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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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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막을 조직이나 나라도 없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적은 믿음이지만 우리의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연약한 믿음이지만 이 믿음을 쓰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이 계절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탄의 계절입니다. 축복의 계절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 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도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축복의 말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고 가는 세대에 어쩌다가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있어도 똑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이 땅에 살아간 사람들이 수십억이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도 수십억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성경에는 사람의 만들어진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도 정확하게 초과학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여기에서 흙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에 보면 '먼지', 혹은 '티끌'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초에 티끌과 같았던 존재들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우리의 존재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티끌과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생령이 되어서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숨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입니다. 티끌과 같은 존재, 먼지보다도 못한 우리들이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니 그가 거룩한 생명력있는 산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기가 에스겔의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 속에 들어가니까 그들이 살아나서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안에 불어오면 우리도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될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면 나는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 교회 안에, 이 나라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면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안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주옵소서.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주옵소서. 이 땅에, 내 직장과 사업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옵소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숨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로봇이 움직이는데 그 로봇이 숨을 쉬더라.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로봇이 어떻게 숨을 쉽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엄마가 애기를 낳았습니다. 애기를 낳으면 육신의 양식을 먹던 탯줄이 걸려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신의 양식을 먹던 탯줄을 끊어 버리면 애기가 죽을까요? 죽는 줄 압니다. 육신의 줄을 끊으면 죽는 줄을 알지만, 육신의 줄을 끊고 생기를 먹어야 삽니다. 생기를 먹으면 삽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먹어도 살지 않는 것이 있고, 자꾸 먹으면 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동산의 모든 과일은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절대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여기에서 죽는다는 말은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먹은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개의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땅으로 빚었기 때문에 땅의 것을 먹으면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입니다. 낳아 가지고 우유도 먹이고, 음식도 먹이고, 자랍니다. 그런데 이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기는 자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을 먹어야 합니다. 땅의 것만 잔뜩 먹고 하나님의 생기를 거부한 인간은 결국 영적인 기형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기형아적인 영적 가분수들, 영적 기형아들로 이 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나님과 단절되고 끊어졌기 때문에 육신의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지식의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2000년 전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통해서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죄라는 말은 하나님과 끊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말 중에 제일 무서운 말 가운데 "자기 부모도 몰라보는 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우리를 만든 하나님도 몰라보면서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고도 스스로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영적 사생아들이 부모님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상태를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이 다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인간 스스로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단절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다시 구원의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세상에 이것처럼 귀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내 아들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내 어머니와 함께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제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이 암으로 소천했습니다. 제 후배 목사님이 위암 3기 판정을 받아서 수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아는 형제 자매들 가운데 너무 힘들고 어려운 한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저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너무 힘든 때를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용기를 가지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분명해집니다. 내가 온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 풍성히 얻게 함이라.

지난 주간에 이복순 권사님이 천국 문 앞에까지 갔다오신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남달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영생을 얻고 하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잘 살고 싶었습니다. 고통도 없고, 애통함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땅에서 조금만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싶습니다. 내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천국도 좋지만 여기서도 잘 살게 해 주세요. 이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쩌면 이것은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천국에 가서 삽시다"라고 말하면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아니라는 겁니다. 목사님이나 잘 가서 잘 사십시오. 천년도 좋고 만년도 좋지만 나는 여기서 잘 살렵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어떻게 하다가 망한 줄 아십니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기독교 가치관의 마지막입니다. 천국 지향적인 가치관이 기독교적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조금 복을 주니까 주여 여기도 살만하니 천천히 오시옵소서. 그래서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천국 지향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가정적인 문제로, 개인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픔, 그 고통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이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령인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 때에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고 자유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인들 두렵겠습니까? 과거로부터 자유하십시오. 환경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남의 구설수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내 자아로부터 자유하십시오.
현대인의 비극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신분을 만드는데 너무 익숙해져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멸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식이 조작된 사회 질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 질서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강요되고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렇게 살도록 배워졌기 때문에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거나 우리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감격에 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생아들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는 인간의 혈통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서 그의 귀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백성이요, 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라. 이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늘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주 예수 안에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지배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시 비전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비전이 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지나가다가 강을 보게 되면, 한쪽에는 모래밭이 있어서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거기에는 풍성함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풍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다 보니까 비가 한번 내리고 창수가 지고 여름이 지났더니 물줄기가 바뀌었습니다. 이쪽에 풍요가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물줄기가 내게로 흐르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물줄기를 돌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풍요의 물줄기를 내게로 흐르게 하옵소서. 풍성함의 물줄기를 내 직장과 사업에 흐르게 하옵소서"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을 결정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합니까? 제가 질문하는 것이 좀 어렵습니까? 원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느냐,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게 하느냐? 어느 것입니까? 여러분, 대통령의 일을 하면 대통령이 됩니까? 사람을 모아놓고서 판사의 일을 한다고 판사가 됩니까? 사람을 모아놓고 주사를 찌른다고 우리가 의사가 됩니까? 아닙니다.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압니다. 내가 장로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 가를 압니다. 내가 권사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가 목사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압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제일 시급한 문제는 자기 정체성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를 결정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오늘 현대판 탕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그 부자집에 아무 고통도 없는 둘째 아들. 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에 위기가 왔습니다. 자기가 그 집의 아들인 것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모든 삶의 고통은 하나님의 권세 받은 자녀라는 것을 모르는데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 권세를 내동댕이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삶의 혼란, 모든 삶의 고통, 모든 삶의 아픔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당당함, 확신, 고마움, 감사 이것들을 너무 쉽게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술잔 하나 때문에, 어떤 사회적인 분위기 하나 때문에, 어떤 여건 하나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이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픔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쓰러지는 사람, 넘어지는 사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모든 삶의 고통, 모든 삶의 문제들이 그 사람 속에서 왜 일어났는가? 스스로 그 신분을 상실한 어리석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현대판 탕자의 고민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를 가리켜서 이렇게 부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되시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됨의 신분을 찾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혈을 주고 산 생명을 함부로 내동댕이치지 마십시오. 스스로 세상 사람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 자녀됨의 신분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값없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시하려는 자기 혼란과 자기 착각과 자기 무지와 자기 어리석음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는 제발 그 방황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이 끝없이 일하는 것처럼 사탄도 끝없이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야 하나님과 함께 있고, 또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줄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 속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것은 사탄이 공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일어난 최고의 사건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므로 내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술, 담배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전에다가 그렇게 못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에 주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기에 비굴하지 않고 하늘의 평화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비밀을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 이 비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빼앗을 수 있다면 다 빼앗아 갔습니다. 만일 권세를 가진 사람이 권세의 책략으로 그것을 차지한다면 그것을 차지할 사람이 여기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위로하시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소식은 지상 최고의 기쁜 소식이요, 인류 역사에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죄 많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격상되는 신분의 변화를 얻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우리가 종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아들이면 마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한 일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주신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에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어려울 때에 아버지를 찾습니다. 어머니를 찾습니다. 주의 성령이 이 시간도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끝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깨우침과 각성과 깨달음을 주십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온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으로 권능의 체험을 받아 아무쪼록 다시 당당한 신분을 회복하는 그런 귀한 축복의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은 우리의 믿음이지만 우리의 걸음마다 때마다 순종하는 손길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내 생애에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금년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국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와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 졌습니다. 길거리에 캐롤송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의 분명한 약속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는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제한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제한하는 것은 내 신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를 제한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서 벗어나십시오. 잘 믿든 못 믿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내 경험과 지식 안에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혼돈과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둠의 그늘이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심하게 일어납니다. 그런 것처럼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 훨씬 짙게 덮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는 낙심해서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의 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영혼들 속에 임마누엘의 하늘의 빛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고된 생활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풍성함이 나타나고, 질병과 외로움 속에 임마누엘 하나님의 치유가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과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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