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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때, 나는 누구인가? (막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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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덴마크의 종교사상가요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요, 죽는 존재요, 종말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9:27)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날”, “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뒤, 그 심판의 자리, 그때 예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때,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일까? 지금 강림절이라, 주님오심을 기다리는 이때에 주님께서 오신다면, 그분 앞에서 나는 누구일까?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 그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그때는 꼭 죽은 뒤, 먼 훗날만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기독교는 현재보다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앞에 것, 즉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하셨고,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았고, 자신을 위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께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여기의 삶이 자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달리기, 그 끝에는 결승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메달이 주어집니다. 1등, 2등, 3등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완주하기만 하면 주어지는 매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뛴 사람, 그리고 완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메달입니다.
“시작이 반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론 시작만 하면 결국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린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시작하여 결국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완공까지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그 무엇이 있는 겁니다. 만약 기공예배 드리고 “이젠 교회가 완공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땅도 파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작부터 완공까지 성도들의 땀 흘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믿으니까 먼 훗날 나도 구원 받을 거야.”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믿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입니다. 언제나 ‘지금, 여기’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셨던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에서의 ‘지금’은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시던 그때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언제나 ‘지금’입니다. 어제 저녁은 어제 저녁 때 ‘지금’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은 내일 아침에 ‘지금’입니다. 내가 숨쉬며 맞이한 이 시간이 ‘지금’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하면, 먼 훗날에도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냥 “믿습니다.” 고백만 하고, 예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 먼 훗날에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의 행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 훗날은 지금, 여기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공부하지 않은 학생이 앞으로 잘 할 거라고 믿는 것은, 좋은 성적이 될 거라고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연말, 한해의 끄트머리에 서있습니다. 1월 1일부터 오늘까지 살아온 과정이 있습니다. 그 순간순간의 과정이 오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 과정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연말에 가서 왕창 주시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관 즉 “인간이라 뭐냐?”고 했을 때, 그 대답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존재” 그것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등등. 그래서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나중에 왕창.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비유에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내가 일, 이년 다른 도시에 가서 돈 좀 벌어가지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내일이 너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인생은 마치 안개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나중도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저는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가난한 과부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먼 훗날 심판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선 내 모습일 테니까요.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살아가는 내 모습일 테니까요.

바리새인들.
이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학자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에 대해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 마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의 가르치는 교훈을 따르라. 그러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행동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신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어떻게 보면 날 위해서입니다. 구원도 내가 싫다면 그만입니다. “나 천국에 갈 생각 없다.”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런 생각이 신앙생활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동시에 의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배, 헌신, 전도 등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기 위함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안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은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다닙니다. 자신을 높이 드러내기 위해서 회당의 윗자리에 앉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잔칫집 상석에 앉습니다.
이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들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고,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속에는 썩은 송장이 들어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서기관들. 그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했고, 봉사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려고 헸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섬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다투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아들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또 하는 왼편에 앉혀주기를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나 신경전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조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가난하게 혼자 사는 여인.
회당 안 연보 궤에 사람들이 연보 즉 헌금을 했습니다. 모두들 자랑스럽게, 의기양양하게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행여나 누가 볼세라 부끄러운 마음으로 헌금합니다. 좀 더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 가지고 헌금합니다.
“겨우 두 렙돈이라니. 그것도 헌금이냐? 아이들 사탕 값도 안 되겠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그 여인을 조롱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잘났다고 스스로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이 가난하게 혼자 사는, 그래서 헌금할 돈도 없는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여인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헌금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행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비록 작은 돈이지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렇게 못 합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해 보세요.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 보세요.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것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놓을 때 일부분을 감춘 것도 이 사람들의 말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을 싫어하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이 여인이 칭찬 받은 겁니다. 헌금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양이 컸기에 칭찬 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온 마음으로 드려지는 성도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돈이 아니라 성도들의 헌신으로 되어지는 겁니다. 돈 갖고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복권을 당첨시켜 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작지만 자기 소유를 모두 드린 가난한 이 여인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 여인이 그렇게,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받으셨다면, 나도 칭찬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10억을 헌금한 사람을 칭찬하시고, 이 여인과 같이 헌금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으셨다면, 저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 이야기도 우리는 압니다. 그 여인은 마지막 양식, 그것도 아들과 먹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마지막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것으로 먹을거리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해, 자신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믿는다.”고 말들 하는데, 도대체 뭘 믿는다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 것 아닙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곧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세상 사람들도 믿는 구석이 있으면 큰 소리 펑펑 치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을 믿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쫀쫀합니까? 뭐가 두려워서 바들바들 떱니까?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이 가난하게 혼자 사는 여인이나 사르밧에서 혼자 사는 여인이 우리와 다른 게 뭐 있습니까? 따지면 우리가 훨씬 나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모양입니까? 그것은, 그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 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지금 물질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라는구나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분 속에 아직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신 겁니다. 아직도 들을 귀를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전, 헌금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여인들은 헌금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드린 겁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
먹을거리만 넉넉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돌들로 떡이 되게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겁니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물질도 못 내어놓으면서 어떻게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이니라.”(요 6:29)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믿는 자들이 생명을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생명을 주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단순한 죄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생명이 내 것인 양, 바리새인처럼 섬김 받으려 하고, 인사 받으려 하고, 자기 알아주기만 바란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서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서기를 축원합니다. 책망 받는 사람이 아니라 칭찬 받는 사람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때, 그때도 구원받은 사람으로 예수님 앞에 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9절에,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손에 종려가지 나무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합니다. 이들이 복 있는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장막을 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오른편에는 양, 왼편에는 염소가 있습니다. 오른편은 구원 받은 자요, 왼편은 멸망 받을 자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쪽의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 여러분은 누구이겠습니까?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그때, 그리고 지금, 칭찬과 구원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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