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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크신 은혜라 (사 6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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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영태 목사 (2004.12.26)

405장 찬송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불리는 찬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나 같은 죄인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죄인도 없습니다. 주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부인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저주하거나 폭력을 사용하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엄청난 죄악에도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나 같은 죄인입니다. 바울은 그의 이런 모습을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하지요. 이 찬송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금년한 해도 훌떡 지나갔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냥 보통으로 한해가 지나  갔을 것이고, 중년층은 조금 빨리 갔다 느꼈을 것이고  연세 드신 어른들은 왜 이렇게 빨리 갔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빨리 갔던 늦게 갔던 한해가 다 갔습니다. 한해는 12달이고 365일입니다. 시간으로는 36524시간입니다. 분으로는 2191440분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1초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사는 존재인데 그 많은 시간들을 아무 일이 없이 잘도 살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여러 가지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 까지도 볼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두 다리가 성하고 두 팔을 움직일 수가 있으니 여기까지 온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미국의 어느 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햄크스'라는 사람이 갑작스런 사고로  두 눈과 두 손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크게 절망 했습니다. 그는 많은 생각을 하던 끝에 그만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몇 번 시도했지만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굶어 죽기로 작정을 하고 굶는 중, 라디오를 듣는데 예일대학교의 유명한 교수가 자기 집 옆에 위치한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곳에 참석한 그는 "누구든지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예배 후, 햄크스는 그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나 같이 두 눈도 없고, 두 손도 없는 인간에게도 사명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교수는 물론이지요. "당신에게는 아직도 입과 귀와 발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눈과 손은 없을 지라도 당신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전광과 같은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회개하면서 자기에게 입과 귀와 발을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텐포드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한 후 미국의 유명한 대강연가가 되어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껏  산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아무리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것에 넘어지거나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7절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우리가 부모를 생각할 때에 부모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부모에 대한 은혜는 말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것은 값으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키운 그 공은 측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가난한 가정일수록 자녀를 키운 공은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빠지지 않게 하기위하여 부모가 드리는 공과 희생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은혜에 대하여 할말이 없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지요.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입니까? 그런데 그 은혜를 모르고 산다. 은혜를 모르는 이 백성을 향하여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말하겠다. 하고 나선 것입니다.

1하나님은 끝까지 믿어주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은 내백성이요 그 말씀은 인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하는 말씀은 이해가 안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행했습니까? 하나님만 섬긴다 하고 우상을 섬긴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다. 고 하고 불평한 것이 바다의 모래 알 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런데 거짓을 행치 아니한 자녀라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믿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 자식에 대하여 나쁘다는 부모가 없습니다. 이유는 그자식의 미래를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철부지 같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러나 장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고 믿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한해 우리는 조금 경제가 어렵다고 다 죽을 사람처럼 말하고 살았습니다. 뉴스시간마다 살기가 어렵다고 못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려하는바가 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우리가 못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못산다, 못산다, 하다보면 결국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결국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으로 시인한대로 만들어 주십니다. 입으로 시인한대로 믿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은 감사할일이 너무 많습니다.  감사하면 감사가 넘치고 불평하면 불평이 넘칠 것입니다. 이 해를 마감 하면서 무슨 열매를 따서 담을 것입니까? 감사의 열매를 따서 담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환난 가운데서도 동참하여 주셨습니다.
9절상반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홀로가게 하신 적이 있는가. 없어요. 저들이 잘할 때도 잘못할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계셨지요. 광야를 가는 내내 하나님은 저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만나로 먹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이 누구의 은혜 입니까? 주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집을 뛰쳐나옵니다. 저는 광야를 걸으면서 인간적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추위와 두려움과 허기짐 속에서 길을 갑니다. 밤이 어두워져서 외로움과 무서움이 극에 달할 때 돌을 하나 취하여 베게삼아 잠이 들지요. 그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밤이슬을 맞으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가 기뻐서 소리친 말이 무슨 말입니까?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왜요 그는 약속의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잘한 일이 무엇입니까? 잘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자식인데 무얼 자랑하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약속의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도 약속의자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환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부족할 때 천군천사들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지금도 천군천사들이 호위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아멘

3.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교회권사님들을 보면 교역자의 자녀들을 안아주시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우리 부교역자 사모들이 교회 여러 부분에서 열심히 봉사하지요. 성가대로 교사로 노인대학도우미로 그러다보니 딸려있는 어린 아이들이 문제예요. 그것을 우리 권사님들이 감당을 해줍니다. 그래서 안아 주는 거예요. 그런데 안아준다고 아무나 안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안아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한, 두 번 안아 줄지 모르지만 무슨 사명 받은 사람처럼 안아 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 주신대요. 사랑한다는 말씀이지요.  9절 하반절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안아 주시는데 그냥 안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과 그 긍휼로 안아 주십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한 사랑입니다. 그 긍휼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긍휼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안아 주신다. 할렐루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데 뭐가 더 필요 합니까? 주의 품에 안겼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 한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 하신 줄로 믿습니다. 시23편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14절에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죄를 짖고 원망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의 품에 안겨 편히 쉬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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