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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하여 (빌 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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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미사와 은혜교회 방문 소감

저는 지난 한 주간 일본 선교 여행을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기도로 후원해 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방문한 미사와 은혜교회는 일본 본주(本州)의 동북부에 있는 아오모리(靑森) 현에 속해 있는 인구 40만의 미사와(三澤) 시에 2년 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아오모리 현은 아오모리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미사와 은혜교회의 교우들은 다수의 한국인과 소수의 일본인과 미국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인 수는 많지 않지만 다국적 교회인 셈입니다. 이번에 저는 미사와 은혜교회의 창립 2주년 감사 예배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자그마한 예배당이 가득 차도록 성도님들이 참석해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에는 축하 케이크도 자르고, 성대하게 잔치도 열었습니다. 미사와 은혜교회는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흥하는 교회로 잘 알려진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일본인들을 전도해서 일본어 예배도 드릴 계획인데, 이 일이 잘 되면 미사와 시를 복음화 하는데 의미 있는 기여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의 인구는 1억 2천 7백만 명 쯤 되는데,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약 26만 명된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 전체 인구의 약 0.2%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교회수가 약 7640여개가 있는데, 한 교회의 평균 출석수는 35명입니다. 일본은 국민소득이 34,000 달러로서 일만 천 달러인 우리보다 무려 3배나 많습니다. 이번에 아오모리 현에 가보니 시골집들이 다들 얼마나 훌륭한지 우리나라의 시골집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이 얼마나 철저한지 길가에 무단 주차하는 예를 찾아볼 수 없고, 어딜 가나 쓰레기를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에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보면 맞습니다. 일본인들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다보니 우상숭배에 깊이 젖어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참 많이 받은 민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느낀 것은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정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몽매 무지하여 사신우상을 섬기는 일본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복음을 전해야겠구나, 이 일을 하는데 한국인들이 최적격자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하나 영적으로는 헐벗고 굶주린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선교를 위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기도로 후원하고, 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협력해 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교회를 비운 한 주간 동안 장로님을 비롯해서 성도님들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해주시고 또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담임 목사가 없으니까 더 모이기에 힘쓰시고 기도도 더 많이 하시고 봉사도 더 힘쓰셨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주셨다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점

이 시간 저는 빌립보서 3장 10절로 16절까지의 말씀에 근거하여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본디 내세 지향적인 종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인생의 어느 기간 동안만 믿어서는 안 되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주님을 믿었으나 지금은 그 믿음을 상실한 채 세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사람들입니다. 수박의 겉만 핥아서는 그 참맛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칼로 수박을 쩍 갈라서 빨갛게 익은 속을 베어 먹어야 비로소 수박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기독교인 노릇을 해왔을지라도 겉핥기식으로 믿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내세지향적인 성격을 현세지향적인 성격으로 대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내세지향적인 성격을 상실한다면 그 때는 기독교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천국이 없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천국보다 이 세상의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육상 선수가 결승점이 어딘지를 망각하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해야 할 선수가 다른 데 정신을 빼앗겨서 엉뚱한 곳을 향하여 달려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청산해야 할 안일한 신앙자세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즘 기독교인 가운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오해해서 그릇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면서도 “나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히브리서 3장 12절로 14절에 이르기를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예사롭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 사도 바울의 동역자 중에도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나간 데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눈물로 회개하고 주님의 용납을 받았으나, 시몬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조차도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됩니다.

“나도 방심하면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항상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이지만, 구원 받는 믿음 역시 불변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누가 주님을 믿다가 중도에서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길로 가버렸다면, 이로써 그의 믿음이 진실하지 못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을 정금에 비유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금과 비교해서 그보다 더 귀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무서운 시련 가운데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습니다. 믿음을 금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녹슬거나 변질되지 않고 금의 성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음이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에 믿음을 금에 비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셨고,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라고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하는 것

예수 믿는 것은 그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로 39절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6장 24절로 25절에 보면,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놓고는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하다니,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자기 목숨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귀하게 여깁니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두 종류의 복

성경은 우리에게 복 받는 길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나 복에도 종류가 있고, 차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먼저 구해야 할 복이 있고, 그 다음에 구해야 할 복이 있습니다. 전자는 신령한 복이고, 후자는 현실의 복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 다음에 의식주의 복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현세적인 축복 위주의 신앙을 청산하고 내세적인 영적 축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의 수는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부정부패가 심하다는 평가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적, 사회적인 관점에서 다양하게 규명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 국민의 25%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가정과 일터에서 정직하게 행동하고 불의를 감시한다면, 나머지 3분지 2 역시 불의를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사회를 이룩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러고도 남을만한 사상과 실천 강령을 갖고 있는 유일한 종교인데도 그 동안 교회가 현세적인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나머지 기독교 신앙을 축복을 위한 방편으로 알고 있는 신자들이 점점 많아졌던 것입니다. 현세적인 복을 받을 목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복을 받아도, 받지 못해도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대로 복을 받은 경우에는 목적 달성을 했으므로 신앙을 떠나고, 복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믿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떠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푯대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에 결국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을 것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몇 분이 못 되어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양식인 떡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천양지차가 납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떡을 위해서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생의 떡을 위해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떡을 위해 믿는 사람은 시험이 다가오면 미련 없이 신앙을 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영생의 떡을 위해 믿는 사람은 시험과 시련의 바람이 불어 닥쳐도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한 사도 바울의 간증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본래 골수 유대교인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을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적에 돌을 던지는 자들의 증인 노릇을 자청했던 사람입니다.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대제사장에게서 기독교인들을 체포 구금할 권한을 위임받고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갑자기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모두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은 그가 핍박하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이제껏 그가 그릇된 길로 행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강한 빛에 의해 소경이 되어 사흘 동안 골방에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나사렛 예수를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문도 좋고, 문벌도 좋고, 사회적인 명망도, 돈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수장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부터 그 역량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빌립보서 3장 4절에서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를 만난 이후로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변화를 이같이 고백했습니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뿐 아니라, 그까짓 것들은 다 냄새나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라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그는 이같이 진술합니다.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비록 짧은 진술이지만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어딜 가나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었던 그가 무엇 때문에 그 같은 고생을 사서 한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그는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망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영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은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저와 성도님들 역시 부활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보고 이제껏 신앙의 경주를 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타성에 젖지 않도록 경계하자

이를 위해 그는 타성(惰性)에 젖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타성에 젖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지, 여기서 어떻게 더 열심을 내, 너무 교회 일에 깊이 개입하면 귀찮게 되니 적당히 믿는 게 좋아’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타성에 젖게 됩니다. 자신이 타성에 젖었는지 젖지 않았는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에 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쁜 일인지, 아니면 무거운 짐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진단이 나옵니다.

타성은 신앙생활의 무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타성에 젖은 것을 알았으면 즉시로 회개하고 믿음 생활의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르시기를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라

마지막으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를 한다고 했습니다. 경기에 임한 선수들은 하나같이 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상은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 경주를 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순교를 예상하면서 디모데에게 쓰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상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늘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반면에 상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누구나 주님께서 주실 상을 받으려는 열망을 품어야 마땅합니다.

다짐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금년도 두 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한 해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결산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푯대를 향하여 올바른 신앙의 경주를 달려 나가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올바른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 어떠한 형편에서도 여러분의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순간까지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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