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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아브라함이 바라본 성탄 (창 2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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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의 성탄절에는 향락만 있고, 복음이 없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12월이 되기 무섭게 제일 먼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캐럴을 틀어대는 곳이 어딥니까? 백화점과 유흥업소입니다. 또 성탄절 이브가 되면 맥도 모르는 청춘남녀가 들뜬 모습으로 길거리에 쏟아져 나옵니다. 어린 아이들은 양말을 걸어놓고 산타 할아버지가 줄 선물에 온통 관심이 집중됩니다. 이런 세상 풍경들은 혹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성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잔치’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교회와 먼저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성탄의 의미를 전하고 가르쳐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습이 성탄절의 참 모습과 동떨어질수록 우리는 자성하고 성탄의 복음을 전하는 열심을 내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탄이 얼마나 놀라운 의미를 가지는지 성경을 읽고 잘 공부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먼저 우리 자신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웃에게 성탄의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의 1차 의미 : 온전한 신앙의 테스트

창세기 22장은 유명한 모리아산 사건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여서 제물로 바칩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런 명령을 내린 하나님도 대단하지만, 그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죠. 이 황당하고 충격적인 명령을 하나님이 무슨 까닭에 내리셨을까요? 그 잔인무도한 짓을, 그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고대 중근동에서는 인신 제사 풍습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몰렉 신 숭배자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자기 아들을 불에 지나가게 하면서 인신제사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냐 하는 겁니다.

1차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 창22:1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 ”라고 말씀합니다. 창22:2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 ...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납니다.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잔뜩 싣고서 모리아 산으로 갔던 겁니다. 3일 길을 갑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충동적이 아니라 참 신앙인가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인 듯합니다. 우리 말에 작심 3일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충동적으로 결정하면 이내 그 마음이 변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3일은 아브라함의 분명한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환들이 혹시 방해할까봐 산 아래 떼어놓고 이삭과 함께 산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제단을 쌓고 장막을 벌여놓고 그 위에 이삭을 묶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 합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각을 떠야 되기 때문이죠. 창22:10 보면 그것은 완전한 순종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 ” 그때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황급하게 부릅니다. 창22:11.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창22:12 “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한 신앙을 확인한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자식조차, 아니 자기 자신조차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게 참 신앙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기 목숨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가 10세에 겨우 얻은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태어난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삭(웃음)이라 이름을 붙였죠. 무럭무럭 자라 이제 10대 청소년이 됐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110세가 훌쩍 넘었습니다. 얼마나 대견했겠습니까? 얼마 후에 장가보내면 손자까지 볼 겁니다. 생각만 해도 즐겁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바치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충격이었지만 그는 참 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맡기는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죽이기야 하겠는가? 죽여도 살려내시겠지 ... 이런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히11:17~19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한 1차적 목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온전한 믿음을 소유했는지 확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이 달성되자 칼로 내리치는 아브라함을 황급히 제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하나님이 예배해 두셨던 수양을 갖다 번제로 바치게 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의 1차 의미 : 성탄에 대한 체험 학습

그런데 이 외에 또 한 가지 2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온전한 신앙을 갖춘 것으로 확인되자 하나님이 그에게 중대 선언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하셨던 것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인류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것이 오늘 봉독한 본문 내용입니다.

15절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16절~18절입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선포됩니다. 이미 주신 말씀이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온전한 신앙인으로 인정된 아브라함에게 공적으로 선언하시는 겁니다.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7절과 18절을 보면 ‘네 씨’라는 말이 3회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특이한 단어입니다. 동일한 단어로 때로는 집합체를, 때로는 개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17절(상)에 “ ...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 ”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렇게 많아질 것은 예언합니다. 그리고 17절(하)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네 씨’는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대에는 성문이 중심지(downtown)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을 차지하면 그 성을 정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적, 즉 원수 마귀의 권세를 파할 것을 의미합니다.(창3:15 참조) 그리고 18절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혈통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천하 만민이 구원의 축복을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마1:1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에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십자가 대속의 제물이 되려면 인간이 되셔야 되고, 동시에 무죄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깨끗한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아브라함의 후손)의 호적이 입적됨으로 인간 족보에 올라간 겁니다. 하나님의 이런 오묘한 섭리 가운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그냥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느끼도록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2차 목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것을 이론만이 아니라 직접 체험함으로써 깊이있게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을 가리켜 ‘체험학습’(Role Playing)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랬기에 소기의 목적이 달성하시고는 이삭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 대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의 성장 과정이 아브라함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금 10대 청소년이 된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 심정을 더 철저하게 느끼게 하시려는 듯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22:2절 보면 이삭을 그냥 불러도 되는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마음을 후벼 파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니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마치 “너, 마음이 아프지? 나도 나의 독생자를 보낼 때 그렇게 아프다!”라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굿간의 누추한 말구유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헤롯의 핍박을 피해 애굽에 피난갈 때,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 겟세마네에서 쓴 잔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통하며 기도하실 때,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실 때, 특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실 때, ...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것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체험해 보게 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부모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심정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기가 막힌 겁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가 큰 형이 군대에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소포가 왔습니다. 풀어보니 입대할 때 입고 갔던 옷과 신발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부둥켜 안고 펑펑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저게 발 부모의 마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나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뉴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집마다 그 유리창에 별을 붙여놓았습니다. 어느날 밤 한 한 아버지와 아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광경을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어떤 집은 창문에 별이 있고, 어떤 집은 별이 없나요?" 아버지는 별이 붙은 집은 아들이 전쟁터에 나간 집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는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참 가다가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외쳤습니다. “아빠, 저것좀 보세요. 하나님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셨나봐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전쟁터보다 더 흉악한 십자가 사지(死地)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체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요8:56 보면 그 사실을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물론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의 연대가 엄청 차이나니까 직접 본 것은 아닐테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예수님의 성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래서 모리아 산을 가리켜 ‘구약의 갈보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 가지 더 보태봅니다. 모리아 산은 ‘구약의 말구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탄절을 가리켜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고 부릅니다. 물로 맞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으로서는 독생자를 보낸 슬픈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새드 크리스마스!(Sad Christmas)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새드 크리스마스를 보았던 것입니다.
[3] 성탄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 하나님의 무한대 사랑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공감한 대로 엄청난 아픔을 감수하시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성탄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청난 사랑! 무한대 사랑! 그 사랑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사랑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그 크신 사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① 구원의 확신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구원의 계획을 이끌어오셨다면,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예수님이 오셨다면, 예수님을 믿는 나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원대한 계획에 의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상황이 내 인생 가운데 닥친다 해도 그 구원을 취소하실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도 결코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할지라도 당당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승리의 확신 :

우리는 인생 살다가 때때로 어려움을 당하면 이런 생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생기는가? 그러나 그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내 인생 전체를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정말 그렇죠.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를 구원함으로 자녀 삼으셨는데 무엇이 아까워서 우리를 고통 가운데 방치하시겠습니까?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확신하면서 어려움 중에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케 해 주실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지어 부모의 사랑보다 큰 것입니다.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 ”

한 소년이 산 속에서 실종이 됐습니다. 수색대가 며칠동안 숲속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답답한 나머지 전단을 만들어 헬리콥터로 뿌렸습니다. 그 전단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가 곧 간다.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려라. 추워도, 배고파도, 무서워도 참아야 한다. 아빠가 꼭 갈께." 결국 그 전단을 소년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참아냈습니다. 그 며칠 후 수색대가 드디어 소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한 아들은 인내할 수 있었고 무사히 구출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사랑으로 인내합시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꼭 승리합시다!

③ 사랑의 헌신 :

하나님의 그 사랑을 체험하면 누구든지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충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헌신하게 됩니다. 바울이 목숨 다하도록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까운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까운 게 없으시듯 우리도 그 사랑을 깨달으면 아까운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 다 바쳐, 시간과 물질 다 바쳐 충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무한대 사랑을 체험하고 더욱 더 나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 교회를 섬기는 일 등에 충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우리에게 기쁜 날이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에게는 아픈 날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우리도 그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붙잡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새 힘을 얻고, 그 사랑 때문에 더욱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부디 이번 성탄절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픈 마음 속에 담긴 그 큰 사랑에 아름답게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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