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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덩이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창 37: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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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 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서론)

옛날 애굽에서 한 히브리 노예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애굽 왕은 히브리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받는 산파 두 여인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핑계를 댔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얼마나 튼튼한지 우리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버려서 죽일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핑계로 말미암아 한 남자 아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석 달 동안 아이를 길렀지만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갈대상자를 가져다 안에 역청을 칠해 물이 세지 않도록 하고 나일 강에 띄웠습니다. 마침 애굽 왕의 공주가 멱을 감기 위해 나일 강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때 떠가는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던 남자 아이를 보게 됩니다. 공주의 마음에 이 히브리 남자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데려다 기르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때 강에 아이를 띄울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아이의 누이가 공주가 아이를 안는 모습을 보고 좇아갑니다. 누이는 “공주님!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아이의 유모로 소개해 드릴까요?”라고 공주에게 제안을 합니다. 공주는 흔쾌히 허락을 하게 되고 이 아이의 친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젖을 먹여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을 공주가 무엇이라고 지었습니까?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궁중에서 온갖 학문을 다 배우고, 후에 40년은 광야에 내쫓겨 온갖 시련과 훈련을 받고, 나이 80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Chance 즉, 우연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섭리 God's providence인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란 것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나는 좋은 일도 우연히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사에 일어나는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인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갖가지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간섭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사상 속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할 틈이 없을뿐더러 도와주실 수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운명에 맡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상에는 인생을 향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인생을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면서도 인생의 배후에는 무궁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섭리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무엇입니까? 성서학자인 브루게 만은 섭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숨어서 주권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책은 구약에 있는 ‘에스더’입니다. 이 에스더서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면에 나오지 아니하시지만 배후에는 그 모든 드라마를 다 연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숨어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됩니다.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용은 악을 선으로 바꾼다.” 악으로부터 선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섭리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인 요셉의 구덩이 이야기입니다. 요셉이란 사람이 얼마나 억울하게 타인의 죄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나 혼자 잘한다고 잘 되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운전을 잘 해도 술 취한 사람의 차가 덤벼들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아무리 일을 잘 해도 배우자가 비행을 하게 되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부요하게 살아도 자식을 잘못 둬서 자식이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함께 슬퍼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섭리하고 계신 것입니까?

요셉의 고통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의 고통, 노예생활의 고통, 감옥생활의 고통을 13년 동안 겪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고 계실까요?

1. 고통의 근거리 원인 - 인간의 죄

요셉이 고통 받는 근거리 원인이 있고 장거리 원인이 있습니다. 근거리 원인은 ‘인간의 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옵니다. 죄가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요셉 자기 자신의 허물도 있습니다. 요셉이 인생의 고통을 초래한 것은 청년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형님들의 잘못을 고자질합니다. 또 하나님의 주신 두 번의 꿈(첫째는 요셉의 곡식 단이 서 있고 다른 열 한 개의 곡식 단이 그 단에 절을 하는 꿈, 둘째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별에게 절을 하는 꿈) 이야기를 부모님과 형님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자랑합니다. 어느 누가 이런 꿈 이야기를 듣
고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의 본질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순진하게 범한 허물입니다. 이 허물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허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형님들입니다. 요셉의 형님들은 악의 선수들입니다. 이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고, 은 20냥에 팔아먹었고, 후에 옷을 벗겨 숫염소의 피를 발라 아버지에게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거짓말도 합니다. 형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시기심과 미움’ 때문입니다. 창세기 37장 4절, 5절, 8절에 ‘미워했다’는 말이 3번이나 등장합니다. 4절에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5절에 “요셉
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8절에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이렇게 미움을 키워나가다가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20절을 봅시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의 형들은 살인 경험도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누이가 겁탈을 당하고 왔을 때 세겜 남자들을 속이고 모두 몰살시킨 살인의 경험자들인 것입니다.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큰 죄를 범하고 아우에게 못할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고통을 당할만한 원인도,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자식이라 해서 요셉을 극도로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애는 결국 자녀들 사이에 비교의식을 만들고, 비교의식은 자녀들로 하여금 시기심과 열등감을 갖게 하고 결국 미움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함으로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죄도 궁극적으로 시기심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을 봅시다.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죄가 아닌 아버지의 죄, 형님들의 죄 때문에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가 되고, 죄수 신분으로 전전하는 생애가 된 것입니다.

2. 고통의 장거리 원인 -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삶 가운데 섭리하고 계실까?’라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이런 고통이 있게 된 장거리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에스더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란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한강 물처럼 창세기 37장 한 가운데를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죄를 짓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위대한 목적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을 애굽으로 옮겨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하고, 노예 생활 중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는 민족으로 만드셔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옮기시고, 그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백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창 15장 13절부터 16절에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요셉은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노예 생활을 하기 위한 ‘선발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노예 생활을 고통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를 38장에 가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야곱의 후손들은 가나안 사람보다 더 악하고, 가나안 사람과 구별되지 아니하고,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400년의 노예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래 한 국가(One nation under God)’로 만들기 위해서 400년의 노예 생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 가운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지휘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까?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인간이 자유롭게 짓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은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나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 지을 자유와 능력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고로 죄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고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신학자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율적인 의지를 주셔서 행동하게 하셨으니 어떻게 이 둘이 조화가 되는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위대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정해진 목적과 뜻을 이루어 나가시며, 섭리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섭리신앙을 확고하게 해야 됩니다.

3. 섭리 신앙인의 바른 태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첫째,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 염려는 모두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장래를 올바로 통치하시겠는가? 바르게 섭리하시겠는가? 어째 잘 하실 것 같지 않네!’라는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어느 한 곳에서라도 요셉이 근심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구덩이 속에서도, 노예 생활 중에서도, 감옥에서도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고로 우리 섭리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걱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환난이 오면 도리어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면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원망,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라는 것이 원망이요 불평입니다.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서론, 본론, 결론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이란 하나님께서 섭리를 잘못하고 계신다고 하나님을 꾸짖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됩니까!!”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요셉도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고 할 때 형님들을 향해 꾸짖으며 원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요셉이 촌스러움을 벗지
도 못하고 애굽의 총리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다.

셋째,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손을 떼셨구나! 나의 장래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구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떼시는 자녀는 하나도 없습니다. 요셉의 장래는 어두운 것 같고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그것은 터널을 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의 환난은 터널과 같습니다. 지나고 나면 밝은 길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재 어둡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 하늘과 영생과 부활, 하나님의 상급과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며 사는 영원히 복된 나라가 이 땅의 짧은 생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 좌절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한’을 품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을 봅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가 복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요셉은 복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총리가 되었고 형님들이 쌀을 달라고 엎드려 굽신거리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도리어 형들을 용서하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섭리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결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남의 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통치자의 허물로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친척의 허물로, 이웃의 죄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신앙은 오직 ‘섭리신앙’뿐입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직접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이 섭리신앙입니다.
때문에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근심대신 믿음으로, 원망대신 감사로, 절망대신 소망으로, 복수대신 용서로 마음을 채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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