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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 (사 9:6~7,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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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1921년 2월 15일 뉴욕의 케인 서미트 병원에서는 한 의사가 맹장수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배가 아파 병원에 왔으며 맹장염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날의 수술은 이반 오닐 케인박사가 집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37년의 의사 경력을 가진 케인박사는 4천 번의 맹장 수술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수술이었지만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맹장 수술 최초로 국소마취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환자가 좀 독특하다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집도한 케인박사는 전신마취를 반대해왔습니다. 그 때까지는 국소마취를 하지 않을 때였기에 국소마취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케인박사는 국소마취는 안전하다는 이론을 펼쳤지만 실제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을 할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말짱한 정신으로 수술을 받지?” “마취가 일찍 깨면 어떻게 하지?” 2월 15일 드디어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국소마취로 수술은 시작되었습니다. 환자의 회복 속도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케인박사의 이론이 증명되었습니다. 국소마취가 더 효과적이란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케인박사의 집도로 처음 수술을 받은 환자는 케인박사 자신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환자가 된 의사 이야기는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언약의 성취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우리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쁜 날입니다. 구주가 나셔서 비로소 죄인에게 희망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9:6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가지신 이름들입니다.

  이 아기를 처음 본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일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12에는 “너희가 가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누워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하시기에 구유에 누울 수 있습니다. 겸손하시기에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표적은 기적입니다.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입니다. 더구나 아기가 되신 것 이상의 기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기적 그 자체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죽기 위해 오신 삶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9에는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을 맛보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신 말씀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33에는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삶은 죽음을 보이신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놓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미국에서 집안을 장식할 때 가장 많은 돈을 드리는 명절이 둘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평화, 희망, 사랑, 생명과 같이 선한 것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할로윈은 악, 죽음과 같이 두렵게 하는 세력들이 집결하는 의미를 가진 날입니다. 두 날은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할로윈은 죽음과 악의 세력을 기리는 날이지만 성탄은 죽음을 이기는 날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죽음을 극복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죽음을 극복합니다.

  한번은 나폴레옹이 쇠비늘이 있는 갑옷을 주문하였습니다. 갑옷을 만드는 장인이 갑옷을 다 만들어서 황제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입기 전에 그 갑옷을 만든 장인에게 입어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황제는 총에 불을 붙이고 갑옷을 입은 그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내가 죽지 않는 것을 증명해야 남도 죽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남을 살리십니다.

  빌립보서 2:8에는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복종은 죽기까지입니다. 죽음과 맞바꾼 복종입니다. 복종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의 핵심은 ‘원인’(cause)이 아닌 ‘목적’(purpose), 곧 의미에 있습니다. 주된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말했습니다.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 우리의 구원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이 지구상에 있는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든 질고를 짊어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둘째, 구원하기 위해 오신 삶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구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 삶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온갖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이지 도덕이 아닙니다. 삶의 지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21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이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구원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외의 어떤 이유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기 때에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메시야의 도래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늙은 시므온은 매일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메시야를 만납니다. 누가복음 2:30에는 시므온이 아기를 보고 감격스럽게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어떻게 갓난아기를 보고 구원을 보았다고 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직 아기이셨지만 구원자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보고 구원자라고 한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아직 아기입니다.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없는데 구원을 보았다는 것은 엄청난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도 시므온의 신령한 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헨리 나우웬의 매일 아침 갠지스 강둑 큰나무 아래서 묵상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 노인이 묵상을 마친 뒤에 물속에서 살 가망이 없이 떠내려 오는 전갈을 발견하였습니다. 노인은 재빨리 나무뿌리 위로 올라가서 손을 내밀어 전갈의 생명을 구해줍니다. 전갈은 순간적으로 침을 쏩니다. 노인은 본능적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습니다. 몇 분 뒤에 노인은 다시 전갈을 건지려고 하였고 전갈은 독 있는 꼬리로 침을 쏘았습니다. 노인의 손은 금방 부어올랐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소리칩니다. “여보시오. 불쌍한 노인장, 사납고 흉측한 전갈 때문에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오. 그 배은망덕한 전갈을 구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침을 쏘는 건 전갈의 본성이오. 하지만 그 때문에 전갈을 구해주고자 하는 내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오”. 그 분이 구원하시려 했던 전갈은 결국 그 분을 죽였습니다. “친구여. 상처를 입히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내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는 것이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태닉이 침몰하였습니다. 당시에 2,224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 1,515명이 대서양에 수장되었습니다. 육지에서 게시된 승객 명단에는 두 줄로 구분하였습니다. 구조자와 실종자입니다. 하나님의 명단에도 똑같이 단순합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구조자가 많게 하시려고 합니다. 실종자가 없기를 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셋째, 다리를 놓기 위해 오신 삶입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헐고, 중간의 큰 골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얼어붙은 물속에서 밤샘 작업을 하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르제브 전방의 러시아 병사들은 강 밑을 지나는 비밀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어둠에 달이 묻히고 눈이 얼어붙은 수면을 덮을 때 강인한 러시아 병사들은 침묵 가운데서 차디찬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작업을 하였습니다. 떠다니는 얼음 조각으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치군사의 허를 찌르며 겨울동안 하얗게 변한 러시아 탱크가 얇은 얼음을 뚫고 물 밑에 감추어진 다리를 건너 강가로 밀어닥쳤습니다. 탱크는 기병대가 완전히 마비된 나치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나치군은 물속의 다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패주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리입니다. 물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다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다리입니다.

  어떤 시인이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담을 쌓는 일은 쉽게 하지만 다리를 놓는 일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투스는 “로고스는 모순과 대립을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순과 대립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 다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연결한 것입니다.

결론

  사라는 1800년대 말에 2천만 달러의 상속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매일 천 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비참한 사생활을 하였습니다. 딸이 태어난지 5주 만에 죽었습니다. 남편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서부로 이주하여 산호제 인근에 160에이커의 땅을 샀습니다. 우리 평수로는 약 200만평 되는 넓은 대지입니다. 그 대지 위에 있는 집을 헐고 다시 지었습니다. 그 집을 짓는데 16명의 목수가 38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상식을 벗어난 설계를 하였습니다. 창문에는 13개의 유리가 있었습니다. 벽에는 13개의 널빤지를 붙였습니다. 벽장에는 13개의 옷걸이를 달았습니다. 복도는 꼬불꼬불하였고 끝까지 가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복도도 있었습니다. 계단은 문도 없는 천장에 닿도록 하였습니다. 함정의 문이 있는가 하면 비밀 통로는 터널로 만들었습니다. 이 집은 그녀가 죽은 후에 완성되었습니다. 집의 규모만 약 6에이커였습니다. 우리 평수로는 건평이 약 7,200평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6개의 부엌, 13개의 욕실, 40군데의 계단, 525개의 채광창, 467개의 문, 1만개의 유리창, 160개의 방, 한 개의 종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방문객을 위한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밤에 방문객들이 찾아옵니다. 사라는 새벽 두시까지 파란 방에서 방문객을 기다리다가 두시에 자기 침실로 돌아오면 방문객들도 사라집니다. 이 집의 여주인은 사라 윈체스터입니다. 서부 활극 시대에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윈체스터 총의 상속녀입니다. 윈체스터 총은 미국 시장에 가장 널리 보급된 총입니다. 이 총이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백만 달러를 벌게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죽은 영혼을 위한 집을 집고 회한의 성에서 살다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무참히 죽어간 영혼들을 위한 추모의 방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만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에 빠트린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싸고 으리으리한 방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박한 마음의 방을 원하십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묵상하는 마음의 여유 있는 방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구유에 나시지 않게 해드려야 합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고 하십니다. 죽음대신 삶을 주신 아기를 바라보십시오. 멸망을 구원으로 바꾸어주신 아기를 바라보십시오. 끊어진 관계를 다리 놓아 연결하시고 만나게 하신 아기를 보십시오.

  이 아기를 바라보고, 이 아기를 찬양하고, 이 아기를 경배하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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