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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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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날마다 수많은 소식들을 접하면서 살아갑니다.
2004년 한해동안도 우리는 수많은 소식들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특별히 이 한해동안 우리들은 정말 엄청난 소식들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인터넷사이트에서 뽑은 올해 10대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10위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부시대통령이 당선되는 소식입니다. 9위는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된 뉴스였습니다. 8위는 연예인들이 병역비리파문이었습니다. 7위는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한 소식이었습니다. 6위는 쓰레기만두 파문이었습니다. 5위는 행정수도 이전 위헌소식이었습니다. 4위는 수능부정행위소식이었고 3위는 이라크에서 우리나라 김선일청년의 참수 소식이었습니다. 2위는 희대의 살인마 21명이나 무참하게 죽인 유영철소식이었습니다. 1위는 우리나라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건이었습니다. 함께 살펴본 10가지 뉴스를 가만히 보면 결코 기쁜 소식보다는 슬프고 우울한 소식들이 더 많았습니다.
목회자로서 저 개인적으로는 지난 한해 기쁜 일도 잇었고 슬픈일도 있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기쁜 일은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볼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여 가는 모습을 볼때입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영혼에 미소가 일어나고 삶에 엔돌핀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올 한해동안 복음의 위대한 능력으로 그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들이 많았음을 보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목회자로서 영적으로 가장 안타깝고 슬픈일은 믿음에서 떨어져서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때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만 항상 좋은 일 기쁜 일만 대하면 좋겠지만 죄악된 세상에서 그런만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 것은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소식들은 슬픈 소식들이 많은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 개인적으로도 이 한해동안 좋은 일 기쁜일도 있었겟지만 많은 아픔과 슬픔의 소식들을 들으면서 경험하면서 살았을줄 압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갈 이땅에서 우리가 대면할 많은 소식들은 여전히 슬픔과 아픔의 소식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의 탄생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알리는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올해가 예수님께서 탄생한지 2004년째가 됩니다. 인류의 역사에 해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님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이땅의 역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탄절에 우리가 찬송하고 경배하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이유 우리의 삶의 큰 소식이되는 뜻을 함께 기억하면서 기뻐하고 찬송하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나를 포함한 온 백성에게 그 기쁨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10절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고 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탄생은 온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이 세상은 부자들에게 권력자들에게 배운 자들에게는 좋은 소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 무식한 자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미칠 좋은 소식은 드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자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권력이 잇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온 백성에게 미치는 과정을 우리가 주목하여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리는 것일까요? 당시에 목자들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계층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자기들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쌓는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13장 14-16절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엿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여기 약한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알리는 것은 그들의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였지만 그 마음이 가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목자들은 평범하였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심령이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땅에서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경험하지 못하는 목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으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소식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되는 대표적인 유대인들이 누가복음에서 소개됩니다. 그들은 바로 시므온와 안나입니다. 누가복음2장 25절 이하에 시므온이 어떻게 메시야를 소망하였는지 소개합니다. 여기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접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야의 위로를 소망하고 간절히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1장 26절이하에 보면 시므온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가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의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성령님께서 기다리리 수 있도록 은혜로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나중에 주님의 탄생을 대할때에 찬송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경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령을 거역하고 살았지만 여기 시므온같은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메시야의 탄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립니까? 성령님께서 우리들 속에 감동을 주는대로 주님을 찬송하시면서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시간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을 극적으로 체험한 한 유대인이 있습니다. 바로 안나라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결혼한지 7년만에 남편을 잃고 혼자 과부가 되어서 84년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야에 금식하면서 기도함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게 하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성탄의 기쁨을 누가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재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기쁨을 누릴 수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기다리는 마음의 사람에게 기쁨으로 임재하여 주십니다. 오늘 목자에게 시므온에게 한나에게 임하였던 주님의 기쁨의 영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2004년 성탄절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모른채 성탄절의 시간을 갖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아니라 산타클로스가 오신 날로 이해합니다. 많은 세상 아이들은 성탄절에 선물받는 날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거듭난 백성으로서 영적인 기쁨의 소망을 갖고 이 성탄절을 경배하시면서 보냅니다. 목자들처럼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 비록 현실적인 눌림과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마음에 가난함으로 주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처럼 성령으로 기다리며 안나처럼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뻐하고 영광돌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마태복음1장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위하여 오신 분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주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기 위하여 오랜 시간 계획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이 이땅에 구주로 오실 계획을 알리는 언약의 말씀이 약 400회나 됩니다.
제일 먼저 그 약속의 말씀이 소개되는 구절이 창세기 3장15절입니다.

우선 구주로 오시는 메시야는 아기로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죄에 빠지고 나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마귀가 우리인간을 죄에 빠지게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지옥으로 가도록 우리를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범죄하게 한 마귀에게 먼저 하신 말씀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창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여기 언급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님이 여자를 통해서 이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어서 오는 여자의 후손은 바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람들을 죄에서 마귀에서 구원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9:6에서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오시는 아기 아들은 단순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이렇게 메시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에게 구원의 주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회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다음에 구주로 오실 그분은 시골 낮은 동네에서오실 것입니다.
메시야가 태어날 곳은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그래서 목자들은 목자들이 가르쳐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까지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을 봅니다.

왜 예수님이 많은 동네 중에서 하필이면 베들레헴에서 나셨을까요? 미가서 5장2절에 이미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하엿습니다. 성경의 베들레헴은 어떤 곳입니까? 저는 성지순례를 가면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저희가 성지순례를 갔을때 이탈리아를 거쳐서 애굽 이집트를 지나서 이스라엘을 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이 갈리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주로 생활하신 나사렛과 공생애의 삶을 살았던 갈리리는 작은 동네였습니다.그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지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전이 있던 곳 예수님이 십자가를 달리시던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들레헴은 내란 때문에 우리가 직접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입니다. 예루살렘처럼 크지 못하고 잘 사는 동네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은 미가서 5:2에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은 현대의 이름이고 에브라다는 고대의 이름입니다. 베들렘헴은 '양식의 집''떡집'의 의미입니다.이 동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나서 유다 지파에게 준 작은 땅입니다. 여기 작다라는 것은 무시하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오게 하셨습니다. 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오시는 분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게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구원하러 오시되 작은 아기로 오시고 작은 동네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오시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죄성은 철저하게 남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를 높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는 작은 아기로 작은 동네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방식이 보십시오.
철저하게 인간의 방식과 다르게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지혜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인정할 것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에서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진정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신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기쁨이 되는 개인적으로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구주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신령한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도 오직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와 섭리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을 위한 일들을 얼마나 깊게 준비하시면서 열심히그 일을 진행시키는지 모릅니다.
구원을 위해 구주로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구주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것도 예비하신 뜻 속에서 이루어가십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의 축복이 예비된 심령들이 있을줄 믿습니다.

여러분 구주를 예비하시고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주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돌고 또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주를 약속가운데 예비하시고 때를 따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열심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생에 우리를 통하여 인간들의 모든 지혜외 생각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사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디ㅏ.

3. 예수님은 하늘에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평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들의 삶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사야서에서는 메시야가 도래할 때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사자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에게 끌리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이사야11:6-8)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모습을,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워있는 모습을,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노는 모습을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직 이런 완전한 평화가 이땅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런 평화를 맛보면서 살아야 할 유일한 통치의 장소가 바로 우리의 심령이요 우리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합니까? 평화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정당하여도 싸우고 분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할때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기를 평화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에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평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면서 하늘에서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엿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서 땅에는 평화가 오게 되었습니다.당시에 예수님이 오셨던 땅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과 분쟁으로 나라가 싸움과 분열되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예수없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왜 싸웁니까?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교회의 평화가 깨어지고 사회의 평화가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열과 싸움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평화하고 사람들과 평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고 합니다.
롬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합니다.심지어 롬12:14에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결코 사람들과 싸우라는 말이 없습니다. 종종 교회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적당히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싸움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그래서 존번연은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하지 못한 관계를 볼때마다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가슴 아파하면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성도들이 자기끼리 싸우고 있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빨리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시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에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십시오. 나의 감정과 생각으로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고백하시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2004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평화의 주님이 내 마음과 삶을 다스리시는 기회가 되시를 바랍니다. 내 가정에 평화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내 안에 통치하시는 은혜가 있을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입고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우리는 땅에서 얻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당신 품에 돌아와 쉴때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습니다"여러분 주님이 내안에 찾아올때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주님이 내안에 나를 지배할대 이 평안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믿고 가장 큰 축복이 평안의 복이라고 믿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나의 모든 삶의 불안정들이 그쳤습니다. 때때로 욕심이 찾아와서 그 평안을 도둑질하려고 할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물리칩니다.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다시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2004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에수님이 나의 기쁜소식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구주로 우시고 우리에게 평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복과 기회로 알고 찬송과 경배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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