았던 무리들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反應, response)이 나옵니다. 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놀라움’이었습니다. 왜 놀라워했습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 자체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랐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아니함이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서기관들의 해석과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는 복음은 유대종교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율법과는 같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마 7, 28-29 ; 막 1, 21-22).

예수님의 서기관들과 다른 시각(視覺), 다른 관점에서부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의 다름의 기준은, 목회자나 장로나 그 어떤 한 두 사람의 힘 있는 자들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다름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나아와야 합니다. 동감(同感)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고, 그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예수님 말씀처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마 7, 24-27).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 7, 24-25).

우리 교회가 높은뜻 숭의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 그대로 ‘동감의 기준’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God's Will)에 두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 나타난 바 된 것입니다(히 1, 1).
본문에서, 우리는 자리에 누워 절망 중에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집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유대주의, Judaism)라는 시대적인 안경’을 써야 합니다. 간단하게 답을 드리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과 동감하는 자들’과 더불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 예수님과 동감하는 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반면에, 예수님과 동감하지 않는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동감하는 자들은, 무엇이 예수님과 동감하는 마음(것)이었습니까? 그 답(答)을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 절망적인 소망 없는 중풍병자를 보면서, 예수님과 똑같이 동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고쳐주기 위해서 상(床)에 메고 와서, 지붕위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계신 곳에 달아 내렸던 그의 ‘네 명의 친구들’입니다.

반면에, 중풍병자를 보고도 예수님과는 전혀 동감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종교의 실세(實勢)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과 그의 죄를 사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비난했고, 거부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동감한 자들의 동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입니다.

당시 중풍병자는, 유대종교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볼 때, 또 사회적으로 볼 때, 철저하게 버림받은 자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아 병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죄인(罪人)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종교의 신학과 가치관의 기준에서, 중풍병자(병)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죄인이라는 공식이 적용되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종교에 신학과 신앙에 철저한 사람들/ 유대종교의 보편적이고 인습적인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죽어 마땅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격리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정죄 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그를 정죄하지 않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의 네 명의 친구와 그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신 예수님입니다. 중풍병자를 상에 메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네 명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보는 그 마음과 시각이 예수님과 일치했습니다. 예수님과 同感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同感’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겁니다(함께 일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말씀하시기 전에,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유대종교의 가치관인, “병자는 곧 죄인이다”는 종교적인 교리와 보편적인 가치관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로 인해 억압되었던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 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체적인 회복 뿐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복권을 의미합니다.

소망 없던 자에게 소망을 주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同感의 福音’입니다. 예수님은, 소자에게, 죄인에게,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은 죄인에게, 세상 어디에서도 회복될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까지도 구원(救援)과 회복(回復)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자신과 동감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정죄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기준과 종교적인 교리와 전통에서 의(義)를 찾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하나님은 함께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들과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에는 예수님의 복음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중풍병자이지만, 그를 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예수님과 동감하는 자들이 많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일에 앞장서서 일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동감의 기준을 바꾸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동감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동감하는 자가 된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이 일하는 교회와 삶의 자리에는 언제나/ 생명과 구원과/ 기쁨과 평화가/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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