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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 (사 7:10-16, 롬 1:1-7,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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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리는 절기를 말합니다. 일단은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지만, 이미 세상에 오신 주님을 오늘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며,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를 새롭게 다짐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하고 물었듯이 “기다림”은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한 특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2천여 년 전에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주님 다시 오실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들이었고, 세상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신 주님 즉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당하여 복음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기다림에 대한 소망의 등불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실 아기의 이름을 두 가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하나는 마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다른 하나는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오심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교계 일각에서는 성탄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성탄절이 그 본질에서 엄청나게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육지책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성탄절 회복을 위한 제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절망의 먹구름이 덮고 있습니다. 마치 2천여 년 전 우리 주님이 오실 때 유대 사회와도 같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이 오셔서 세상에 소망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유일한 소망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임마누엘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1. 샬롬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던 날, 하늘에서 천사들이 외친 첫 번 성탄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생애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에 제자들과 나누신 다락방 강화에서도 역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의 충격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제자들을 만나셔서 선포하신 것도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옛날에 메시아 선지자로 유명한 이사야가 미리 예언했던 대로 우리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평화의 삶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평화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와 이 세상에서도 역시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그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1)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에덴에서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온갖 불행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불행과 고통 그리고 종국적으로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마져도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 사랑과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구약 이사야서에서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실 줄 믿습니다.

(2) 주님은 우리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피차 사랑해야 할 인간이 타락 후 오직 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부부 즉 아담과 이브 사이에 나타났고, 특히 가인이 그 형제 아벨을 돌로 쳐 죽인데서 확실하게 들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가인과 아벨의 불행한 싸움은 마치 물줄기처럼 흘러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가공할 만큼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살펴 조십시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사회가 온통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 아닙니까? 여기 교회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마저도 이런 싸움의 와중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한 건전한 발전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밟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돕고, 서로가 서로를 세우는 사랑의 세상,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본을 보여 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주님의 방법이 바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우주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마련하신 에덴은 이름 그대로 기쁨의 동산이요 평화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고 났을 때 그들이 찾아가게 된 곳은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의 청지기로 세우시면서 “잘 관리하라”고 하셨으나 인간은 이 땅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 때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모두들 자기들 좋을 대로만 행하여 바야흐로 이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 가고 있습니다. 만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은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고, 사막에 강물이 흐르는 파라다이스입니다. 사시사철 생명의 샘물이 흐르는 곳, 강가에 있는 과일들이 열두 달을 번갈아가며 열매를 맺는 세상, 풍요하고 생명이 넘치고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이 주님이 주인 되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주님은 오셨습니다.

2. 주님은 기쁨의 삶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 오시던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들을 통하여 전해진 성탄의 소식은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니....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맨 처음 외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유앙겔리온” 즉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와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구원과 회복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오셔서 이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실라는 예수 때문에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것이 옥문을 열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곧 우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이라고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성탄절이야말로 주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성탄 찬송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아닙니까? 이 노래의 원래 뜻은 ”주께서 오셨도다 온 세상이여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들로부터 모든 기쁨을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이 성탄절에 주님을 다시 새롭게 영접하므로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기쁨이 회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 나눔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성례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 성례전이요 다른 하나는 성찬 성례전입니다. 주님은 성찬 성례전을 제정하시고는 “내가 올 때까지 이 일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 교회는 가장 중요한 성례전으로 성찬 성례전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성찬 성례전은 그 예식을 행하는데 만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그때 주님은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행위였습니다. 즉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소위 유뮤상통(有無相通)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세상은 극단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가 살고 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싸우고 다투고 심지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국가간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대량살상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은 나누는 삶만이 세상을 살리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을 향하여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내가 살고 세상을 살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눈다”는 말은 “비운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세상에 오셨듯이 이제 주님을 믿는 우리도 주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섬기므로 이 땅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임마누엘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평화의 삶을 회복하시고, 기쁨의 삶을 회복하시고, 나누는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한 작은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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