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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되신 하나님 (롬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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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님을 2:28-29절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라야 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 해서 참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한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큰 도전이었고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에 대해 유대인들은 동의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요 유대인들만의 특권인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늘 대접받아 왔고 돈 잃고 권력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들은 특별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생활 중에도 자신은 충성했으니 할 만큼 했으니 늘 특별대접을 받아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또 하나의 부담이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요인입니다.
특별히 기도해 주세요, 특별히 사랑해 주세요, 우리 집에는 특별히 담임목사님이 오셔야 합니다. 하는 마음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많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나중에 서운해 한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 자시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하여 이전에 나누었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한테 이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들 중에 죄송한 것은 아예 사랑을 받지 못했다 싶은 분은 절대로 서운해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눈길하나 준 것 아이 한번 안아 준 것을 큰 사랑으로 감사하며 고마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한 사업장 개업예배에 가게 되었습니다.
박영희 박홍숙 집사 가족들이 하는 주방가구 전시장이었습니다. 저들은 처음으로 목사를 마주대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년 넘도록 전화통화 한 번도 못했고 제대로 사랑한 번 주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으로 예배를 인도했는데 집에 가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환자로 누워계신 어머니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의학적인 원인도 모른 채 20년을 넘게 누워 몸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말입니다. 그 어머니는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니 자신이 누구인지 가족이 누구인지 모른 채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딸 박영희 집사 가족 며느리 박홍숙 가족이 함께 사랑하며 섬겨 주는 것입니다. 20년이 넘게 사랑을 주며 살았던 것입니다. 저들이 좋은 마음 가지고 있으니 아들도 사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입 맞추어 준다는 것입니다. 서로 모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기고 좋은 것으로 먹이고 행여 어머니가 무의식중에라도 들으실까 하여 설교 테잎을 종일 틀어주고 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20년을 넘게 너무 많은 희생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어머니를 이렇게 모시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데도 저들은 힘들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오늘 오셨다 가시면 언제 올지 모르는 목사에게 어머니를 위해 단 한 번의 기도를 부탁했고 그리고 그 기도에 감격해 했고 어머니를 위한 기도문을 작성해놓고 목사에게 사인해 달라 하니 저들의 희생적인 사랑에 저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들은 우리 집에 많이 와 주세요, 더 많이 기도해 주세요, 더 전화 해 주세요, 하지 않고 그 한번으로 목사의 사랑을 다 받은 듯 했습니다. 얼마나 죄송하고 감사 하던지요.
나는 특별히 사랑 받아야 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선택을 입은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똑 같이 여기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는 것처럼 자신들도 똑 같은 기준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 유대인들은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 받은 자로서의 유익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받지 않았다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를 특별히 받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선민으로서의 유대인의 역사적 의미는 상실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자랑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선 9:4.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양자됨의 축복과 영광 언약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민족의 허리를 통해서 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2절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많은 중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로기아:logia]입니다. [신탁,神託:an oracle]이라는 말이며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기아]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리자이며 전달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요 모든 민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 받은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큰 행복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난 유대인들의 착각이 무엇입니까?
대표로 가서 상 받아 오랬더니 그 상이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유대인들만 특별히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의 통치자요 섭리자로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만을 위해 오셔야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인을 구원하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착각합니까? 왜 우월의식을 갖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역사 속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방법으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 되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셨고 그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보십시오.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습니까? 하늘의 별의 숫자는 바다의 모래알의 숫자와 같다 합니다.
그 별들의 크기는 어떠합니까? 저와 여러분들을 비추이고 있는 태양의 크기를 아십니까? 태양을 가득 채우려면 약 130만개의 지구를 집어넣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큰 태양을 우주에 있는 다른 별들에 비하면 한낱 작은 혹성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계의 넓이는 어떠합니까? 은하계의 직경거리도 약 10만 광년이라 합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186,273마일)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도는데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5조8천7백억마일)이라 합니다. 빛의 속도로 그 은하계를 통과하는데 10만 광년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엄청난 우주에 그런 은하계가 또 10만개 이상이 있다 합니다. 그 우주의 질서는 어떠합니까? 그 별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하나님을 운전주로 삼아 하나님이 세우고 질서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교통사고 난적 있습니까? 그 질서가 흐트러진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주관하심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완전자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넓은 우주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일부러 여행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계의 우주공간 안에 있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존재 하시는 이것을 신학적 표현으로 무소부재(無所不在)라 합니다. 이는 어디든지 계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우주의 크기, 별들의 크기, 별들의 주요입니다. 이런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은 눈을 감고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무어라 하십니다.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 작고 보잘 것 없는 지구를 그의 거룩한 사역의 현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사45:12절에는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내가 손으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사45:18절에는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 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그 넓은 우주를 보시며 작은 지구를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사역의 현장을 삼으신 지구를 한번 보십시오. 이 지구속의 수많은 나라 중 하나님은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팔레스타인 땅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작 그리고 수많은 왕들의 역사 하나하나에 개입하셨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수많은 위기 속에 이스라엘을 보존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는 나라들을 심판하시기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때로는 에벤 에셀의 하나님으로 여호와 이레 하나님으로 여호와 닛시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으로 끊임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면 무엇인가 좀 특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가장 힘이 센 강대국으로 만드시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라도보다 작은 나라입니다. 환경적으로는 최고의 환경의 이스라엘이어야만 할 것 같은데 쓸모없는 사막지역 아닙니까? 지리적으로는 어떠합니까? 엄청난 강대국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에 애굽, 바벨로니아, 앗수르, 모압, 헤엣족속 등에 둘려 쌓여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니 언제 이스라엘의 역사에 조용한 나날들이 제대로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좋은 먹잇감이 되었듯 말입니다. 섬나라인 일본이 얼마나 이 땅을 탐을 내었습니까? 이 땅을 넘어 대륙을 보면서 중국 또한 태평양을 바라보며 이 작은 나라 조선을 얼마나 갖고 싶었겠습니까? 수 천 번의 침략 앞에 견디고 견딘 민족이니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면 애굽의 430년,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왜 잠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감격해 하셨던 성전건축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왜 잠잠하셨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아무것도 못하는 듯 느낌을 가질 때가 있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니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게 하리라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과연 대단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작은 나라입니다. 세상이 너무 죄악이 좋다하니 죄를 짓지 않고 특별한 민족을 하나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리석은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표현은 “몸이 곧은 백성이라” 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최고의 목적은 성경입니다.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 할 현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주시고 그 인생을 간섭하시고 야곱과 에서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블레셋의 침략에서 바벨론 포로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하면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엿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온 인류, 이방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품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봅니까? 이스라엘의 역사, 사람들의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보이셨던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보이셨던 하나님의 섭리 구원계획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보이셨던 메시야의 오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까지 기록된 말씀으로 오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 역사 속에 개입하셨던 것이 A.D 70년에 로마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멸망을 당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애굽이 종살이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으로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손을 거두워 버리셨는지 이스라엘이 지구상에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예언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마24:1-2절에 막13:1-22절에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시니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이 이루어져 A.D 70년에 이스라엘은 지구상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민족들이 되어 나라 없이 세계구석 구석에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손을 거두신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목적이 어떠합니까?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최고의 목적은 강대국도 의로운 민족도 아닌 성경의 기록이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A.D70년 만에 특별계시인 성경66권 기록이 끝난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완성되고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엄청난 종말론적 교훈이 있습니다.
마24:32절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을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니 24:33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였습니다.
무화과는 우리나라의 무궁화처럼 이스라엘의 국화입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구상에 완전히 사라졌던 나라가 종말론 적 의미를 담아 예언대로 이 땅에 다시 세워 질 것이 예언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언제 헛된 적 있습니까? 허공에 날아가 버린 적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재건은 모두가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A.D 70년에 멸망당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나라가 1948년 5월 14일에 1878년만에 팔레스타인의 일부영토였던 이스라엘의 원래 자리에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1878년 동안 없어졌던 나라가 다시 재건 된 것입니다. 2천년 가까이 민족의 혈통이 유지 된 것도 나라가 세워진 것도 기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끝임 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 큰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24:33절에 이스라엘이 세워지면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것입니다. “무화과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입니다. 이스라엘에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에 복음의 꽃이 피면서 재림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영적 추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못자리의 원리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큰 논에 모를 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못자리를 선택하게 됩니다. 농부의 최고의 관심과 사랑은 못자리입니다. 목적은 온 논에 모를 파종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농부 되시고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을 못자리삼아 온 세계와 인류에 복음의 파종을 하기 위함입니다. 못자리를 선택하고 온갖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농부에게 있어 바로 추수를 기다리며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추수를 목적으로 영생 얻기로 작정된 구원의 열매를 거두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은 못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사랑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오해 했던 것입니다.

최고의 신앙은 종말론 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추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 할것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은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말씀은 답을 합니다. 범사에 많으니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 저들은 하나님을 남보다 먼저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먼저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산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축복이었습니다.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복된 사람들입니까? 이방나라가 복입니까? 다 복은 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말씀 안에서 먼저 살았다는 것은 복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그것이 복인 줄 몰랐습니다. 묻겠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먼저 알고 구원을 먼저 받고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을 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자 되었나? 건강해졌나? 출세했나? 이것을 복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나중 믿은 사람만 못하는 것입니다. 나중 믿은 사람은 부자 축복 이런 것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그냥 믿은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처럼 늦게 하나님을 만났나 싶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최고입니다.
이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보다 이방인이 먼저 되듯 말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유대인처럼 신앙의 감격과 은혜를 잊고 신앙의 무덤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이스라엘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처럼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최고의 부와 건강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말씀이 말씀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계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삶을 통해 보여지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축복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되는 것 이상은 없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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