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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성전과 새 생명 (딤전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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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설교내용  동해안 정동진을 가 보신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정동진은 바닷가입니다. 조그마한 기차역이 하나 있고, 그리고 조그마한 산들이 옆에 둘러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정동진에 1년에 수백만명씩 사람들이 옵니까? 저도 어울려서 몇 번 가 보았는데 가보니 공기좋고, 바다경치도 좋고, 여러모로 만족하지만 혼자서 일부러 찾아갈 매력은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동진을 찾습니다.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없었다면 아마도 정동진은 명소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남 땅끝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가면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작은 바닷가가 있고 마을이 있고 산들이 있습니다. 그 이상 별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 때문입니다. 의미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시각이 달라지고 우리의 감각이 달라지고 우리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집은 보이는 건물입니다. 보이는 장소입니다. 영천교회의 보이는 교회는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집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새 성전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그 집의 본질은 건물이 아닙니다. 본문에 두 가지로 강조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집입니다. 그래서 그 집은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건축에 있어서 제일 기본은 터입니다. 터가 없는 곳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건축구조물을 올리는데 필요한 것은 기둥입니다. 기둥을 세워 골조를 해야만 건축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터와 기둥은 진리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예배당은 온갖 건축자재로 짓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로 지어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교회의 터입니다. 진리가 교회의 기둥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의미가 달라집니다.

  지금 북한에는 몇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는 현재 비공식적으로 60만명의 지하교인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도 있고 교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에 없는 말이 여러 개 있습니다. 성전건축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60만명이 있지만 교인들이 헌금해서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봉수교회를 비롯한 당에서 세운 몇 교회는 관제교회입니다. 당이 세운교회입니다. 그리고 북한에는 개척교회라는 용어도 없고, 성전입당이라는 용어도 없고, 우리가 누리는 교회의 본질이 살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수없는 건축물이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아파트건설, 관공서건설, 온갖 빌딩, 도로공사 등 건축물이 그야말로 한 해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서대문 사거리에 가보면 경찰청 앞이 완전 빌딩화가 되었습니다. 마포대교로 가는 충정로 일대가 지금 빌딩가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빌딩없는 동네는 독립문 사거리 밖에 없습니다. 온 시내가 빌딩화 되어가고 놀라운 건축물이 계속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감동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예배당 건축도 계속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 건축은 중단되고 일반 세속건물만 세워진다면 이 나라는 영적으로 희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지구촌에 예배당 건축이 중단된 나라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어 놓은 예배당도 폐쇄 직전에 가 있고, 교인이 없는 예배당, 예배가 없는 예배당, 전도가 없는 예배당, 교육이 없는 예배당이 많이 있습니다. 서구의 예배당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미국의 이민 1세대가 세웠던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교인이 없습니다. 예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라는 것이고, 진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가 터전입니다. 진리가 기둥입니다. 교회를 지탱하고 세워가는 것은 진리이지 건축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짓는 성전은 보이는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이는 집을 짓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돈을 많이 들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집이요 우리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새 성전을 짓는 줄 믿습니다. 터와 기둥은 건축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교회는 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의 터가 무너진 현상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기둥이 흔들리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진리의 터가 되는 교회

  그러면 교회의 터와 기둥은 진리라고 했는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본문 디모데전서 15장 15절 상반절에 보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해 주는 기준입니다. 진리가 우리의 삶의 기준이고, 신앙생활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기준입니다. 소교리문답에 보면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법도”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믿을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무엇임을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진리로 세워집니다. 진리로 지탱됩니다. 진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교회가 영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해서 자기를 변호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대해서 본문 16절에서는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하면서 말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고 진리는 이 땅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으로 나신 분입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보이시고” ‘영으로’는 부활하신 영입니다. 예수는 부활한 진리입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천사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구주가 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늘로 승천하신 진리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땅 위에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가장 강조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라.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요,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서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진리와 아들 두 가지는 동격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세 가지 자유를 주십니다. 죄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의 종입니다. 죄의 멍에를 벗어난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성경은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했고, 죄의 멍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를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죄를 이겼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의 사슬을 끊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죄의 세력을 이겼습니다. 죄를 이기신 분이 예수이기 때문에 속죄의 주를 믿을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교도에 빠진 극단적인 배교자였습니다. 그는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이교에 빠졌습니다. 이교철학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어느 날 로마서 13장 11절 이하를 읽으면서 “너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죄를 벗고 정욕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로마서의 메시지 앞에 영혼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인 어거스틴은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죄를 깨뜨리신 속죄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에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누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떤 인간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부처도, 마호멧도, 이 땅위의 어떤 철학자도, 사상가도, 어떤 교주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 분 안에서 죽음에 대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의 값으로 오는 심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지옥의 형벌로부터 자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자유가 진리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보이는 집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진리가 있는 곳입니다. 이 진리는 교회의 터입니다. 우리 교회를 지탱하는 터는 보이는 터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의 터가 진리요 기둥이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합니다.

  새 건물 안에는 온갖 시설물이 필요합니다. 집을 지어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사람이 집을 지어 입주해서 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설물이 필요합니까? 그냥 골조를 세워고 창문을 달았다 해서 집이 아닙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살기까지는 수많은 시설물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예배당을 하나 입당해서 사용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시설물이 필요합니다. 온갖 비품, 구조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가장 어울리는 비품이 무엇일까요?
  집사님 한 분이 제게 서예 액자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목사님, 제 동생이 서예가인데 제가 특별히 부탁을 해서 액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목사님 필요한 데에 걸어두십시오.” 보니 그분은 천주교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내용도 천주교식의 글로 쓰셨습니다. 제가 붓글씨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서예감상은 아주 좋아합니다. 글을 감상하는 감각은 있습니다. 글씨를 굉장히 잘 썼습니다. 그분에게 글을 받으려면 상당한 고액을 주어야 합니다. 그 집사님이 동생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새 성전에 액자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소중한 것 아닙니까? 액자가 얼마짜리인가가 아닙니다. 마음 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담아서 액자를 선물한 것은 하나님이 귀하게 받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그 액자를 볼 때 ‘카톨릭 신자가 여기에 있는가?’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스님이 썼더라도 서예대가로서 스님이 쓴 글이라면 얼마든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님으로 쓴 것이 아니라 서예가로 쓴 것입니다. 서예가의 예술성을 가지고 쓴 글을 우리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님이 쓴 책을 얼마든지 읽어도 됩니다. 스님이 쓴 책이라고 만지지도 말라가 아닙니다. 스님들이 쓴 글 중에 얼마나 좋은 글이 많습니까? 편견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당에 못 걸어 놓을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당에는 여러 가지 비품이 필요합니다.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께 설교제목으로 표현하지 않는 성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생명”입니다. 새 건물에는 새 생명이 가장 어울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새 성전에 출입하는 우리의 믿음이 새로운 믿음,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자세로 새 성전에 출입할 뿐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인도함을 받아서 한 생명이 하나님의 교회에 드려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새 집을 지은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은 아주 힘듭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요즘 자전거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저를 즐기는 분들 중에 자전거를 이용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자전거는 기어변속에 아주 묘미가 있습니다. 보통 아마츄어들이 타는 자전거도 1단에서 21단까지 기어가 있습니다. 고개를 올라갈 때는 힘이 드니까 1단 기어를 넣어야 합니다. 1단 기어는 속도는 나지 않지만 힘이 좋습니다. 그래서 1단 기어를 넣고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패달을 밟아야 고개를 거뜬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평지나 내리막길은 21단으로 가야 합니다. 평지에 1단 기어를 넣으면 바퀴가 빙빙 돕니다. 내리막길에도 빙빙 돕니다. 평지에서는 21단으로, 내리막길에도 기어변속을 해야만 속도가 제대로 나오고 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의 기어변속이 꼭 신앙생활 원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할 때 처음부터 21단 기어로 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처음 단계는 1단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전도 대상자를 찾는 것도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전도 대상자를 찾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찾으십시오.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찾았으면 전화하는 수고, 찾아가는 수고, 만나는 수고, 교회로 데리고 오는 수고는 전부 1단 기어의 수고입니다.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예사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한 사람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5단이 되면 자전거가 저절로 굴러갑니다. 5단정도 되면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속력은 좀 덜나지만 됩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고 혼자 스스로 교회에 올 수 있는 정도는 5단 정도라고 봅니다. 5단까지는 여러분들이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5단까지는 내가 전력을 다해서 그 생명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한 생명이라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생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주일예배에 나올 수 있는 단계까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학습, 세례를 받는 단계는 10단으로 봅니다. 이제는 마음놓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력을 내어서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21단을 넣고 달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제직으로 충성할 줄 알고, 교사, 성가대원으로 섬길 줄 알고, 예수님 이름으로 이웃을 위해서 베풀 줄 아는 것이 21단의 단계라고 봅니다. 자전거 21단으로 타면 속력도 나지만 자유롭습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21단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5단, 10단, 21단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가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가야 합니다. 섬기면서도 자유롭고, 전도하면서도 자유롭고, 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행동이 진리 안에서 자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의미입니다.

  맺는 말

  신앙생활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보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한 교회입니다. 사람의 눈에 맞추는 것이 신앙생활의 격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 신앙생활의 터가 되고 진리가 됩니다. 내 신앙생활의 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새 성전에 어울리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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