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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무엇이 더 중요한가? (마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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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한 농부가 어느 날 경비행기들이 쓰는 시골 비행장 곁을 운전하고 지나가면서 길가에 "비행하는 스릴을 경험 해 보세요." 라고 써 붙여 놓은 광고지를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내일은 아내의 생일인데 아내에게 비행하는 스릴을 맛보게 해 주면 좋은 생일 선물이 되겠는걸.'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행장으로 들어가서 좀 헤맨 뒤 아내와 자기를 태우고 자기 농장 위를 비행해 줄 조종사를 만났습니다. 이 조종사는 작은 비행기의 주인이었는데 조종실이 열려 있어서 그 프로펠러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분명 스릴이 있을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비행하는 요금이 너무 비쌌습니다. 농부는 좀 싸게 하자고 오랫동안 흥정을 하였습니다. 조종사는 드디어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낮은 요금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부부가 비행하고 있는 동안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한 마디만 하면 원래 값을 다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부가 자기 부인에게 스릴 있는 비행 경험을 갖게 하겠다는 결심이 낮은 값을 내는 조건보다는 훨씬 강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얼마 되지 않아 높이 떠올랐습니다. 그 조종사는 만일 자기가 운전을 상하 좌우로 거칠게 하고 있으면 뒷자리에 앉은 부부는 곧 소리를 내게 되어 자기는 당초의 비싼 값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조종사는 갑자기 낙하를 했다가 방향을 바꾸고 또 급상승했다가 급강하를 하고 그 뿐만 아니라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도 잦아드는 호소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착륙 했을 때 조종사는 농부의 결심에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 마디 소리도 안 내다니. 나는 낙하하고 돌고, 급 하강하고 급상승하는 등 지금까지 그렇게 위험한 비행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한 마디도 안 하더군요. 아저씨가 이기셨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이 말을 되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마터면 당신이 이길 뻔했어요. 사실 내 마누라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큰 소리를 낼 뻔했지요."  이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수 십 년 함께 살아 온 아내 보다 돈인 것이 분명합니다. 인생을 살 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리는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밤하늘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별을 보고 저 멀리 이방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밤마다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는 그 별이 아주 특별한 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2절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그 별이 왕의 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이 자신들을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유대 땅에 아주 특별한 유대인들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그 별을 따라 유대의 예루살렘까지 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소비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별을 따라 가야하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 별이 어디까지 자신들을 인도해 갈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별을 따르기 위해서는 각별한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별은 아주 특별한 별이었고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로서는 자신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어떤 시련보다 가치 있고, 귀한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런 각오가 없었다면 엄청난 비용을 소비해 가면서 그 멀리서부터 사막을 건너 추운 밤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쉼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 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물질을 투자하면서 별이 인도하는 곳에는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것이 있다는 확신 속에서 생명의 위협과 도적과 강도의 위협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인생을 변화시킬 그 별의 인도를 따라 조금씩 조금씩 예루살렘으로 향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예루살렘은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그들은 별의 주인이 있는 그곳이 이렇게 조용한 것에 대해 무척 의아해 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저 멀리 동방에서부터 그분의 별을 보고 이렇게 선물을 준비하여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했던 예루살렘을 소란과 음모와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왕이 어디에 있느냐?는 그 말은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메가 톤 급의 엄청난 태풍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를 다스리던 왕 헤롯을 시작으로 온 예루살렘이 들썩 들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조직을 동원해서 어디에 왕이 나왔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모든 구절을 암송하다시피 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한 구절 읽었습니다. 그 구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유대 나라의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구절을 족집게처럼 집어냈습니다.

  이제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난 별의 주인이 바로 메시아의 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이 땅에 오는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태어나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헤롯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어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오직 별을 보고 멀리 서 찾아 온 동방박사 외에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예수 그리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오직 유일한 중보자(딤전2:5)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이름으로 주어진 유일한 이름(행4:12)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에는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 가운데 죽는 비참한 인생입니다. 죄는 인생에게 불행을 주고 고통을 줍니다. 죄은 인생에게 질병을 주고, 죄는 인생에게 소망을 빼앗아갑니다.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죄는 서로 싸우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나누게 만들고,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낙을 누리가 합니다. 그 죄악을 인생이 주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 죄악의 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죄악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는 41명의 남학생들이 여학생 두 명을 강간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끔직한 범죄입니다. 이렇게 수모를 당한 여학생들을 향해 형사들은 네가 우리 고향의 물을 다 흐려 놨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로마에 가시면 마틴 루터가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라테라 성당'이라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라테라 성당’을 올라갈 때 그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계단을 올라가면서 무릎에서 피가 흐르면 더 큰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루터는 이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오르고 내려도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과 로마서를 읽으면서 죄는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로 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와 물을 흘려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하고 중요한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몰랐어도 지금 우리가 볼 때 동방박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을 만난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고, 만날 볼 이유가 있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물질을 투자하여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여행을 위해 많은 비용도 투자했습니다. 몸은 피곤했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그 별의 주인인 그 왕을 만나 보는 것이 오직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먼 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연약한 육신을 이끌고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어떤 이유로 와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동방 박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과거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인생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명예를 얻으면 성공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돈을 손에 넣으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위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는 결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생의 문제는 그분을 만나면서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아는 순간 그 인생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한갓 어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세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의 가파른 언덕을 살기로 가득해서 넘어가던 혈기의 사람 바울은 그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 인생의 길이 완전히 180도 달라졌습니다. 저 뜨거운 사막의 바람 속에서 장인의 양을 돌보며 처가살이로 40년의 긴 세월을 방황하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이 대대로 우상을 깎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집의 아들로 태어나 희망이 없었던 한 갓 목공의 아들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요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를 만나야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고, 목적을 알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기뻐하고 크게 기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바로 동방박사들었습니다. 사실 메시아의 탄생을 가장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환영해야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오랜 시간 동안 믿음으로 기다려 왔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동방박사와 달리 기뻐하지도 않았고 베들레헴에도 찾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메시아가 오는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메시아가 올 장소로 성역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성경 말씀을 읽고 기억할 뿐이었지 동방박사들처럼 일어난 현상에 의혹을 가지면서 탐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말씀이었을 뿐이었고,  자신들의 명예를 유지시키고 출세의 기반을 마련하는 도구였을 뿐, 세상을 변화시키는 어떤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이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침판과 같이 여러분의 인생을 안내하는 인도자요 방향을 잡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힌 길을 열고, 닫혀 있는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주일을 온전히 지키고 그 주일에 떨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영혼이 사탄과 마귀의 권세에서 이겨내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않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은 역사상 24시간 동안 대통령이 없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때문입니다. 미국 헌법은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재커리 테일러가 취임하는 날인 1849년 3월4일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날이 주일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대통령이라는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살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당시에 최고의 지성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잘 알고 있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 성경의 말씀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는한 그 말씀은 어떤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기적도 없는 것이며, 인생의 감사나 기적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기적을 일으키며 내 인생의 빛이고 등불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동방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그 큰 별을 무심히 지나 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어떤 별인지를 알기 원했고, 일생의 일대 최대 결단을 했습니다. 그 결단은 놀랍게도 온 인류를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했고,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분에게는 무엇인가 있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인도의 복음 선교사 썬다 싱이 기차 안에서 사람들에게 책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열차 승객들에게 요한복음이 기록된 작은 책자들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이것을 받은 어떤 사람이 보지도 않고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침 철길을 따라 배고픔으로 걷고 있었던 가난한 어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이 조각이 기차에서 떨어져 흩어져 날리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그것들을 주웠습니다. 그가 주운 찢어진 종이에는 ‘생명의 떡’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배고픈 중에 가장 크게 들어오는 글자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말이 성경에 나온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성경책 한 권 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떡’이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지 찾기 위해 성경을 한장 한장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영원한 죄인이요 그 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찢어진 종이 한 장에 있었던 ‘생명의 떡’이라는 작은 글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찾고 또 찾은 결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생의 문제뿐만 아니라 저생의 문제도 해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인생에서 중요한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아직도 죄가 남아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구원받아야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죄는 우리의 눈을 가려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죄의 고삐로 묶어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마르다와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선택하여 축복받은 것처럼 동방박사들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반면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지식은 잘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나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마귀에 붙들려 세상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면서 그 기쁨의 자리에 있어야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날에 동방박사처럼 생일 예물을 준비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금 함께 예배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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