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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당부 (살전 5: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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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요셉 목사

[1] 서 론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 마지막 부분에 대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를 하는 중에 그를 감동해서 펜을 계속 들게 하셨던 성령이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셨을까요?
누구든지 편지를 쓰면, 편지의 내용 중에 자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마는 끝으로 말미를 맺기 전에 무엇인가 한마디를 더 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편지를 쓸 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들끼리 편지를 쓸 때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편지 말미에 무슨 말이 반복되느냐는 편지를 쓰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큰 관심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에서 지금까지 긴 편지를 써 오다가 이제는 마지막 마무리를 져야 하는데, 그 때에 성령께서 바울의 마음을 통해서 끝으로 다시 한번 마무리 못질을 해야 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 속에 그 말씀이 꽉 박힐수 있도록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23절부터 28절 부분을 보면, 크게 3가지의 내용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화에 대해서, 둘째는 중보기도에 대해서, 셋째는 말씀 사역에 대해서 간곡히 당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2] 바울의 마지막 당부

1. 성화에 대해서 (23절-24절)

먼저 성화에 대해서 23-24절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 되기를 원하노라」

지금까지 데살로니가 전서에 대한 새벽 강해를 통해서 압니다마는 거룩하게 살라는 문제를 놓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계속 권면하며 기원하고 있습니다.
3:13절에는 「너희 마음을 굳게 하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 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역시 기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장13절의 기원이 5장23에 마지막에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 거룩의 문제를 바울이 다시 한번 강조하는 데는 바울 나름대로 걱정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몸을 담고 있었던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아직도 완전히 씻지 못한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옛 생활의 습관이나, 옛 생활의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주자주 불결한 생각이나, 생활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4장3절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음란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문제가 참으로 심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문제점을 바로 찔러서 확인 시키는 것입니다. 음란을 버리라.

그 다음에 또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
부부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탈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5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쫒지 말라-”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이와같은 말을 사용하게 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적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제 편지를 끝맺어야 하겠는데, 마음에는 무엇인가 꺼림직하고, 시원치 않고, 걱정스러워서 무엇인가 또 한번 말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충동을 느낀 것이 바로 이 성화-거룩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5:23).
여기서 온전히 거룩하게 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완성된 단계에 이르기까지 너희들이 거룩해 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아무리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고,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기 전에 성적으로 난잡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나, 정상적인 길을 걷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도 한 동안 그 취약한 문제로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 안에 취약점을 안고 있고, 밖으로는 무서운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비록 변화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 쉽게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여기에 걸려 있었습니다.
고린도와 함께 데살로니가 시는 그 당시에 성적으로 부패하고 있던 도시 중의 하납니다. 좀 난잡하고 윤리적인 기준이 별로 없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온전히 거룩하게 하옵시고 하는 이 말 가운데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완성에 도달 될 때까지 성령께서 너희들을 자꾸 거룩하도록-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기원이 그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은 이런 문제점이 없는지, 각자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크리스챤들은 성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편지를 끝내기 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거룩해 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24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온 영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흠없게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적으로든, 윤리적인 문제든간에 거룩해지는 성화 작업은 全人格을 통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全人格이 거룩해 지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생각만 거룩해져서도 안됩니다. 몸까지 거룩해져야 합니다.
감정만 깨끗해져도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 밑바닥에 흐르는 의식까지도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전인격이 모든 면에서 주님처럼 거룩해지도록 성장해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우리는 달성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전인격적인 거룩을 강조하기 위해서 靈과 몸과 魂이 온전히 거룩해 지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는 전인격적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육체도 여기서는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침례파 주의자들은 - 마음만 죄를 범하지 아니하면 육신이 설혹 더러운데 관계가 되어서 오염이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이들을 완전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은 바른 이론이 아닙니다. 그러니 생각만 깨끗합니까? 몸도 깨끗해야 합니다. 몸도 깨끗합니까? 의식도 깨끗해야 합니다. 지.정.의만 깨끗합니까? 아니요. 몸까지도 깨끗해야 합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보전하시기를 원한다고 했고, 24절에 넘어가서는 너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미쁘시니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를 흠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왜 불렀나요. 4장 7절하고, 5장 24절을 연결 시켜 보세요.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얼마나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불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꼭 같은 사람을 만들만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불렀어요.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를 그와 꼭같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이니까 그 성실하신 하나님은 그 부르신 목적에 따라 반드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육신이 약하여 아무리 마음으로 원해도 잘 안되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저 참고 참고 기다렸다가 이 육신을 벗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흠과 티가 없는 성화인으로 설수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고 자꾸 강조합니까? 왜 색욕을 버리고, 왜 음란을 버리고, 왜 거룩하게 생각하고, 거룩하게 마음에 느끼고, 거룩하게 행동 하라고 합니까?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계속 거룩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나는 책임지지 아니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면서 만드시는 방법 중의 하나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거룩하게 살라고 계속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계시는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의 하나로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계속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을 순종할 때,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일치 되게 됩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아무리 나를 거룩하게 하고 싶어해도,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하는 명령을 우리 스스로가 기쁨으로 순종하지 못하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만족할 만한 목적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주님의 재림하실 때에, 흠있는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 나중에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하고 나서,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까? 네. 예수님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잡니다. 「아,이제 됐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좋은 말이지요. 성경적인 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이상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거짓과 건성으로 그렇게 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입으로만 고백을 하고 생활에서는 여전히 거룩하지 못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생동안 믿음은 가졌다고 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 더러운 생활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 앞에 흠없는 자로 설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분명히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경건한 삶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일치 할 때만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고, 주님 앞에 설 때에 흠없이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믿음이 사람 보기에는 완벽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삶이 그대로 계속 되는 변화없는 삶이라면 그 믿음은 사람이 보기에는 완벽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술집 접대부 아가씨들이 저녁에 술집에서 마음대로 생활하다가 마음이 컬컬해서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는 “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힘을 주옵소서. 주여, 나는 믿습니다.” 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하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죄를 끊어야 합니다. 불결한 범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티없이 흠없이 설 수 있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고백해도 삶은 예전의 자리에 되돌아가서 못된 짓을 하면 그것이 만약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聖化는 꼭 믿음과 생활이 일치되는 데서 완성될 수 있고, 성화는 성령의 역사와 나의 순종이 함께 보완이 되는 데서 완성이 될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오시는 그 날 흠없이 주 앞에 서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중보기도를 요청(25절)

25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겸손한 인간성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특별한 은사와 계시를 받은 사도입니다. 그의 사명은 가장 탁월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의 입장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과 기도는 해 줄 수 있을지언정 남의 기도를 필요를 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의 기도를 요청합니다.
로마서 15장 30절 이하에도 기도의 요청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11절에도, 엡6:19, 골4:3-4절 이하에도 기도의 요청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서로 기도로 의지할 필연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한사람의 기도와 한사람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연합된 기도와 합심기도가 큰 위력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제자를 한사람 만 만들어 놓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기도하고, 기도로 서로 도울 때,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고 중의 영광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자기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남에게 기도해 달라고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기도했습니다. 1장2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계속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기도로서 서로 의지하면서 중보기도를 하며 삽니까?
우리는 얼마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 기도는 너무나 좁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만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 기도는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합니까? 그것은 폐쇄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월드 크리스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기도도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 나아가는 중보기도의 폭을 넓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기도로 빚을 지고 있습니다. 기도로 서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는 나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남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십시요.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줄 테니, 당신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부끄러움 없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모든 형제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라

또 한가지를 보겠습니다. 
27절입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에게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여기에서 모든 형제에게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바울에게서 편지가 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날처럼 복사를 해서 한 장 씩 나누어  주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요. 결국 교회에 모아 놓고는 한사람이 나가서 읽어 주었겠지요. 1장부터 5장까지- 한 30분까지 읽어 줍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엄숙하게 듣습니다. 정말 살아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을 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 새벽에 오래 동안을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인들은 죽 읽어 내려가는 것을 듣고 깨달으며 회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교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식으로는 우리가 많이 알고 있을지 몰라도 영적인 일, 신앙에 있어서는 현대인들은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당부할까?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약간의 잡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재림을 기다리다가 규모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또 책망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 주저 앉아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는 서로 화목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잡음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집회 시간에 성도들이 모일 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앉은뱅이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편지를 보냈다니까 그 것을 듣기 싫어서 일부러 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가면 한사람도 빠짐없이 이 편지를 읽어서 듣게 하라. 주저 앉아 있는 사람도 나와서 듣게 노력하라. 듣기 싫어서 귀를 돌리는 사람도 억지로라도 듣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선인이나 거룩한 자나 더러운 자나 막론하고 말씀을 들을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강요합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역사가 일어 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병든 사람도, 말씀을 들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무리 음란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 날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어 줄 때에 모든 성도가 다 와서 듣도록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만이 꼭 나와서 들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돌작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기 때문입니다.
들을 때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큰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여튼 들어야 합니다.
주일날 저녁에 뿐만 아니라, 수요일 예배에도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셀 구역식들 모두들도 데리고 나와서 예배시간에 들어야 합니다.

숫자가 얼마나 앉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문제가 풀리고, 해결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 들으니까 해결이 안나지요. 들어 보세요! 듣는 순간에 문제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영적인 문제, 생활의 문제, 사업과 직장의 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말씀을 듣는 순간 순간에 성령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들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듣게 하려고 데리고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마세요.
자녀들을 방치해 두지 마세요.
여러분의 친구나 이웃을 그대로 버려 두지 마세요. 듣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의 지난 1년 동안에 변화된 사람들을 자세히 보세요.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바뀌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3] 결 론

마지막으로 26절을 봅시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성경에 보면 사랑하므로 입맞추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고는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의 입맞춤 이라고 한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이 추잡하니까 거룩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거룩하라! 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경건에 힘씁시다.
거룩한 삶에 승리합시다. 주님 앞에 설 때에 흠과 티가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중보기도에 더 힘을 씁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더욱 힘을 쓰셔서 항상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8절을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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