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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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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왕년에 혼자 유럽 여행할 때 친구 목사님들이 의아해 합니다.
[ 김목사 언제 그리 언어를 공부했노? ]
그도 그럴 것이 해외 여행 혼자 하면서 말못하면 여행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요령만 알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한국어로 된 안내서를 다 읽어 둡니다.
그리고는 어느 곳이든 내리면 I 라는 표시가 있는 안내소에 들려
도시 지도를 하나 얻습니다.
그리고는 그 지도 들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 Where am I ? ] 라고 물으면 나 서 있는 지점만 알면
표기된 장소로 찾아가면 됩니다.
한참 가다가 미심쩍으면 또 지도 내어서 나 어디 있나?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Where am I ? 나 어디 있나? 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지금 나 어디 있나 ?입니다.
우리 인생길도 사실은 모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내 인생 가이드되신 예수님한테 물어야 합니다.
나 어디 있나? 내가 걸어온 이 길이 바른 길인가? 물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두 제자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 졌습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제자,
너무 다급하여 홑이불 덮어쓰고 도망가는 제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
그 중에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한 제자가
역시 낙심하고 고향 땅 엠마오로 낙향하여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인냐? ] 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길 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길에 동행하시는 분이란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에 가장 확실한 가이드라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그림 언어로 한번 그려봅시다.

영국 성경 주석가 <바클레이> 박사는
오늘 이 이야기를 [ 또 하나의 불후의 단편 ] 이라고 평했습니다.
저녁 해 질 무렵 두 제자가 <2>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640-770미터의 높은 고지에 있고
그로부터 서쪽으로 해변까지는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입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내려가는 모습이
하루에 일과를 다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한
보람과 행복과 안식을 기대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서편으로 지는 해와 같이 빛과 생기를 잃어 가는 모습입니다.
희망찬 아침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워오는 밤을 향하여 황혼 속에서 힘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깨는 축 처져 있고 다리에는 힘이 빠져 있습니다.
천천히 내키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도 있습니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이라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
반대로 올라가고 있는 길이라면
더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이 보이는 걸음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낙심과 슬픔이 가득하였고 수심이 절로 배여 나옵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겁에 질려 있는 듯하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하고 두려운 의문들로 가득 찬 얼굴들입니다.

두 사람은 몇 일 상간에 일어난 일을 서로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 대화에는 오직 의문 투성입니다. 서로 묻기만 합니다.
[ 우리 랍비는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잘못 알았나? ]
[ 왜 우리 제사장들이 우리 랍비와 힘을 합쳐서
로마와 싸워 이겨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았을까? ]
[ 막달라 마리아가 오늘 아침에 랍비가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소리를 들었고 또한 랍비를 만났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
[ 베드로도 우리 랍비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랍비의 시체는 가져간 걸까? ]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 ] [ 제사장들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둘까? ]
아마도 질문은 끝이 없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한가지도 속 시원하게 들려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에게 대답을 기대해 보지만 별 통수 있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혹 이것이 2004년 최악의 불경기의 한해를 살아오면서
마지막 해가 지는 무렵에 한숨 짓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절망과 공포에 싸이게 되면
모든 것들이 의문 투성이 걱정투성이로 다가옵니다.
제자들의 삶에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온갖 걱정 속에서 <3>
삶의 생기도 소망도 확신도 잃어버리게 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왜 낙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면
1)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엠마오입니까?
<엠마오>라는 말은 원문에서 [ 모른다. 알지 못하는 길 ] 이란 뜻입니다.
엠마오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특히 엠마오는 지형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길입니다.
여기 내려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길이었습니다.
특히 저들의 모습이 17절에서는 "슬픈 빛"을 띠었다고 기록합니다.

왜? 제자들이 이렇게 방황하고 낙심하고 슬픈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답은 15절 16절에 있습니다.
[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우리에게 의문을 던지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동행하시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3년간이나 늘 함께하였던
자기들의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굳이 현상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너무나 영광스럽게 변화한 몸이라서 쉽게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 라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라워져서” 라는 말은 ‘크라테오’ 라는 말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아서” 라는 말입니다.
왜 그들의 눈은 고정되어서 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가리워져서
자기들이 따라 다녔던 랍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이 아니라 10년 20년을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어면 눈이 가리워져
나와 함께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낙심하여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동행하시는 주님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4>

17절 [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
그럴 때 두 제자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섭니다.
먼저 오늘 우리도 이 한해를 살아오면서
내 인생길에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길에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왜 이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두 제자의 이야기 내용의 중심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모습 가운데 나타납니다.
왜 슬펐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소원이 있었습니다.
능력 많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때 자신들도 공신이 되어 한 자리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를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돌아 가신지 3일이나 지났습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바램이 크면 실망도 큽니다.
잘못된 기대와 무너진 소원은 사람들을 실망케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떠나진 않아도 싸늘한 가슴을 안고 신앙 생활합니다.
그 저변에는 기대에 대한 실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실망하고 떠나갑니까?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소망 때문입니다.
즉 잘못된 신앙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슈퍼맨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의 답변을 한 번 들어 봅시다
3.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의 답변은 무어라고 합니까?(18-24절)
글로바라는 제자가 예수님을 단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행인으로 알고는 [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 무슨 일인데요? ]
[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그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여늘 <5>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사실 우리는 이사람이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바랬는데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가 되었소
또 이상한 것은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하고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 사람이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빈무덤은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모르겠소 ]
그렇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기대와 불신앙,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지가
그들의 마음을 식혔고 낙심하게 했고 슬프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잘못된 기대는
예수님을 단지 이스라엘을 독립하는 선구자로 알았고
저들의 불신앙은
죽은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저들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고난이 있어야 영광이 있다는 성경의 흐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기대와 불신앙,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지가
저들의 마음에 낙심과 슬픔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의 주님의 책망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25-26절
[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야 ]
원문에는 감탄사가 들어 있습니다.
어휴~! 이 바보들아~ 이런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탄식을 합니까?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평소에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고 몇 번이나 거듭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쉬 라는 영국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제자훈련 전공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자훈련을 하다가
마음에 낙심이 되어 도저히 제자훈련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며 제자훈련 했는데 <6>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다 흩어져 버렸는데
내가 뭐라고 제자훈련 한다고 이 교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나?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바로 이거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몰랐구나.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야 ]
그렇다 먼저 고난이 있어야 영광이 있구나, 이것이 성경의 흐름입니다.
오늘 성도의 신앙생활의 교과서는 성경인데
그 성경의 흐름이 바로 선고난 후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임스 크릴맨>이란 사람이 발칸 반도를 여행하면서 글을 썼는데
세계에서 발칸반도의 장미 향기가 제일 향기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릴맨이 발칸의 장미가 왜 그렇게 향기로운지 그 이유를 알고자 장미를 재배하고 취채하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밤1시 사이에서 2시 사이에 즉 가장 캄캄할 때에만 장미를 채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게 상단히 미신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사실은
장미가 낮에는 향기가 40%나 감소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성도들 보세요.
세상살면서 고통을 당하며 어두운 밤을 걸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 기둥같은 하나님의 일군들 보세요
교회가 어려울 때 믿음의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한해를 살아오면서 내 생애의 최악의 해라고 생각될지라도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밤에 생성되는 향기가 더 아름답고 값진 향기라는 사실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산에 자라는 소나무를 가만히 보면
어린 소나무 껍질은 윤기가 나고 반들반들합니다.
반면 오랜 세월을 버틴 노송은 송진이 흘러나와 껍질은 시커멓고 보기 흉합니다.
그러나 어린 소나무는 약하지마는 노송은 재질이 아주 단단해 강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윤기가 나고 보기에 머끔할 때는 실은 우리가 약할 때입니다.
삶의 고통을 통해 단련된 사람은 어떤 바랍이 불어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이 어렵더라도 선 고난 후 영광의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용기를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27절에 <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묵상하면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이 세상이 그저 차디찬 세멘트 벽이나 기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의 손에 있는 세상임을 보게 됩니다.
그것도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고 활동하고 계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벌써 뭔가 감동이 온 것 같습니다.
32절에 보니 이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심으로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믿음의 눈이 점점 밝아져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는
아무리 화려한 성공일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 ]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따르릉~ 따르릉~ 토요일 아침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 목사님 설교 제목이 좀 이상해서요 ] [ 왜요 ]
[ 목사님 설교 제목은 늘 긴 문장으로 되어있었는데
오늘은 [ 예수 만나면, 하니 뭔가 빠진 것 같아서요. ]
[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 하고 전화를 놓았습니다.
주일 아침 주보를 들고 강단에 서신 목사님 - 설교 제목을 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 예수 만나면-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
잘못된 설교 제목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제목을 몇 번이고 되뇌이다가 가슴에 불이 임했습니다.
[ 예수님 만나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 // //

그럼 제자들이 언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언제 주님을 만났느냐?는 말씀이지요.

제자들이 엠마오에 거의 도달했을 때
예수님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그냥 걸어갔습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8>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지 아니하였다면 그대로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그 은혜와 사랑에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붙잡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가 스스로 붙잡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머물기를 강권하였고
주님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머무르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한해를 살아오면서 일이 잘 안 된다고 넉두리 할 줄만 알았지
예수님 한 번 꽉 붙들어 보려고 했습니까?
29절 [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 말씀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미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교회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예수님 꼭 붙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한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붙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막5:25- 열 두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많은 괴로움을 당하며 가진 것도 병원비로 다 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옷자락만 붙들면 자기의 병이 나을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고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합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표현은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 붙든 사실을
<헤파토> 라 해서 얼마나 꽉 붙들었던지
스파크가 일어나 불이 붙을 정도로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도 예수님 붙드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유하기를 원할 때
예수님께서 저희와 함께 들어가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데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
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실 때 저들이 눈이 밝아졌습니다. <9>
오늘 우리도 눈만 밝아지면 세상 살아가는 것 그리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눈이 어둡기 때문에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근심하고 탄식하고 염려하고 원망하며 불신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 신앙생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시고
주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만나 눈이 뜨여진 제자들 늦게사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떠나셨지만
눈이 뜨여져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 그제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2절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시더냐? ]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말씀이 그대로 믿기워졌다는 것입니다.
뜨겁지 아니하는 마음은 말씀이 믿기워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풀어주신 말씀, 선 고난 후 영광의 삶이 믿기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또한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았을 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큰 감동이 임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면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7.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33-35절)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즉각적인 행동을 하는데
그것은 [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 ] 입니다.
사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난 시간은
날이 어두워 여관에서 유숙하려고 한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즉시 일어난 것은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 때문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10>
낙심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전하려고 즉시 행동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
이 같은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르게 됩니다.
엠마오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영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즉시 실천하는 행동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주님을 만나 이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감동받는 은혜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저들이 마음이 뜨거워져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신앙의 회복을 말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이 회복되려면
우리도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엠마오 가는 길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즉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으로 갔습니다.
절망을 떠나 희망으로, 낙심을 떠나 기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곳이요,
제자 공동체 - 즉 교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우리의 삶이 회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삶이 회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개인적인 아픔을 가지고 오신 분 계십니까?
가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분 계십니까?
희망없이 하루 하루 사시는 분 계십니까?
엠마오 도상! 거기는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해야 할 자리,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내게 주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1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나그네 길, 한 가운데 계십니다.
당신의 고난 가운데 동행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 처절했던 유대인 학살 수용소 - 아우슈비치 감옥 벽에는
오늘 찢겨 죽을지 내일 끌려가 비누공장 재료가 될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벽마다 엎드려
[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 라고 써넣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한 신앙인이 그 벽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과 함께 고난 당하고 있고, 당신과 함께 울고 있고 당신과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는 그 자리, 고난 당하는 그 자리 - 하나님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2)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됨을 말합니다.
왜 우리의 신앙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행1:4절
[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라고 하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잘못된 걸음을 돌이켜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교제 가운데로 회복해 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걸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발걸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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