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중요한 것은 끝이다 (딤후 4:9~18)

  • 잡초 잡초
  • 620
  • 0

첨부 1


- 설교 : 유관지 목사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열세 권의 편지성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디모데후서는 그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앞의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라고 한 것을 보면 혹시 바울이 사형을 언도 받고 집행을 기다리면서 디모데후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전제(奠祭)라는 것은 제물을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을 자기의 피를 제물로 삼아 제단에 부어드리는 제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순교할 때 대부분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와 같은 디모데후서를 잘 읽어보면, 특히 디모데후서의 4장을 잘 읽어보면 바울은 끝을 아주 잘 맺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운동경기, 직장생활, 단체의 임원생활, 한 사람의 생애, 정권, 전쟁, 목회, 또 한 해를 보내는 일, 그 밖의 일들에 있어서 시작은 참 중요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끝입니다.
시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좋은 시작이 끝을 잘 맺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경을 많이 씁니다
앞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앞에는 열심히 읽습니다.

저는 주일설교 준비할 때 본문을 신구약성경 66권에서 골고루 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편식을 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성경 66권 제목을 죽 적어놓고 지난 주일에는 이 성경에서 본문을 택했고, 이번 주일에서는 이 성경에서 본문을 택하고, 이렇게 적어 나갑니다.
그것을 보면서 본문을 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 년에 주일은 쉰두 번 있습니다. 오늘이 쉰한 번째 주일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66권입니다. 자연히 빠지는 성경이 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왕기상, 열왕기하, 이와 같이 상하권, 또는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와 같이 전후서로 되어 있는 성경들은 한 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어서 ‘설교 본문이 과연 골고루 택해졌나?’ 점검을 해 보았습니다.
비교적 골고루 택해졌습니다.
그런데 전서와 후서로 되어 있는 성경에서는 대개 전서에서 본문을 택하고 후서에서는 본문이 택해지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 지금까지 사무엘하, 열왕기하, 역대하, 고린도후서, 데살로니가후서, 베드로후서, 요한2서, 요한3서에서는 본문이 택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중요한 말씀들이 후서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가 중요합니다. 특히 끝이 중요합니다.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는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하권입니다.
하권에서 결말이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상권이 있고 하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상권이고 내세에서의 삶은 하권입니다.
여러분, 하권이 좋아야합니다. 하권이 천국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권이 지옥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연주회에 가면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터미션이라고 하지요.
긴 오페라나 영화에도 인터 미션이 있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일어서니까 연주나 연화가 끝난 줄 알고 집으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감동적인 부분은 보지 못합니다.
오페라의 아리아들은 대개 인터미션 다음에 나옵니다.
영화 ‘십계’에서 제일 장엄한 부분은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인데 이 장면도 인터미션 다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줄 아는 사람은 인터미션에 집으로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4년의 끝부분에 와 있습니다.
2004년의 끝을 어떻게 보내야할까요?
이 가운데에는 삶의 후반부에 들어선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 삶의 후반부를 어떻게 보내야할까요?
아니 우리는 모두 매일 매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매일 매일을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선교회 회장, 속장, 그밖에 여러 가지 직무를 맡아 수고하다가 이제 임기 끝에 와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양교회 역사를 셋으로 나누면 노량진 시기, 강남 시기, 수지 시기, 이렇게 됩니다.
목양교회의 역사를 둘로 나누면 대 성전 이전 시기와 대 성전 시기, 이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 역사가 BC와 AD, 기원전과 기원후로 갈라지는데 대 성전 이전은 BC, 대 성전 이후는 AD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대 성전 이전의 시기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당회와 구역회를 하면서 내년 부활절, 3월 27일에 대 성전에 입당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때를 우리는 어떻게 보내야할까요?

바울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원합니다.

먼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 원망, 이런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11절 뒷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일차 전도여행을 할 때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이탈해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했습니다.
바울은 ‘일차 전도여행 때 중간에서 이탈한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가지고 바나바와 크게 다퉜습니다. 끝내는 바나바와 갈라섰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늘 ‘바나바, 그 분은 내가 회심했을 때 나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나를 소개하고 보증을 서 준 고마운 사람이야, 내가 고향 다소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안디옥교회에 불러서 같이 일하게 해 준 사람이야, 내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마가, 그 경망한 젊은 친구 때문에 그 바나바와 갈라지게 되었어!’ 이렇게 마가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마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청산합니다.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러분, 못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씻고 새해를 맞이하세요.
적어도 이 연말에는 그렇게 하세요.
요즘 카드를 보내는 때인데 그 사람에게 먼저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세요.
중국에서는 빚이 있는 사람은 연말에는 일단 갚아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다시 빚을 얻더라도 연말에는 갚아야 한답니다.
이 연말에는 마음의 빚을 일단 다 갚으세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바울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옴을 보면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 내가 원수를 갚고 싶은데 나는 갇혀있고 곧 처형을 받게 되어 그럴 수가 없어 유감이다. 네가 대신 혼을 좀 내다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4절 뒷부분을 보세요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하였습니다
주님께 맡겼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외국인 통일 전문가가 ‘한국 사람들이 동양적인 가치관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아들을 효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원수까지 갚으면 더 효자로 여깁니다.
‘우리 아버지가 6․25 때 빨갱이에게 죽었어. 내가 그 원수를 갚아야 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통일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세요.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는 사람, 변호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서운하고 화가 나는 일이지요.

이단 문제를 깊이 파헤치던 탁명환(卓明煥)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여러 이단들이 이 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이 분이 살아있을 때 ‘고소, 고발을 많이 당한 것으로는 내가 금메달일 것입니다.’ 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이 분은 경찰, 검찰, 법원에 많이 불려나갔는데 유리한 증언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 분은 그것을 늘 가슴 아파했습니다. ‘도와주지는 못하고, 증인신청을 하면 하나같이 피하고, 내가 조금 실수를 하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는 것이 야속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가 이단으로 지목한 종파의 직원에게 칼에 찔려 피살당했습니다.

바울은 그것도 잊으려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너 누구누구를 찾아가서 그 때 당신이 유리한 증언 한 마디만 해 주었으면 우리 스승 바울이 풀려날 수도 있었는데 당신 왜 꽁무니를 빼서 우리 스승이 끝내 죽게 만들었느냐고 따져보아라’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6절 끝을 보세요.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서운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올해,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임원을 하는 동안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까?
그 서운한 감정 씻고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세요.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렇게 하려고 애쓰세요.

바울은 마가에 대해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나에게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인내심이 깊어졌다, 나는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나 살피게 되었다, 사는 것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유익함이 있었다.’ 하는데 까지 이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 원망, 이런 것들을 버리려고 할 때 우리는 끝을 잘 맺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경건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가지고 올 것을 부탁합니다.
이 겉옷은 겨울 외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겨울에 전도할 때 입고 다니다가 따뜻한 계절이 되어서 벗어서 가보라는 사람의 집에 맡겨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때에 바울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힘씁니다.

동시에 바울은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이 가죽 종이에 쓴 책이 어떤 것일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바울이 틈틈이 기록해 둔 메모장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책일 것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만 구약 성경이었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기의 최후가 임박한 것을 바라보면서 성경을 읽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잘 아시는 대로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는데 감옥이 채광이나 조명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환경 가운데에서도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17절 끝을 보면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시편 22편 21절의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연말은 감정이 들뜨기 쉬운 때인데 여러분, 이 해의 마지막 남은 시간,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경건한 모습으로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본받으면서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만일 내가 만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 옆에 성경이 펼쳐져 있고 끝까지 성경을 읽은 흔적이 있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겠습니까?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대륙의 한 마을에서 혼자서 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침에 사람들이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원주민들이 ‘아, 리빙스턴 선교님, 평생을 우리를 위해 힘쓰더니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구나!’ 했습니다.

강재구(姜在求 )라는 군인이 있었습니다.
육사 16기생인데 1965년, 우리나라가 월남에  맹호부대를 파병할 때 지원하였습니다.
제1연대 10중대장으로서 중대장으로서 부하들에게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는데 이등병 한 사람이 너무 긴장을 해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백여 명 중대원들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이 수류탄이 터지면 수십 명이 죽고 다칠 판인데  강재구 대위가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쳐 자기는 죽고 중대원들을 구했습니다.
나라에서 이 분을 소령으로 특진시키고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 분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배낭에서 성경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성경은 지금 육사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강재구 소령의 동기생으로 나중에 대장으로 전역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육사 동기생인 강재구 소령이 그렇게 예수를 잘 믿었습니까?’ 물었습니다.
‘글쎄, 그런 티는 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배낭에서 성경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행군이나 훈련할 때 배낭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 넣었거든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대학생선교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준곤(金俊坤) 목사님은 늘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어쩌다가 갑자기 죽을 경우가 생겼어도 저에게 5분간 의식이 다시 돌아오게 해서 찬송 부르고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나타내고 영광 돌린 후에 다시 데려가길 바라나이다

이 분은 끝에 경건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경건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힘쓰던 사람이 끝에 그렇게 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목양교회는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건이라는 것은 영적인 예배, 기도, 성경 읽기, 전도, 교회가 전통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대 성전 이전 시대의 마지막 부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목양교회 교인들은 더욱 그래야합니다.

그 다음,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에서 어려울 때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방탕한 도시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비방을 들으며 어렵게 전도할 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 9~10)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급히 출동한 로마군대에 의해 목숨은 건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로마군의 영내로 끌려가서 채찍에 맞고 심문당합니다.
그리고 다시 공회에 섰다가 돌아옵니다.
그 밤에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이르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 11)

로마로 호송되는 배가 풍랑을 만나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어 모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의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 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이 곁에 서서 힘을 주시는 것을 압니다.
17절을 보세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주님은, ‘바울아, 너 전도하느라고 참 수고 많이 했다. 내가 너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네가 전파한 말씀을 모든 이방인이 듣도록 해 주마.’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옆을 보세요. 주님이 지금 여러분 곁에 서계시는 것을 느끼세요.
주님이 ‘아무개야, 2004년 말씀을 따라 사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다. 네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 주마!’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개야, 속장으로, 선교회 회장으로, 교사로, 찬양대 대원으로, 식당봉사로, 꽃꽂이 봉사로 수고를 많이 했다. 네 봉사가 헛되지 않게 해 주마!’ 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아, IMF 속에서, 이 불경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교세가  위축되어 가는 가운데에서 나의 집을 크게 짓느라고 수고 많이 했다. 이 수고가 헛되지 않아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 주마!’ 하는 음성을 모두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구원의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18절을 보세요.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나는 구원 받았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든지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임박한 자신의 순교를 예언하면서 자신이 지내온 생애가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갈망을 더욱 크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이 원망, 세속적인 관심, ‘나는 외롭다.’는 푸념, ‘나는 지금까지 헛일을 한 것 같다’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런 내용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 겉옷을 가지고 오고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지고 오라’ 하지 않고 ‘겉옷과 맛있는 것, 단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오라’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디모데후서를 읽으면서, 특히 4장을 읽으면서 어떤 비장한 감동을 받는데 그런 것, 없을 것입니다.
‘바울도 별 수 없었네!’ 했을 것입니다.
좋은 상품인데 싸구려 포장지로 포장된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낄 것입니다.
향내 대신에 비린내를 맡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10절에 나오는 데마라는 사람입니다.

데마는 바울과 전도생활을 잘 했습니다.
바울이 일차 투옥되었을 때는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서는 데마를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석방될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버렸습니다.
동시에 데마는 믿음도 버렸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의 여러 문서들을 보면 데마는 바울과 같이 있을 때도 여러 가지로 불편을 주던 존재였다고 합니다.
메디치(Medici) 도서관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데마의 고향은 데살로니가인데 데마는 데살로니가에 가서 이방신전의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잘 했습니다. 그런데 끝에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데마가 그동안에 한 수고는 기억되지 않고 데마라고 하면 ‘세상을 사랑하여 사명을 버린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끝에 잘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삼일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하는데 큰 소리로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열여섯 명 가운데 여러 명이 신앙의 절개, 민족적인 절개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친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아예 믿음을 버리고 천주교로 가버린 목사님도 있습니다.

여러분, 데마처럼 끝에 잘못하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바울처럼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세요.
어디 가니까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다가 떠난 자리도 향기롭습니다.’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어디에 붙어있는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끝이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끝입니다.
이웃에 대한 서운한 감정, 원망, 이런 것들을 씻으시기 바랍니다.
경건한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여 2004년의 마지막 부분을,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한 단계의 마지막 부분을 아름답게, 향기롭게 장식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목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