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⑨ - 겸손하십시오 (약 4:1-10)

  • 잡초 잡초
  • 296
  • 0

첨부 1


 

     

이 름 야고보서 4장 1 - 10절 날 짜 2004/12/20 (19:32:15)
홈페이지  번 호 124 조 회 2
제 목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⑨ - 겸손하십시오 












말 씀 : 야고보서 4장 1 - 10절          빛과 소금의 교회 주일 예배





제 목 :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⑨ - 겸손하십시오

영원히 존재할 것같았던 제국, 로마는 외부의 대적에 의하여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내부의 분란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팀, 강력한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내부의 분란은 이기지 못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아도 내적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는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 원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는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공동체입니다. 마귀의 수하에 있던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나라가 임하도록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에는 절대승리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마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전투는 승리가 약속된 전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들은 무너지기도 합니다. 왜 무너집니까? 절대 승리의 약속이 있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내부의 분란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사도 야고보가 다분히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문투로 말하고 있음을 느끼셨습니까? 오늘 본문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도 교회를 향한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투는 풀풀 배어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이 본문에서의 싸움과 갈등은 신체적으로 치고 박고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보통 윤리적인 논쟁, 시비를 가리는 말다툼을 지칭할 때 쓰이곤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너희 중에”<1절>, “너희 지체 중에서”<2절>라고 명확히 지적하는 것을 보면, 사도 야고보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문제를 삼는 것은 교회의 분란, 교회 안의 다툼, 교회 안의 갈등과 싸움입니다. 즉 야고보는 교회 안의 갈등과 다툼을 화두(話頭)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갈등과 다툼은 왜 있습니까?  <1-3절> 다시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너희가 모르지 않지 않느냐? 교회 안에 싸움과 다툼이 있는 이유, 뻔하지 않느냐? 너희 정욕, 욕심 때문이 아니냐?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용을 쓰는 재주를 하여도, 시기와 질투를 부린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는 얻지 못하지 않더냐?

어디 그것뿐이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낸들, 욕심이 근원이 되어서 해 봐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얻어지더냐? 안 되지 않더냐?” 1-3절의 말씀이 이런 뜻이지요?

교회의 다툼과 분란은 인간의 정욕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욕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에도 악의 삼총사, 정욕, 세상, 마귀는 함께 등장함을 주목하십시오. 정욕, 세상, 마귀 이 셋은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세속에 푹 빠진 마음이고 그 마음이 마귀에서 속고 있는 마음입니다.

정욕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체는 무엇입니까?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이 본문에서 정욕의 정체를 세 가지로 규명했습니다. 소유의 욕망, 감각의 욕망 그리고 존재의 욕망.

무언가를 더 얻고자 하는 욕심이 소유의 욕망입니다. 소유의 욕망은 만족을 향한 마음의 변질, 타락입니다./ 기분좋기를 바라는 욕심이 감각의 욕망입니다. 감각의 욕망은 기쁨을 향한 마음의 변질, 타락입니다./ 그리고 성공과 인정받기를 바라는 욕심이 존재의 욕망입니다. 존재의 욕망은 가치와 의미를 향한 마음의 변질, 타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열망도 없고 의욕도 없는 상태로 지으시지 않았고 또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도 만족을 얻으며 기쁨을 누리며 가치를 성취하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에 참된 만족과 참된 기쁨과 참된 가치를 향한 열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변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열망이 자기 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 문제입니다. 소유를 늘리면 만족할 것같고/ 쾌락을 맛보면 기쁠 것같고/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성공하면 가치있는 존재가 될 것같고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변질, 타락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사단에게 속은 것입니다. 도리어 이 정욕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보다도 못하게 전락시키는 주범들입니다. 이 정욕은 바로 사도 요한이 명확하게 지적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똑같습니다.

오늘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교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도 이 정욕적, 세상적, 마귀적 욕망 때문에 교회의 지체들 간에 갈등과 다툼,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가 다툼을 예방 혹은 극복하며 영적 승리를 누리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오늘 야고보는 실제적인 권면을 반복하여 명령,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손을 성결케 하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 주 앞에서 낮추라.

이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기억하기 쉽게 셋으로 추려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 성도간의 갈등과 다툼을 피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영적 승리를 누릴 것인가?

첫째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한 분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은 화끈한 분이십니다. <5,6절>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사랑이 뜨거운 여자가 시기, 질투도 많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애인, 교회가 세상과 벗되고 마귀에 속고 정욕에 이끌리는 꼴을 못 보십니다. 가만히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벗이 되는, 세속적이 되어가는 것을 못 견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편에 온전히 서는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배반하는 자를 시기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화끈한 분이신 것, 계시록 3장에도 나와 있지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제일 심하게 책망하신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일 호되게 책망받은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그러므로 <약4:7,8>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하나님께는 순복하고 마귀는 대적하고 네 마음과 태도를 명확히 하라. 죄악된 행실에서 손 씻으라, 마음을 분명히 확정하라 하나님 편에 서서 살든지, 세상 편에 서서 살든지 분명히 하라. 하나님 편에 분명하게 서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실상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교양을 갖추는 것도 아니고, 취미와 여가를 하나 늘리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 위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천국 보험을 드는 것도 아니고, 돈벌고 복받는 수단은 더더욱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왕권 다툼을 벌이는 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왕되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롬12:1>이 명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교회 안에 분란이 있는 많은 경우는 하나님 편에 분명하게 서지 못한,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이 인정을 받고자 하고, 교회를 자신의 성취 욕구의 장으로 삼고, 그래서 세상적 가치관, 인간적 지혜를 교회에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인의 숫자와 헌금의 양에 민감하고 직분에 민감하고, 지위에 민감하고, 자기 주장에 민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진 사람에게 은혜를,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이 불공평하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당신의 편에 서는 사람, 순진하게 보일 정도로 당신에게 헌신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임재를 나타내 주십니다. “여호와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하나님께 명확하게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없이 많이 기도하여도, 많이 종교적 열광을 보인다 할지라도,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 말씀을 넘지 못합니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당신의 인생 전체를 헌신하십시오. 하나님, 이제부터 하나님이 제게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제가 인생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실감나게 체험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가 소극적으로는 갈등과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기 위하여 둘째로는,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정욕을 거부하고 세속을 멀리하며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귀신들린 사람을 축사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마귀의 영향을 물리치는 것이며, 욕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며, 당신의 삶에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며 욕정과 세속이 마귀적인 것임을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삶에 정욕과 세속을 그대로 놔둔 채 아무리 “마귀들과 싸울지라!” 난리를 치고 소동을 벌이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제일의 현장은 당신의 마음 안입니다. 내 마음 안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열망, 돈에 사로잡히거나 찌들린 마음, 쾌락에 급급한 마음을 거부하고 그 죄악에 물든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대적합니까? 마귀가 어디있나 마귀에게 민감해지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이렇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근에 살던 주민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드시나요?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테레사 수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마귀가 틈타지 못하는 아름다운 마음, 거룩한 성품은 고고하게 손에 흙 묻히지 않도록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사는 삶에서 길러집니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에서 길러집니다.

끊임없이 내가 더 얻고, 내가 더 취하고, 내가 더 오르고, 내가 더 인정받고 이렇게 자신으로 향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갈 때에 세상의 유혹은, 마귀의 미혹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셋째로, 교회가 소극적으로는 갈등과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기 위하여, 셋째로는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마귀를 대적하는 구체적 태도가 겸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 사실 우리의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1cm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가까이 하십니까? 마음이 겸손한 사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의 맨 처음에 해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가 명확히 밝혀 줍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 

또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대적합니까? 영적 전투의 세 영역이라는 책을 쓴 프랜시스 프랜지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를 이기는 결정적인 열쇠는 겸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덕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겸손 앞에 기겁을 합니다. 그는 겸손이 하나님께 영혼을 바쳐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을 미워합니다”

쉬운 이치로, 겸손한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스스로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도 한 믿음 한다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고 주장이 강하지요? 목소리가 크다는 것, 음성이 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겸손한 척 하려는 사람이 자기 주장이 쎄면서 부드럽게 말하고 조용히 말할려고 하지요? 겸손한 척 하려는 사람이 속으로 자기 생각 절대로 굽히지 않으면서 온유한 척 하지요?

우리 역사에 겸손한 관리의 한사람을 꼽으라면 세종 대왕 때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맹사성이 겸손을 배우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27살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공주 목사로 있던 어느 날, 맹사성은 무명의 선사(禪師)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무명의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아는 이치인데 먼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 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일어나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녹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하면서 맹사성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차를 부어 주는데 찻물이 흘러 넘치는데도 자꾸만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맹사성은 "스님, 찻물이 바닥을 망칩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계속 찻물을 따르자 맹사성은 화가 났습니다. “스님, 뭐하십니까? 찻물이 바닥을 망치고 있다니까요?”

그러자 이 선사가 맹사성을 바라보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찻물이 방바닥에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왜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머리를 문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스님의 예를 들었으니까, 교인의 예도 하나 들어야지요? 평양 산정현 교회의 어느 주일날 예배에 조만식 장로님이 독립운동가를 만나느라고 예배시간에 늦어서 주기철 목사님이 설교하는 시간에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설교하던 주목사는 늦게 들어오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연배도 조만식 장로님이 훨씬 많았고 또 평양의 산정현 교회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한 주 인물이 조만식 장로님이었고 더욱이 조만식 장로님은 오산학교 때 주기철 목사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장로는 주기철 목사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주기철 목사는 조장로에게 기도하라고 하자, 조장로는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애국운동한다고 사람을 만나다 하나님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면 설교하다 말고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며 눈물로 기도하자, 주목사와 온 교우들이 함께 울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마귀를 이기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교회에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있지 않았습니까?

겸손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구체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기를, 자신을 낮추기를 힘쓰십시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범사에 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 빼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을 비싸게 여기는 사람이고 사실은 겸손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서지 않지만 순종을 잘하는 마음, 바른 경책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 자존심에 민감하지 않은 마음, 까다롭지 않은 마음,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마음이 겸손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을 기억하여 인간은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은혜입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며 기쁨을 주며 참 가치와 의미를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면,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입니다<잠13:10>.

그러므로, 소극적으로는 교회의 갈등과 다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능력을 누리도록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겸손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