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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성공된 삶 (빌 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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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서울 이태원이 짝퉁1번지라고 합니다.
짝퉁이란 가짜 명품 브랜드를 가르키는 말로서
루이뷔통, 베르사체, 페라가모, 구치, 샤넬 등 유명브랜드를 모방한 모조품이 시중에 재래시장을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명품 회사들이 짝퉁들이 유통되는 것을 알고도
가만히 놓아둔다는 것입니다.
왜? 짝퉁들이 명품을 더 선전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짝퉁과 명품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기독교가 명품종교인 것 같애요
천주교나 불교 또는 이스람교 흰두교에는 사이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만큼은 사이비도 많고 또 비난도 많습니다.
왜냐? 명품이기 때문입니다. Made in God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도 짝퉁 신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나는 명품 크리스챤입니까? 짝퉁 크리스챤입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명품 신자인 기독도와 충성이란 순례자가 허영이란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 사람들은 기독도와 충성이 저들이 알지 못하는 가나안 방언으로 말하고 상점에 진열해 있는 상품들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을 보고는 이상히 여깁니다. 그래서 그곳 상인이 묻습니다.
[ 당신들을 무엇을 사려고 합니까? ]
[ 우리는 진리를 사려고 합니다. ]
그러니 온 도시에 큰 소요가 일어나 조사관이 기독도를 붙들어 조사하기를 [ 너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사람이냐?
왜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느냐? ] 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상품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 있는 삶, 즉 성공된 삶이
어떤 삶인 가를 붙들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 보면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던 중 <2>
그곳에서 비단 장사 루디아와 간수장의 가족이 복음을 받아드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빌립보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서
바울의 선교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에
빌립보 교회 집사 에바브로 디도를 통하여 선교헌금을 전달하게 되는데
이 때 에바브로 디도가 중병에 걸려 곤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빌립보 교회로 돌아갈 때
바울이 편지를 써서 에바브로 디도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된 서신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투옥이 결단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하며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적인 권면을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권면이라는 것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사람이 못한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강금되어 있는 상태이면서도
밖에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신앙의 진가라는 것은 모든 환경이나 여건 또는 소유 계급 직책
이런 외적인 요건들이 다 제거되어져 바야 그 진가가 드러남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장님이라 부른다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신앙의 사장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목사라고 부를 때
나의 신앙이 목사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착각입니다.
욥과 같이 모든 재산 심지어 자녀까지 다 잃어버리고도
남는 것이 하나님이고 신앙일 때
그 신앙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측도의 말씀, 즉 잣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명품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성공된 삶의 평가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냐?에 따라
명품 그리스도인과 짝퉁 그리스도인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3>
20절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
지금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1)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는 삶입니다.
바울의 삶의 철학 그건 한마디로 말한다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 예수는 커지고 나는 작아지는 삶. 즉 <예수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누가 상대방을 존귀케 할 수 있는 줄 아십니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는 작아지게 되고
상대방은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런 대중가요 가사가 있지요
[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 지는가? ]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훼까닥 가버리지요.
바로 미치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엔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 신흥종교가 일본열도를 달군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디에 미쳐서 산다는 것은
참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쳐서 사는 것 같이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정치에 미친 사람은 논, 밭떼기 다 팔아서도 국회에 진출할려고 한다. 그것이 사는 목적이고, 행복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일본에는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에 나온
탤런트 배용준에게 미쳐서 사는 일본 여성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것도 주호 30대에서 50대의 가정주부들입니다.
이들은 배용준만 생각하면 가장 기쁘고 행복하며
배용준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팀을 만들어 서로 만나서,
배용준에 관한 모든 것을 스크랩하여 돌려가면서 구경하고
서로 정보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일본에서 배용준의 인기가 그렇게 대단한가? 혹시 부풀려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선교사님이 쓴 글을 지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가 NHK유선방송으로 방영하고 나서
일본 전역에서 엥콜 방영을 요구하여
국영방송인 일본 NHK에서 20회 분양으로 방영을 하고 나서는 <4>
21째는 지금까지 외국 드라마로서는 유래가 없는
특별방송을 1시간에 걸쳐 그 동안 명 장면들을 모아서
퀴즈를 내 가면서 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방송이 끝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NHK에서는
다시 엥콜 방송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효과가 얼마나 컸는가 하면
NHK가 벌어드린 수입이 1백억엔(우리돈 1천억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욘사마 신드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람 머리, 롱코트에 한껏 패션을 자랑하며 목도리를하고
은근한 미소를 짓는 배용준. 여기에 일본여인들이 까물어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는 배용준이 웃옷을 한 번 벗었다 해서 또 한번 까물어쳤습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엔
일본인 가정에 부부 사이에 갈등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유는 어느 부인은 DVD를 통하여 20여회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배용준이 나오는 잡지나 사진은 다 사서 모으고,
심지어는 가정생활은 뒷전이고
드라마를 촬영했던 한국의 남이섬을 몇 차례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방문하면 그 경비가 만만찮습니다.
여행사에서 모집하는 후유노 소나타 투어 여행비용이
2박3일, 혹은 4박5일 예정으로 들어가는 금액이
최소 13만엥에서 19만엥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개인적으로 드라마의 캐릭터 상품을 사는 것까지 포함하면 25만엥에서 30만엥은 족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가정경제에 빨간 불이 켜져서 부부간에 싸움이 잦아졌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일본 수상 고이즈미 준이찌로가 공식석상에서
배용준의 인기가 자기보다 훨씬 높다고 소개하고,
따라서 자신도 욘 사마에 지지 않게 준 사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발언을 할 정도입니다.
배용준을 일본에서는 욘 사마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 사마라는 호칭은 황족 등을 지칭할 때 부르는 극존칭으로 일본언론과 여성들은 배용준을 가리켜 욘 사마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 황족이외에 일반인 신분으로 사마라 붙여 부르는
이는 세계적인 축구스타 베컴과 배용준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배용준의 인기는 베컴사마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어떤 가정에는 자기 집에 조상들의 사진 옆에 배용준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고 아침마다 그 사진을 보고 경배를 할 정도니
이것은 가히 종교형식을 빈 제단의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일본 선교사님이 이 글을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5>
한국인인 나로서는 한국 사람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그리 기분 나뿐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나는 한심한 것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배용준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본의 메스컴 조차 욘사마 교라고 지칭하며
그 교주가 배용준이라는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이 겨울연가 병에 걸려있는 광신도적인 이 일본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과 우리 한국교회가 부끄러울 뿐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에 이끌려 예수님한테 한번 미쳐야 합니다
그래야 입만 벙긋하면 예수가 나오고 예수를 자랑합니다.
세상에 안 미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꼭 마귀에게 사로잡혀야 그 사람 미쳤다고 하지요.
성도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성령에 사로잡히면
바로 신앙생활에 미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에 승리하고 열매를 맺자면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져 한번 미쳐야합니다.
그래야만이 예수만을 자랑할 수 있고 예수만을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간증 책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권사님 아들로서 음악대학 나온 엘리트인데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아 교회봉사를 하는 청년집사입니다.
적으도 외관상으로는 교회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예배드리고 나면 그렇게 허전해서
거리를 방황하거나 술에 취하곤 했읍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직장에서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간경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반항하다가 결국은 모든 것 포기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거기서 주님 앞에 통회 자복하며 회개하게 되니 주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병도 고침받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읍니다.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할렐루야!요 예수님입니다.
직장에서도 이야기는 예수고 자신의 간증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예수 또라이 라고 했는데
변해도 확실하게 변해 새사람 되니
나중에는 별명이 <오리지날 예수꾼>이라 하더랍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6>
바로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형편은 혹 재판 결과 순교를 당할는지
아니면 석방이 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죽어도 좋고, 왜? 주님 곁에 가기 때문이고
살아도 좋다 왜? 24절 너희에게 유익된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바울의 남은 생애에 삶의 신조가 있다면
바로 내가 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된 삶
즉 남을 위한 희생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말 가운데 참 좋은 말들이 있는데
어떤 말들은 잘못 악용되어 그 뜻이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라는 말이지요.
본래는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에겐 공동체란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밖에 모를 때
우리가 얼마나 추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머문다면 이기적인 집단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차원을 넘어서 너희에게 유익된 삶이 될 때
기독교가 기독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중에 자기원칙 가운데 한 가지가 주변을 가꾸는 삶입니다.
한번은 화랑 전시회에 초대받아 갔는데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라서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 미술 감상법을 좀 가르켜주세요 ] 하니
[ 목사님 그걸 지금 다 설명해 드릴 수는 없고
제가 한가지 비유로 말씀드릴께요 ] 하며서 하는 말이
[ 인물화를 그릴 때 하수는 항상 먼저 얼굴을 그리고
고수는 주변 배경부터 그립니다 ] 라고 해요
그때 제가 깨닫게 된 것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구나
나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면 다 산 후에 졸작되고
주변부터 가꾸어 나가면 다 산 후에 걸작이 된다는 것
내일의 가족 여러분
나는 지금 얼마나 너희를 위해 유익된 삶을 살고자 하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후 나의 삶의 신조를 너희를 위해 유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 산 후에 짝퉁 신자로 남지 마시고
명품 신자로 남으려면 남을 위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7>
자신은 아마 풀려날 것을 예측하고는
내가 다시 살아 나간다면 너희와 같이 있어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4:1절에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 ] 고 권면 합니다.
교역자의 자랑거리인 교인 되시기 바랍니다.
자식의 앞날 부모가 내다 보듯이 여러분들의 앞날 목사는 내다 볼 수 있습니다.
교역자와 관계에 은근히 자랑하는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27절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시 27절에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어떤 생활입니까?
[ 합당하게 생활하라 ]에서 [ 생활하라 ] 는 [ 시민답게 살라] 는 뜻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문화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에 속한 지역으로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로마 시민으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로마 시민의 옷차림에 라틴말을 사용했고
로마의 행정과 제도의 혜택을 그대로 누렸습니다..
그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들을 즐겁게 준수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이면서 특권을 누리기만 하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병역, 납세 의무를 감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특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해서 귀족들이 먼저 본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힘이었습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무엇이 로마 제국을 강대하게 했는가? ]
지성에서 그리스도인들보다 못했고,
체력에서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뒤떨어졌으며,
기술에서 에르트와인보다 훨씬 못했고
경제에서 카르타고인보다 못했던 로마인들이 <8>
번영을 누리고 세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 바로 시민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원칙을 지키고 로마 시민 됨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한 정신이 승리의 원동력 ]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배경 하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어느 나라 시민인가?
만약 천국 시민이라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이것이 능력이다. ]
빌3:20절에도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삶의 능력도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을 둔 사람같이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1) 신앙 안에서 한 뜻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27절 [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한국 교회가 지금 총체적 침체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군데 손을 써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특히 협력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되려면 공동관심사와 협력(한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이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너희는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자의 특징은 바로 협력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서는 서로 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메뚜기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
코끼리 같은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지도자 호치민의 <3꿍 정신>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호지민이 지금도 베트남 국민의 영웅이 되어 있는 것은
그의‘3꿍 정신’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베트남을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며 이 정신을 지켜왔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정신을 지도력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3꿍 정신이란 첫째는 함께 산다(꿍아). 둘째는 함께 먹는다(꿍안).
셋째는 함께 일한다(꿍땀) 세 가지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빌립보서도 함께 빌2:25절에 나오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에바브로 디도 같은 일군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협력하다 ] 말은 스포츠 용어입니다. <9>
팀을 이뤄 다른 팀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포츠를 가만히 보면
단체전에서 잘하는 사람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사람 때문에 지는 것 있지요.
교회를 섬기면서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싸움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입니다.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팀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2)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28절 [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핍박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고 복음에 눈 뜨여지면 담대해 집니다..
바울 당시, 로마 군인들의 최대 찬사는
고난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하다는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패배한 것은 감싸주지만,
전쟁터에서 비겁하게 구는 사람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 ]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환경은 삶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합당한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는 능력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지배당하지 않고 변혁시켰던 바울은
자신과 같은 고난에 있는 믿음의 형제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현세에 직면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생만 실컷하고 남는 것이 없는
헛수고가 아니라 의미 있는 고난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성공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10>
29절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만이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은혜는 믿음을 더하게 하지만 고난을 이기게 한다는 것 꼭 기억하세요.
그러니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할 때 부담스러워 하지 마시고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0절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
바울만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같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고난을 받고 있다 이런 고난이 너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달리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안 달리면 고난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급도 없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조련사들이 개를 훈련하고 나서 반드시 테스트 과정을 거칩니다.
조련사의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점검합니다.
먼저 며칠동안 개를 굶깁니다.
그리고 개를 데리고 나가 고깃덩이를 던져줍니다.
고깃덩이를 보는 순간 개는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때 조련사가 서~! 라고 명령하면 곧 멈춥니다.
개는 조련사의 명령을 듣는 순간,
고깃덩이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조련사의 입술에 고정합니다.
그리고 귀를 세우고 다음 명령을 기다립니다. 명견입니다.

나는 오늘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나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합니까?
아니면 세상 기준에 따라 적당히 살아갑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된 삶이 어떤 삶인가?
과연 나는 명품 그리스도인인가 짝퉁 그리스도인인가? <11>
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가?
내가 유명해진 삶이 아니라
내 몸에서 얼마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삶을 살려고 하는가?
2) 나의 삶의 신조가 무엇인가?
내가 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된 삶인가
아니면 나와 우리가 편한 삶인가?
나부터 챙기는 삶인가? 주변부터 가꾸는 삶인가?
3)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얼마나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가?
남자분들 군대생활 기억나시죠? 특히 훈련소에서 조교들이
실시! 원위치! 나중에는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 까닥 해도
실시 원위치가 되는 것 있지요.
나는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실시! 라고 하면 행동하고
멈춰! 라고 하면 멈추는 삶을 살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감정 내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는 아니하는지
내가 명품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인지
잘 점검해 보시고
명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성공된 삶의 주인공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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